84화
“그, 그렇군요. 제가 다급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정말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거듭 소저께 실망만 안겨드리네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소저의 마음이 풀릴까요? 어리석은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정말 뭐든 소저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공자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관심과 호의에 마음이 움직여 하룻밤 동침을 한 것이니 너무 매몰차게 대할 수가 없네요. 우선은 소녀의 마음이 불편하니 그만 무릎 꿇고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아닙니다. 마음이 풀린 소저가 용서해줄 때까지 그대로 있겠습니다.”
“이미 용서했다니까요. 그리고 제가 하라는 대로 뭐든 하겠다 하셨으면서 그것도 단순히 빈말 이었나요?”
“아, 아닙니다.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손사래를 치며 당황하던 비담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궁소미가 만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호호, 다행히 진심이셨군요. 저는 아침 고풍루에서의 상황처럼 또 제 말을 따라주지 않으면 어쩌나 가슴이 철렁했었는데 이제 안심이 됩니다. 그럼 우선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리겠습니다. 저의 입장이나 체면이 있으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당분간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해주세요. 제가 나중에 때가 되면 증조할아버지를 비롯해 세가의 어른들께 당신을 소개하고 허락을 받아낼 때까지만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주세요. 저 역시 어젯밤 공자님께 몸을 허락한 순간 이미 마음까지 모두 내어드렸기에 한시라도 빨리 혼례를 치르고 백년가약을 맺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우리 서로를 의지하고 조금만 참아요. 그래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설사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갈 용의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저만 믿으십시오. 그런데 검황 어르신께도 비밀로 하시게요? 저번에 말씀하신 걸로 미루어 소저와 저의 관계를 좋게 여기고 다리까지 놓아주시려 했는데...”
“그래도 당분간은 둘만의 비밀로 하는 것이 시끄럽지 않을 거예요. 증조할아버지께서 공자님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증손녀사윗감에 국한된 것이에요. 만약 공자께서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술에 취해 저와 동침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무조건 소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참, 그리고 차마 부끄러워 말씀을 못 드렸는데 앞으로 혼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공자님과 동침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른 이들의 이목도 있고 감각이 범인을 초월하는 증조할아버지를 속이는 것도 위험하고 내키지 않으니 소녀의 뜻에 따라주세요. 저를 위해 그리 해주실 수 있지요?”
“조, 조금 내키지 않고 아쉽지만 정 원하시면 혼례를 치르기 전까지 참아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너무 심각한 대화를 이어나가느라 심신이 지쳤으니 우리 나중에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제가 눈치도 없이 너무 오래 있었군요. 그럼 쉬십시오. 차후의 일들은 나중에 의논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그럼 저는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남궁소미는 비담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호호, 어리석고 바보 같은 작자로군. 일이 이렇게 쉬이 풀릴 줄 알았으면 그만한 공을 들이지도 말 것을 괜히 계획을 실행시키느라 시간과 노력만 허비했어. 그나저나 중간에 끼어든 그년만 아니었으면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증조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한다? 뭐 우선 당장은 동업자 관계라고 하였으니 지켜보며 기회를 엿보다 증조할아버지와 상의하는 수밖에.’
밤새 한숨도 못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남궁소미가 귀찮은 듯 고개를 휘휘 내저은 후 다시 침상에 몸을 뉘였다. 정체불명의 여인이 살벌한 협박을 하고 그만한 능력도 지녔으나 당장은 공동의 사냥감을 쫓고 있기에 별다른 위해를 끼칠 수 없다 판단한 것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비담은 울화가 치미는 것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아주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잘도 나불거리는구나. 그놈의 면상을 짓이겨놓아도 시원찮을 판에 무릎까지 꿇고 굽실거렸으니. 오냐, 오늘의 치욕 이자까지 셈해서 되돌려주마.”
일명 ‘고풍루사건’의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정확히 닷새 후.
오정회 장로회의에 참석했던 남궁헌수가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궁선미를 통해 일이 계획대로 성사되었음을 듣고 기분 좋게 웃었고, 하늘이 도왔다며 기꺼워하였다.
“허허, 아주 훨훨 날아오르라고 순풍이 불어주는구나. 안 그래도 이번에 림주가 급히 나를 부른 이유는 황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란다. 누군가 위험천만한 황궁에 잠입해 련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고위관리들을 색출함과 동시에 련의 간자들을 찾아내 제거하라고 하셨지. 목숨이 서너 개는 있어야 가능한 임무였기에 누구를 보내야하나 고심하고 망설였는데 마침 적당한 소모품이 생겼으니 네가 잘 구슬려 그 녀석을 투입시키거라.”
“정말요? 다행이네요. 이제 그 녀석은 제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이니 이번에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응할 것입니다.”
“닷새 만에 제대로 구워삶아 놓았구나.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그 녀석에게 알리거라. 이번 일을 진행하기 위해 특별히 림주께서 제갈가에서 은밀하게 관리해오던 비밀병기까지 내어주셨단다. 그 물건 때문에 현아도 함께 왔는데 잠시 준비할 것이 있다며 시장에 들른다 하였으니 곧 올게다.”
“정말요? 현아언니를 본 지도 꽤 오래됐는데 정말 잘 됐네요. 그럼 언제 황궁으로 출발하나요?”
“이틀 후에 출발할 것이다. 그리 녀석에게 전하고 너 역시 준비할 것이 있으면 차질 없이 준비하거라.”
“알았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제갈현아를 만나 수다를 떨 생각에 마냥 신나 뛰쳐나가는 남궁소미였다.
저자거리에 있는 만물상에 들러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고 있던 제갈현아는 입구에 서서 활짝 웃고 있는 남궁소미를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이게 누구야? 우리 소미 아니야?”
“현아 언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이야, 검황 어르신께서 제갈세가를 방문하셨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으니 3년만이구나. 어디보자. 그나저나 우리 꼬맹이 소녀가 못 본 사이에 현숙한 숙녀가 다 되었네.”
“헤헤, 뭘요. 오히려 언니의 미모가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뻐졌는걸요. 모용오라버니께 언니 안부는 들었어요. 요즘 시봉세 내에서 언니의 활약이 대단해 관심 한 번 받겠다고 명문가의 사내들이 줄을 선다면서요?”
“호호,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의 입담에 누가 당할 수 있겠니. 우리 이럴게 아니라 자리를 옮겨 그동안 쌓인 회포도 풀고 이야기도 나누자.”
“그래요, 저 언니랑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하룻밤으론 모자랄 지경이에요.”
필요한 물품들을 다 구했는지 제갈현아와 남궁소미는 근처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두런두런 수다를 떨며 근황을 이야기했다.
“참, 모용오라버니도 낙양에 오셨다면서?”
“네, 할아버지께서 부르셨어요.”
“어떻게 오라버니랑은 진도가 좀 나간거야? 예전부터 오라버니만 보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 일쑤였고, 얼굴이 발그레 물들어 고개도 못 들었잖니?”
“아이 참 언니도.”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며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남궁소미를 보며 제갈현아는 놀라움에 말을 더듬거렸다.
“뭐, 뭐야? 벌써...”
“쉿! 언니만 아셔야 돼요.”
다급히 입을 가리는 남궁소미를 보며 제갈현아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하여튼 엉큼한 녀석 같으니라고. 앞길 창창한 언니 제쳐두고 먼저 사내와 잤단 말이지?”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어요.”
우물쭈물 대답하면서도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달고 있는 남궁소미를 보며 제갈현아가 축하의 말을 건네주었다.
“호호, 꿈속이라도 상관없으니 오라버니에게 사랑고백 한번 받아보고 싶다며 울먹거리던 것이 어제일 같은데 결국 소원성취 하였구나. 조금 늦었지만 많이 축하해.”
“고마워요, 언니. 누구보다 언니에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었어요. 언니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아마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언니는 아직 황보 오라버니랑 좋은 소식 없어요?”
“휴우, 그러게. 나도 어서 진도를 나가야 되는데 요즘 무림의 정세가 뒤숭숭해서 오라버니가 너무 바쁘시잖아.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데 이건 서로 얼굴 한 번 보기도 힘이 드니.”
“힘내세요, 언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번 황궁 일만 잘 처리하면 한동안 서로 바쁠 일도 없을 테니 오붓한 시간 가지며 확 끌어당기면 되잖아요.”
“호호호, 인생 선배의 조언이니 잘 새겨들어야 되겠구나. 네 말대로 정말 그리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할아버지 말씀으론 이번 황궁에서의 임무가 무척 어렵고 위험하다고 하던데 정말 사실이에요?”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전면에 나설 미끼 하나만 희생하면 나머지는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