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나도 이거 배우고 이해하느라 관리들 비위 엄청 맞추고 고생했는데 어쩔 수 없지. 동생을 위해서니 기꺼이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주마. 뭐 조금 어폐가 있긴 하지만 여인과의 교합에 비유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 같으니 대충 감만 잡거라. 그럼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된다. 먼저 여인이랑 그 짓을 할 때 훤한 대낮이 좋냐? 아님 아늑한 밤이 좋냐?’
‘그야 밤이죠.’
‘그게 시간이다. 다음. 그럼 아늑하고 포근한 침상 위에서 그 짓을 할 때랑 자갈밭 위에서 할 때랑은 어디가 더 좋겠냐?’
‘에이, 당연히 아늑하고 포근한 침상 위가 더 좋죠.’
‘그게 장소고. 다음으로 젊고, 예쁘고, 아리따운 여자랑 하는 게 좋으냐? 아님 관까지 이미 다 짜놓은 쭈그렁 늙은 할망구랑 하는 게 좋으냐?’
‘지금 장난치세요? 당연히 젊고 예쁜 처자가 백번 낫지요. 저를 어떻게 보고 늙은 할망구에다 가져다 붙이세요?’
‘그게 인물이야. 다음으로 사내들이 여인들이랑 그 짓을 왜 하지?’
‘당연히 하면 좋으니까 하는 거죠. 그건 그렇고 늙은 할망구 싫다니까요?’
‘그게 동기다. 마지막으로 이제 사랑이나 열정도 다 식어버린 아내 위에 올라타 의무감으로 그 짓을 할 때랑 비싼 돈을 지불하고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기녀 위에 올라타 그 짓을 할 때랑 어떤 게 더 짜릿하고 좋을까?’
‘돈을 지불한 기녀랑 할 때 더 짜릿하고 좋겠지요.’
‘그게 목적의식이라는 거야. 이제 이해가 되냐? 범죄나 음모, 계략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품을 팔아 남의 뒤통수를 치고, 뭔가를 벗겨 먹으려면 그만큼 효과적이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방법들을 찾을 수밖에. 그럼 방금 여인의 교합 시 언급했던 항목들을 이번 사건에 대입시켜 사실과 가정으로 나누어 간추려 보자고.
우선 젊고 이용가치가 높은 너를 향해 달려든 사냥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위기에서 구해줬다는 핑계로 술자리를 마련하여 최음제와 미혼제를 탄 남궁가의 늙다리 놈과 젊은 년, 그리고 너랑 교합한 후 하물을 잘라버리겠다며 손톱의 날을 세우던 독한 년. 이렇게 두 부류지. 그런데 독한 년이 너희 하물을 자르려 했던 것으로 보아 남궁가의 것들하고는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너를 회유하고 끌어들이려 했다면 하물을 자르는 무리수를 둘리 없을 테니까. 그래서 두 부류로 나눈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는 이곳 고풍루이고, 적절한 시점에 늙다리가 회의를 핑계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멀쩡하던 네가 쓰러졌는데 아마도 자리를 벗어난 늙다리가 새로 들어온 술병에다 뭔가 수작을 부려 놓은 게 틀림없다. 그럼 앞뒤 정황이 맞아 떨어지지. 동기는 너를 얻어 뭔가 일을 꾸미고 싶어서 일 테고,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아침에 네 옆에 누워있는 것도 과감히 감수한 젊은 년이다. 그런 다음 질질 짜며 뛰쳐나갔지. 아침까지 남궁가의 젊은 년이 너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은 계획이 성공했다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뻔뻔한 얼굴로 아침에도 너를 궁지로 몰아붙였던 것이지.
그런데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남궁가의 년놈들과 연관이 없는 독한 년이 중간에 등장했냐는 것이지. 당연히 최음제를 먹인 당사자인 남궁가에서 네 욕정을 해소시키기 위해 방비를 해 놓았겠지만 독한 년은 아니었을 것이란 게 내 추측이고 생각이다. 그럼 여기서 또 모순이 발생한단 말이지. 남궁가의 년놈들이 마련한 계획을 중간에 독한 년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단 말인데 어째서 남궁가의 젊은 년이 그리 가증스런 얼굴로 아침에 연극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럼 두 부류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럼 하물을 자르겠다고 한 독한 년의 말을 납득할 수 없고.
결국 드러난 정황만 놓고 보았을 때, 이번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이 모순을 해결해야만 사건의 진실과 진짜 배후의 인물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뛰쳐나가려는 너를 붙잡았던 것이야.’
‘그러니까 형님 말은 어울리지 않는 두 부류가 섞였음에도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모순과 도대체 두 부류가 저에게 무슨 목적으로 접근한 것인지를 알아내야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두 부류의 인물들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으니 열어 두자고. 결국 남궁가의 년놈들은 애초의 목적을 위해 자네에게 또 다시 접근할 것이고, 독한 년 역시 자네 하물 운운하며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네. 결국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기어들어가고, 여인을 안고 싶으면 구멍의 위치를 찾아 정확히 찔러 넣어야지.
자네의 하물이 잘리지 않고 이번 사건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천운일세. 저들은 자네가 깜박 속은 줄로만 알고 있을 테니 속아주는 척 역이용해서 저들의 목적과 정체를 알아내게. 그런 다음 자네를 건드린 대가를 몸소 치르게 해줘야만 두 다리 뻗고 잠이 오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순진무구한 가면을 쓰고 저것들 뒤통수를 날릴 때까지 기다려야 되겠군요. 고맙습니다, 형님. 그럼 소제는 그만 호랑이굴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후후, 담아?’
‘예?’
‘우리 쪽팔리니까 앞으론 제발 최음제 그딴 거에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으드득. 당연하지요.’
‘살살 조져. 너무 흥분해서 남궁가 다 날려버리겠다며 날 뛰면 안 된다. 알았지?’
‘마음 같아선 다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싶지만 우선은 참겠습니다. 그럼.’
의념을 끊은 비담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고, 으스러진 주먹 사이로 살짝 핏물마저 배어나왔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가르며 객잔으로 돌아온 비담은 남궁소미의 방부터 들렀다. 방문 앞에 서서 안의 정황을 살피니 가증스럽게도 남궁소미는 코까지 새근새근 골며 잠이 들어 있었다.
‘이런 우라질. 아침부터 그 난장을 피우고 돌아와 한다는 짓이 잠을 자는 거였나? 숨소리를 들으니 아주 천하태평 늘어져 자는구먼. 오냐. 나를 건드린 대가가 어떤 것인지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개도 안 물어갈 요망한 네년의 위선과 가증의 가면을 발기발기 찢어 저자거리 한복판에 던져주마.’
똑똑똑
“남궁소저, 저 비담입니다. 아침의 무례와 제 만행에 대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으니 문 좀 열어주십시오.”
비담은 남궁소미가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깨웠다. 복도를 울릴 정도로 크고 우렁찬 목소리에 남궁소미는 단잠에서 깨어났고, 고운 아미를 있는 대로 찡그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칫, 자신이 간밤에 저지른 일 때문에 하루는 지나야 정신을 차릴 줄 알았는데 벌써 찾아오다니.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는 작자야. 그래도 할아버지와 굳게 약속했으니 잘 마무리해야겠지.’
“죄송합니다. 공자님. 저는 더 이상 공자님과 대화를 나누기 싫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헤아려 오늘은 그만 물러가 주세요.”
남궁소미는 최대한 비통한 어조로 밖을 향해 축객령을 내렸고, 거기에 억지 연출한 울음소리까지 곁들였다. 비담은 남궁소미가 거절하자 더욱 목소리를 높여 애원하듯 외쳤다.
“제가 아침까지 술이 덜 깨었나 봅니다. 감히 대 남궁가의 소저가 저를 위해 기꺼이 몸을 허락하였건만...”
쾅
몸을 허락했다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문이 과격하게 열리며 당황한 빛이 역력한 남궁소미가 비담을 끌어당기듯 방안으로 잡아 당겼다. 그러더니 놀란 토끼눈으로 비담을 노려보았다.
“간밤의 일이 무에 그리 자랑이라고 이리 큰 소리로 떠드는 것입니까? 이러다 사람들이 듣고 소문이라도 내면 공자님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 없을 텐데요.”
“저는 눈물을 훔치며 뛰쳐나가는 소저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제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응당 사내라면 자신의 한 행동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소저의 마음을 더 아프고 쓰리게 후벼 팠으니 입이 열 개라도 정말 할 말이 없네요. 이런 저를 부디 용서하시고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뼈가 가루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소저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 무림의 동도들에게 어젯밤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알리고 소저와 혼례를 치르겠다는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고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비담은 절박한 어조로 무릎까지 꿇고 용서를 빌었다. 남궁소미는 비담이 제대로 걸렸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애초의 의도했던 계획과 다르게 비담이 진도를 막 나가려고 하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만약 사실과 전혀 무관하더라도 비담의 말대로 이러한 사실이 무림에 퍼져나가면 자신이 감당해야할 짐이 너무 많았고, 더불어 모용천과의 장밋빛 미래 역시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공산이 컸다.
‘이, 이자가 아침부터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리 강하게 나오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정말 나를 책임질 생각이란 말인가. 그저 하룻밤 실수로 치부하고 미안해하면 그걸로 족하련만 저자의 눈빛을 보니 정말 일을 저지를 생각이야. 안 돼. 아무리 할아버지의 계략이 훌륭하다고 해도 나의 소중한 미래를 볼모로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할 수는 없지. 어떻게든 적당히 수위를 조절해야겠어.’
“정말 저를 여러 번 실망시키네요. 공자님께서 우선 저를 찾아와 용서를 빌고 책임을 지겠다고 하시니 얼었던 제 마음이 한결 풀리는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무림의 여인이라도 과년한 처자가 혼례를 올리지도 않은 사내랑 덜컥 동침까지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 제 얼굴은 뭐가 되죠? 제 입장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으신 모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