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다음 날 아침.
비담은 몽롱한 정신을 쫓기라도 하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거지? 남궁소저랑 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당최 기억이 나질 않으니. 그나저나 목이 타는데 마실 게 어디 없나...”
이리저리 물을 찾아 둘러보던 비담은 순간 자지러지듯 놀라며 침상에서 튀어 나갔다. 자신 옆에서 고이 잠들어 있는 남궁소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 어째서? 내, 내가 혹시...아, 아닐 거야. 에이, 아무리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설마하니 남궁소저를 덮쳤겠냐고. 하, 하지만 이 시원함은 대체 무엇으로 설명해야 좋단 말인가.”
침상에서 뛰쳐나온 비담은 자신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자 망연자실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검황에게 자신은 사랑하는 여인이 있노라고 자랑스레 떠벌려놓은 것이 불과 이레 전의 일이고, 남궁소저가 음적에게 당할 뻔 했던 날로부터 사흘 밖에 흐르지 않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오정회로 간 검황 어르신은 무슨 낯으로 볼 것이며, 잠시 후 깨어날 남궁소저에겐 뭐라 설명한단 말인가.”
그렇게 비담이 옷을 걸칠 생각도 까맣게 잊은 채 안절부절 방안을 서성이고 있는 동안 드디어 침상에 누워있던 남궁소미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더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비담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간밤에 편안히 잘 주무셨는지요? 어머!”
인사를 건네던 남궁소미가 알몸인 채로 얼어있는 비담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비담은 그제야 자신의 알몸이 방안으로 스미는 빛에 적나라하게 비춰짐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옷을 찾느라 분주해졌다.
“내 분명 옷을 벗은 기억이 없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괴이한 도깨비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놈의 바지는 어디로 갔기에 안 보인담.”
그래도 다행히 바지까지 찾는데 성공한 비담이 후다닥 옷을 걸친 채 자세를 바로 하였다.
“저, 저기 간밤에 소저와 함께 달을 노래하며 기껍고 흥겨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원하게 술을 마신 부분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혹시 제가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바, 방금 실수라고 하셨나요? 소녀가 마음에 든다며 세가와 저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니 크고 넓은 내 가슴에 마음껏 안기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 모두 빈말 이셨던 것입니까? 그저 단순히 소녀의 몸을 하룻밤 탐하기 위한 입에 발린 사탕발림이었나요?”
“헉! 제, 제가 그런 말을 소저께 했다고요?”
“아닙니다. 공자님의 표정과 반응을 보니 그저 소녀의 몸이 하룻밤 필요하셨던 모양이네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달콤한 약속의 말에 속아 기꺼이 공자님의 품에 안기고 말았으니. 마음도 없으신 공자님을 상대로 이런 말을 이어나가기가 무척 힘이 들고 비참해지네요. 그저 소녀로 인해 욕정을 푸셨다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소녀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흑흑.”
헝클어진 옷을 바로하고 남궁소미가 쏜살같이 방안을 빠져나갔다. 비담은 어안이 벙벙하고 다리가 후들거려 차마 뛰쳐나가는 남궁소미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방안에 홀로 남은 비담은 밀려드는 자책감에 턱하니 침상에 걸터앉고 말았다.
“미쳐버리겠구나. 어쩌자고 만취해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정말 이놈의 색공 때문에 하룻밤 욕정이나 해소하자고 그런 입에 발린 말들을 쏟아냈단 말인가. 아, 앞으로 서희 얼굴은 어떻게 볼 것이며 남궁소저는 또 어찌 대해야 한단 말인가.”
비담은 세상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망연자실 허공만 응시하였다. 그러다 자신의 힘만으론 헝클어진 난국을 해결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길천과 상의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비담의 간절하고 절박한 의념이 상단전의 길천에게 전달되었다.
‘휴우, 일이 더럽게 꼬여버렸구나.’
비담이 강신귀공을 운용하고 의념을 전달하자마자 길천에게서 튀어나온 의념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이었다.
‘그러니까요. 어쩌자고 남궁소저를 덮친 것인지. 정말 제가 생각해도 너무 한심하고, 미안하고, 멍청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네요.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제 자신이 싫고 원망스럽습니다.’
‘그리 자책할 필요 없다. 너는 남궁소미를 덮치지 않았으니까. 내가 일이 더럽게 꼬여버렸다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야.’
‘예? 남궁소저를 덮치지 않았다고요? 그럼 발가벗은 제 모습은 뭐고 아침에 제 옆에 누워 있다가 울며 뛰쳐나간 남궁소저의 말은 또 뭡니까? 그리고 다른 일이라니요? 제발 속 시원하게 말씀 좀 해주십시오. 소제는 지금 무척 급하다고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비담이 다급하게 재촉했다.
‘담이 너도 알다시피 너의 감각기관이 열려있는 동안 네가 느끼고 인지하는 모든 정보들을 나 역시 받아들이고 알 수 있다. 반대로 네가 혼절하거나 잠이 들었을 경우에는 그 어떤 정보도 들어오지 않지. 그래서 어젯밤 네가 쓰러져 기절하였을 때에는 나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중간에 최음제의 효과가 강하게 나타나며 네가 깨어났고, 그사이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얻을 수 있었지. 생판 모르는 독한 년 하나는 건드렸는지 몰라도 너는 절대 남궁소미를 덮치지 않았어.’
‘저, 정말이에요? 정말 남궁소저를 덮치지 않았어요? 그럼 아침에 제 옆에 누워 있다가 저리 울면서 뛰쳐나간 이유가...’
‘간단하게 말해서 또 당한거지. 저번에 목각인형 붙들고 구멍 찾는 거랑 비교하면 오십 보 백 보야. 단지 차이가 있다면 섭혼술과 최음제 정도랄까? 내 그렇게 이르지 않았더냐.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 것이며 강호에는 온갖 지랄 맞은 음모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그럼 제가 최음제에 당한 것입니까?’
‘그래, 최음제에 당해 어젯밤 독한 년과 뒹군 것은 정확한 사실이다. 그때는 네가 깨어있는 상태라 나 역시 지켜보았으니까. 그런데 이유를 모르겠어. 어째서 검황 그 새끼랑 그 손녀 년이 술에다가 최음제를 탔는지 말이야. 분명 너랑 뒹군 독한 년이 그랬거든. 망할 영감탱이가 술에다 최음제를 탔다고. 그런 정황들로 보았을 때 뭔가 꿍꿍이가 있는 술자리였단 말인데. 왜 밝혀지면 세가의 얼굴에 똥칠이나 할 그런 위험천만한 짓거리를 벌인 것일까? 위치로 보았을 때 너 하나 얻자고 벌이기엔 너무 구리고 손해 보는 장사인데 말이지.’
‘꿍꿍이가 있는 술자리요? 그럼 제가 남궁소저를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아마도 고마움이나 표하자고 마련한 술자리는 아닐 거다. 최음제를 술에 탄 것도 그렇고 마치 사전에 합이라도 맞추고 하는 약속대련처럼 네 옆에 누워있다 눈물 질질 짜며 뛰쳐나가는 손녀 년을 봐도 그렇고.’
‘그럼 형님 말씀은 저것들이 저를 이용해 뭔가를 꾸미기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접근했다는 뜻인가요?’
검황 어르신과 남궁소저라는 호칭은 어느 순간 비담의 생각에서 저것들로 변경되었다. 그만큼 비담 내부로부터 억울함과 분함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십 중 십. 정확히 너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그런 것인지 아직 알 순 없지만 치밀하게 계획하고 접근한 것만은 사실이다. 최음제가 동네 의원에서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닐뿐더러 현경의 무위와 흡정색공을 익히고 있는 너를 보내버릴 정도의 약효라면 최상급의 최음제일 텐데 보통의 재료들론 어림없는 일이지. 분명 사전에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검황이라는 명성이나 위치로 보았을 때 평소 지니고 다니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이고, 설마하니 일반인을 상대로 고가의 희귀한 약재들을 혼합하지는 않았을 터. 분명 낙양에 와서 구하거나 아님 직접 조제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최음제의 성분이 중화됨과 동시에 네가 다시 혼절한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성분은 최음제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다량의 미혼제 역시 술에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우라질 영감탱이랑 간사한 년을 봤나. 그리 선한 얼굴을 하고 공명정대, 예의염치를 논해? 확 그냥 그놈의 잘난 아가리를 찢어놓고야 말리라.’
비담은 색성 체면에 그깟 최음제에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함정에 빠져 자신이 그들의 더러운 음모에 이용당할 수도 있었다는 길천의 말에 노발대발 길길이 날뛰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남궁소미를 잘근잘근 씹어 먹기 위해 뛰쳐나갈 기세였다. 그런 선불 맞은 멧돼지를 진정시킨 건 역시나 노련한 길천의 한마디였다.
‘네 녀석의 달랑거리는 하물 온전히 보전하고 싶으면 그만 지랄하고 우선 앉아. 지금 뛰쳐나가봐야 몸통은 구경도 못하고, 기껏 깃털 몇 개 얻는 것이 고작이니까.’
‘예? 깃털이요?’
‘그래 임마. 이만한 일을 겪어놓고 깃털 몇 개 뽑는다고 치미는 울화가 사라지냐? 진득하니 헝클어지고 흐트러진 조각들을 짜 맞추어 몸통을 찾아야지. 그런 다음 가루가 될 때까지 부셔버려야 속이 좀 풀리고 뒷맛이 개운한 거야. 알겠냐?’
차분하게 타이르는 길천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비담이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침상에 걸터앉았다.
비담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길천이 흐뭇한 마음에 칭찬 한마디 던져주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게 많이 진중해지고 마음도 빨리 다스리네. 좋아, 그럼 우선 흩어진 조각들부터 모아보자고. 모름지기 어떤 일이나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는 그 뼈대가 존재하는 법이지. 이것을 유식한 용어로 ‘범행요건’이라고 한다. 이 범행요건은 크게 시간, 장소, 인물, 동기, 목적의식 정도로 나눌 수 있다.’
‘형님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