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남궁소저가 회복된 후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면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그리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네도 오늘 하루 무척 고단하고 피곤했을 터이니 그만 올라가 쉬도록 하게나.”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비담은 자신의 과오를 덮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거듭 고마움까지 표하는 남궁헌수의 마음씀씀이에 깊은 감동을 느끼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로부터 사흘 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남궁소미가 수줍음 가득한 얼굴로 비담에게 술자리를 마련했다며 청했고, 비담 역시 남궁소미의 회복을 축하함과 동시에 흔쾌히 참석하겠다는 약속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약속했던 술시(저녁 7시~9시)에 맞춰 비담은 낙양대로에 자리한 고풍루(高風樓)에 들어섰다. 깔끔한 차림의 총관이 직접 나와 비담을 후원에 마련된 특별연회장으로 안내해 주었다.
총관을 따라 운치 있게 꾸며진 인공정원을 지나자 터질 듯 풍만하게 차오른 달빛을 머금고 맑은 빛을 은은하게 토해내는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그림 같은 정자가 수면의 달을 벗 삼아 함께 두둥실 떠 있었다.
반월형 다리 앞에 멈춰선 총관은 자신의 할 일이 끝난 듯 영업용 인사를 남긴 후 돌아갔고, 비담은 정자의 중앙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검황과 남궁소미에게 다가갔다.
“하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로 찾아왔군. 안 그래도 소미 이 녀석이 자네가 이제 오나 저제 오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더군.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노부의 작은 성의라 생각하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누세.”
“초대해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영광인걸요. 이렇듯 좋은 날에 좋은 분들과 운치 있는 곳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게. 소미 네가 감사의 마음을 듬뿍 담아 비 공자에게 술 한 잔 올리거라.”
남궁헌수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술상의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취기가 살짝 올라올 무렵.
고풍루의 총관이 다가와 급한 전갈이 왔다는 소식을 전했고, 남궁헌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뒤로한 채 총관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일각 후.
다시 돌아온 남궁헌수가 비담에게 양해를 구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너무 미안하구먼. 애써 자리를 마련해 초대해놓고 먼저 일어나게 생겼으니 어쩌면 좋누. 하지만 오정회 장로회의를 긴급 소집한다는 전갈이 와서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으이. 노부는 먼저 빠져줄 터이니 소미와 함께 마저 들고 오시게.”
짧게 설명을 마친 남궁헌수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정자를 벗어났고, 그러다 다리 중간쯤에서 갑자기 생각난 듯 남궁소미를 불렀다.
증조할아버지의 부름에 남궁소미가 급히 일어나 다가갔고, 남궁헌수는 평범한 당부의 말속에 전음을 섞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비 공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내가 가더라도 성심을 다해 대접하고 소홀함이 없도록 하거라.”
‘림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와서 꼭 가봐야 될 것 같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오며가며 닷새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계획은 이제 막바지 단계이니 네가 마무리를 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약은 새로 들어오는 술 주전자의 뚜껑 안에 장착해 두었으니 뚜껑을 살짝 돌리면 알아서 섞일 것이다. 너는 마시지 말고, 저 녀석에게만 한 잔 따라 주거라. 술을 마시자마자 바로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럼 닷새 후에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당부하신대로 성심을 다해 모실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남궁소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전음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였다.
남궁헌수가 다급한 호출에 의해 정자를 떠나고, 정자에 오붓하니 둘만 남게 되자 약간은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비담은 요상해진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무심코 술을 따랐으나 도자기로 예쁘게 빚은 주전자는 이미 비어있었다. 주전자가 비어있음을 확인한 남궁소미가 바로 술을 주문하였고, 이내 술이 찰랑찰랑 가득 찬 새 주전자가 나왔다.
남궁소미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비어있는 비담의 잔을 채움과 동시에 아늑한 밤풍경으로 화제를 돌렸다. 물론 비담의 잔을 채우기 전 주전자의 뚜껑을 교묘히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밝은 달이 비추는 연못 위에서 공자님과 술잔을 기울이니 무척 운치 있고, 아름답네요. 소녀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을 건네는 미녀와 주변의 풍광이 어우러지자 비담은 취기와 더불어 정체모를 몽롱한 기분에 한껏 취하는 것을 느꼈다.
그로인해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 목적으로 늘 암기하듯 외우고 다니는 작업용 어구(語句)들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늘에는 찬연한 빛을 내뿜는 명월(明月)이 자리하고, 연못 위에는 잔잔한 파문에 너울거리며 흔들리는 수월(水月)이 떠있으며, 그대의 마음으로 채운 술 잔 안에는 한껏 흥이 오른 취월(醉月)이 춤을 추고, 외로운 내 마음속 고월(孤月)이 그대의 눈동자에 비친 미월(美月)을 향해 흐르는구려. 이렇듯 달들이 서로 어우러져 춤을 추고 빛을 내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연한 밤입니까.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달빛에 취해 홀렸는지 시를 읊조리듯 흥얼거리던 비담이 고조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위하여’를 외침과 동시에 채워진 술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남궁헌수의 예측대로 술을 넘긴지 반의 반각도 지나지 않았건만 비담은 그대로 인상불성이 되어 정자 안에 쓰러져버렸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비담을 보는 남궁소미의 입매가 활처럼 휘어졌다.
“호호, 역시 할아버지의 조제 솜씨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니까. 그나저나 달 타령 하는 꼬락서니라니. 기름을 바른 듯 입만 번드르르해서 아주 꼴불견인 놈이야. 그럼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 볼까.”
남궁소미는 쓰러진 비담을 한쪽 어깨에 들쳐 메더니 미리 준비된 방에 데려다 눕혔다. 그런 연후 옆방에 대기하고 있는 자신과 비슷한 생김새와 분위기를 지닌 기녀를 찾아가 계약사항에 대해 재차 확인하였다.
“제가 말한 사내가 옆방에 누워있습니다. 저번에 계약을 할 때 말했듯이 가셔서 한껏 달아오른 사내의 욕정만 해소시켜주신 후 바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막대한 값을 치른 만큼 오늘 일은 반드시 머릿속에서 지우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하죠.”
남궁소미와 놀랄 정도로 닮아있는 기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방을 나서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미소까지 지으며 방심하고 있던 남궁소미의 마혈과 수혈을 그대로 눌러버렸다. 허물어지는 남궁소미를 받아든 기녀는 예쁘게 포박까지 하여 침상위로 던져버렸다.
포박당한 채 널브러져 있는 남궁소미를 바라보며 음침하게 웃고 있던 기녀의 모습이 사이한 안개에 휩싸이더니 어느 순간 조금씩 형태를 바꾸었다. 그리고 안개가 걷힘과 동시에 드러난 모습은 놀랍게도 천면요희 매영이었다.
“호호, 나를 대신해 먹잇감을 요리하느라 애썼다. 이거 잘 차려진 밥상을 날름 받아먹자니 조금 미안하기는 해도 모처럼 풍성하게 차려진 성찬이니 사양하지 않고 먹으마. 그럼 좋은 꿈꾸도록.”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매영이 잠이 든 남궁소미를 뒤로 하고 비담이 쓰러져 있는 옆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매영이 옆방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자신을 덮치는 그림자에 순간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누, 누구? 악!”
그림자는 방에 들어선 매영을 다짜고짜 끌어안더니 바로 여기저기 우악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친 호흡을 씩씩거리듯 내뱉으며 매영의 입술이며 귀며 정신없이 핥았다.
매영은 일순 당황하였으나 자신을 험악하게 주무르며 여기저기 핥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가 비담임을 확인한 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지근거리에서 헐떡거리는 비담을 관찰하였다.
그리고는 붉게 충혈 된 눈을 한 채 발광하며 덤비는 비담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빌어먹을 사내새끼들. 도대체 그 망할 영감탱이가 얼마의 최음제를 술에 탔는지 몰라도 아주 발정난 개처럼 지랄을 하는구나. 익히 예상했던 일이나 너무 들이대니 조금은 당황스러운걸. 생긴 것과는 다르게 야수처럼 저돌적인 구석이 있어. 제대로 어우러지려면 조금 피곤하겠는데...아악!”
부우욱
하지만 매영의 조소 섞인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터질 듯 전신을 휘감는 욕정을 주체 못한 비담이 그대로 매영의 옷을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비담의 거친 손길에 의해 상의가 찢겨져 나가며 매영의 우유빛깔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남과 동시에 비담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맛있는 요리를 먹듯 게걸스럽게 핥기 시작했다.
매영의 가늘고 긴 목에서 출발한 비담의 입술과 혀가 그녀의 쇄골을 지나 점점 아래로 내려갔고, 더불어 아슬아슬 매영의 속살들을 가리고 있던 옷 조각들이 허망하게 떨어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