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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78/154)

78화

비담은 이제나저제나 자신의 입만 쳐다보며 기다리는 남궁헌수를 향해 웃으며 승낙의 말을 건네었다.

“알겠습니다. 제 약속은 잠시 미룰 수 있으니 어르신의 부탁대로 제가 남궁소저를 모시고 백마사에 다녀오겠습니다. 저 역시 백마사를 한번 구경하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고맙네. 고마워. 내 오늘 일은 잊지 않고 술상 한번 마련하여 대접하겠네. 그럼 올라가 소미에게 말할 것이니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게.”

비담의 대답을 들은 남궁헌수가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고, 일각 후 표정이 어느 정도 풀린 남궁소미를 데리고 나타났다.

할아버지를 대신해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남궁소미는 비담을 향해 생긋 웃으며 사의를 표했고, 둘은 그렇게 백마사로 향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마차에 오른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마사에 도착하였고, 산책하듯 사원 내를 둘러보았다. 입구에 세워진 백마 상도 구경하고, 크기가 어마어마한 동종(銅鐘)하며 원대(元代)에 조각됐다는 나한상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거듭 탄성을 지르며 둘러보았다.

그렇게 두 시진이 흐르고 객잔 주인이 준비해준 음식까지 맛있게 먹은 둘은 다시 마차에 올라 돌아올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마차에 막 올라선 남궁소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얼굴을 붉히며 무슨 말인가를 하기위해 주저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비담은 계속 주저하는 남궁소미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계속 말을 하시려다 망설이시니 걱정이 되는군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편안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 그게 갑자기 요의(尿意)를 느껴서요. 너무 급한데 둘러봐도 마땅한 장소도 없고, 말씀드리는 것도 부끄러워 차마.”

“하하, 당연한 생리현상인 것을요. 그나저나 정말 둘러봐도 적당한 장소가 눈에 띄지 않는군요. 사원 안의 측간을 가자니 너무 멀고, 이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라 마땅치 않고. 이럴 게 아니라 우선은 마차에 오르시고 조금만 참으십시오. 길가를 가다 적당한 장소가 발견되면 마차를 세우라 하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배를 움켜쥔 남궁소미가 얼굴을 붉힌 채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남궁소미는 다급한 와중에도 마차에 오르며 마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고, 마부 역시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껌뻑 숙이고 바로 말들을 채근하여 속도를 올렸다.

그렇게 쭉 뻗은 관도를 시원하게 달리던 마차는 적당히 수풀이 우거진 야산의 초입에서 멈추었고, 양해를 구한 남궁소미만 내려 후다닥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데 남궁소미가 수풀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뾰족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가로이 볼일을 보러간 그녀를 기다리며 마차에 앉아있던 비담은 화들짝 놀라 마차의 문을 그대로 부셔버린 채 뛰쳐나갔고, 비명이 들려온 장소를 향해 바로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비담은 헝클어진 옷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는 남궁소미의 모습에 침음성을 삼켰고, 이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신의 기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의문의 물체 하나가 그의 기감에 포착되었다. 비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바로 몸을 날리기 위해 용천혈로 엄청난 내공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몸을 날리려는 절묘한 순간 자신의 다리를 잡은 남궁소미로 인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쪼, 쫓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공자님께서 제 비명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와 주셔서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넘겼습니다. 볼일이 급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음적 하나 잡으려 공자님의 공력을 소모하지 마십시오.”

“하, 하지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 음적을 어찌 내버려둡니까? 더군다나 검황 어르신께서 저를 믿고 아가씨와의 동행을 부탁하신 것인데 이런 일이 생긴데 대한 책임을 져야지요.”

“제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책임을 다하신 걸요. 여기서 저 음적을 잡겠다 달려가셨다가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나중에 공자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다행히 옷만 조금 헝클어졌을 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으니 그냥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가씨를 보호해드리지 못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였으니 못내 죄송하고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공자님께 죄스럽고 미안합니다. 제가 혼자서 수풀에 들어가서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의연하게 말하며 옷매무새를 바로 하는 남궁소미를 보며 비담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역시 명문가의 여식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음적에게 겁탈을 당할 뻔 했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다니. 그나저나 남궁소저야 볼일을 보느라 방비가 허술했으니 이해가 되는데 도주하는 속도로 보았을 때 일개 음적의 무공실력이 보통이 아니란 말이지. 잠깐 시간을 지체한 것뿐인데 그새 내 감각 안에서 사라졌다는 게 말이 되나. 하기야 음적질 하기위해 죽어라 경공만 익혔을 수도 있고.’

다시 본래의 신색을 되찾은 남궁소미가 고개를 이리저리 틀며 생각에 빠진 그를 빤히 응시한 채 재촉하였다. 남궁소미의 재촉에 비담도 무심코 이어지던 생각들을 뇌리 구석에 쑤셔 박고 다시 마차에 몸을 실었다.

남궁소미는 마차 안에서 거듭 사의를 표함과 동시에 비담을 한껏 띄워줌으로써 비담의 생각이 원활히 이어지지 않도록 교묘하게 방해를 하였다.

객잔에 돌아온 비담은 많이 놀랐을 남궁소미를 위해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하고, 거기에 당부의 말까지 더했다.

“소저께서 저를 배려해 별일 아니라 말씀해주셨지만 그래도 무사이기 전에 한 여인으로서 오늘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을 당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보살핌으로 큰 일이 생기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지만, 그래도 많이 놀라고 두려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방에 올라가 푹 쉬고, 더불어 심신을 안정시키십시오.”

진심이 가득 담긴 비담의 말에 남궁소미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자신의 고마움을 대신하였다.

비담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휘청하는 남궁소미를 부축하여 방까지 데려다 주었고, 침상에 누워 잠이 든 것까지 확인한 연후에 취선루로 향했다. 비담이 나간 것을 확인한 남궁소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증조할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비담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취선루에서 필요한 일들을 묵묵히 처리한 후 객잔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남궁소미가 걱정이 되어 그녀의 방부터 찾아가 보았는데 그곳에는 남궁헌수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잠든 남궁소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어르신...?”

비담의 부름에 남궁헌수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혹여 잠든 손녀가 깰까 조심히 몸을 일으킨 후 어정쩡하게 서있는 비담을 데리고 객잔의 1층으로 내려왔다.

남궁헌수와 마주앉은 비담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오늘 남궁소미가 겪었을 고초가 못내 미안하고 죄스러워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모기만한 소리로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였다.

“면목 없습니다, 어르신. 저를 믿고 손녀 분을 부탁하셨는데 하마터면 씻지 못할 큰 죄를 저지를 뻔 했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그리 말하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지. 좀 전 잠에서 깬 소미에게 모두 들었네. 그래도 자네가 소미의 비명소리를 듣고 재빨리 와준 덕분에 끔찍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리고 방금 다시 잠이 들었는데 계속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잠꼬대로 하더군. 소미도 자네가 재 때에 달려와 준 것이 무척 고마웠던 모양이야. 그러니 더 이상 마음 쓰지 말게나. 그리고 손녀가 저리 무사한 것은 모두 자네 덕분이니 오히려 고마움을 표할 사람은 우리일세. 진심으로 고맙네.”

무림의 까마득한 후배를 향해 남궁헌수는 최대한 예를 갖추어 포권을 하였다. 안 그래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전전긍긍하던 비담은 남궁헌수의 갑작스런 행동에 더욱 당황하여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어르신. 제가 감당키 어렵습니다.”

“증손녀의 미래에 비하면 무림의 배분 따위가 무에 그리 중요한가. 나는 자네에게 오늘 커다란 은혜를 입었으니 더 한 것도 할 수 있음이야.”

“그만 거두어 주십시오.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한 제가 받기엔 과분합니다.”

“자네도 그만 마음 쓰겠다 약조하면 나 역시 포권을 거두겠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겠습니다.”

“그럼 약조하였으니 노부 앞에서 앞으로 미안해하거나 죄송하다는 그런 표정은 짓지 말게나. 알았지?”

“그리 하지요. 그나저나 남궁소저의 상태는 괜찮습니까?”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마음과 몸 모두 지극히 정상이고 많이 안정을 되찾았다네.”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모두 자네가 신경써주고 보살펴준 덕분이지. 그래서 말인데 소미가 완전히 회복되면 그때 가서 술 한 잔 대접하겠네. 오늘 백마사에 동행해준 일도 있고, 더불어 소미에게 닥칠 뻔 했던 참담한 위기를 미연에 방지해준 고마움도 있으니 거절하지 말고 꼭 참석해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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