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한동안 대화를 나누느라 잠잠했던 방안에 다시 열락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달마저 구름 뒤에 숨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엉켜있는 두 남녀를 말없이 지켜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눈동자의 주인은 바로 남궁소미의 뒤를 따라왔던 객잔의 점소이 아삼이었다. 소리와 기척도 없이 언제 방안으로 스며들었는지 천장의 대들보 위에 몸을 숨긴 채 두 남녀의 뜨거운 정사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피가 끓는구나. 마음 같아선 저 요망한 사내의 하물을 당장 잘라버리고 싶지만 당분간 참는 수밖에. 그리고 사내에게 안겨 숨을 헐떡이는 꼴이라니. 네 년의 처지도 정말 한심스럽구나.
그나저나 요망한 년놈들이 어디서 내 사냥감에 먼저 침을 바르려고. 호호, 내가 계획을 다 들은 이상 호락호락 그 녀석을 넘겨줄 수야 없지.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이번 기회에 몸소 체험하게 해주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한순간 눈을 스산하게 빛낸 아삼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중얼중얼 읊었고,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그림자가 쭉 길어지더니 미끄러지듯 방밖으로 흘러나갔다.
다음 날 아침.
모용천과 밤새 오붓하고 뜨거운 시간을 보낸 남궁소미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객잔에 돌아왔다. 늘 보아왔던 주변의 경치나 사물들이 오늘 따라 유독 아름답게 보이는 남궁소미였기에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객잔주인을 향해 인사까지 건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너무나 아리따운 아가씨가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객잔주인은 아침 내내 아삼을 잡느라 소모되었던 기력이 한방에 채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영문도 모른 채 쥐 잡히듯 잡힌 아삼 역시 옆에서 그 기운을 나눠받으며 언제 혼났냐는 듯 벙글벙글 웃음 지었다.
남궁소미는 아침 댓바람부터 헤벌쭉 입을 벌리며 침을 질질 흘리는 사내들을 뒤로 한 채 발걸음도 가벼이 증조할아버지가 묶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증조할아버지, 저 소미예요. 들어가도 되요?”
“들어오너라. 그나저나 아침부터 뭘 삶아먹으면 너처럼 기운이 넘치는지 무척 궁금하구나.”
“어제 밤부터 삶아 먹었는걸요? 헤헤, 농담이에요. 사실은 늘 마음에 두고 있던 천 오라버니의 마음을 드디어 얻었거든요. 그래서 이리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하고 가볍나 봐요.”
“하하, 할아버지의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이게 다 증조할아버지 덕분이에요. 고맙습니다.”
쪽
남궁소미는 한껏 고무된 기분에 증조할아버지의 볼에 살짝 입맞춤까지 해주었다. 남궁헌수 역시 너무나 기뻐하는 증손녀의 모습을 보며 함께 너털웃음을 터트려 주었다.
“허허허, 천이 덕분에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호사를 누리는구나. 그나저나 말만한 처자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느라 외박까지 하고. 나중에 네 아비를 어찌 보라고 그리 경거망동 하는 게야?”
“치, 그거야 증조할아버지랑 저만 아는 비밀로 하면 되지요. 그리고 이번 일을 꾸미신 것은 증조할아버지시잖아요.”
“하여튼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구나. 그건 그렇고 천이에게 이야기는 하였느냐?”
“네, 오라버니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고 저랑 약조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계획대로 하면 될 것 같아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나. 내심 그녀석이 어찌 나오나 걱정했는데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어.”
“호호, 모두 제 탁월한 미모 덕분이지요.”
“아무튼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으련만. 그만 종알종알 지저귀고 내려가서 아침이나 들자구나. 엉큼하고 고얀 증손녀 기다리다가 할애비 등가죽이 배에 들러붙으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요 녀석아.”
“헤헤, 제가 모실게요. 어서 내려가서 맛있는 아침 드셔야죠.”
“참, 비담 앞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말고 조심 또 조심해야 된다. 명심하거라.”
“알았어요. 제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각별히 주의하고 조심할 테니 그만 걱정하세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을 먹기 위해 다정스럽게 내려가는 두 사람이었다.
남궁헌수와 남궁소미가 1층에 자리한 식당에 도착했을 때 비담은 점소이 아삼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자네도 장가가려면 이 기술을 익히는 것이 좋다니까. 내 특별히 공짜로 가르쳐 준대도 그러네.”
“정말 그런 기술이 존재합니까요?”
“당연하지. 이 기술만 익히면 장안에 내로라하는 미녀들이 죽자고 덤벼든다니까.”
“허허허, 세상에 그런 기술이 존재하는가?”
잔뜩 호기심이 동한 남궁헌수가 중간에 끼어들며 물었다. 눈치 없는 불청객으로 인해 비담은 중간에 말을 멈추었고, 아삼은 천고의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무척 아쉬워하였다.
“하하,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기술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아침부터 아삼이 잔뜩 풀이 죽어 다니기에 그냥 실없는 농담을 던졌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잘 잤네. 아침은 들었는가?”
“방금 먹었습니다. 그나저나 전 어르신께서 손녀분과 이미 드신 줄 알았는데 아직 식사 전인가 보네요?”
“하하, 그렇게 됐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전 선약이 있어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알았네. 자네도 잘 다녀오게.”
살짝 목례를 취한 비담이 객잔 밖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남궁헌수는 걸어 나가는 비담의 등을 눈으로 쫓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하늘이 돕는구나. 안 그래도 녀석을 옭아맬 덫을 준비하자면 사흘이라는 시간이 무척 촉박했는데 저리 아침 댓바람부터 나가주니 고마울 따름이지. 그럼 아침을 먹는 대로 바로 약을 제조할 재료들을 마련하고, 소미와 닮은 기녀를 물색해봐야겠군. 그리고 사전답사를 위해 백마사 근처에도 미리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남궁소미와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남궁헌수는 곧바로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항목들을 점검하며 차근차근 준비에 착수했다. 남궁소미 역시 최대한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며 검황을 도왔다.
그렇게 사흘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두 조손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도 모른 채 비담은 흑막주 이성보와 선화를 대신해 취선루의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을 대신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달리 오늘 아침만은 선약을 핑계로 객잔을 나서려는 비담을 남궁헌수가 불러 세웠다.
“자네 오늘도 선약이 있는가? 혹시 매우 중요하고 급한 약속이 아니라면 오늘 하루만 잠깐 내 부탁 좀 들어주면 안 되겠는가?”
“예? 부탁이요? 뭐 급한 선약은 아니지만...우선 말씀해 보십시오.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만 않는다면 선약을 잠시 미룰 수도 있으니까요.”
“고맙네. 다른 게 아니라 낙양에 도착하면 내가 꼭 백마사(白馬寺)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소미와 단단히 약조를 하였는데 글쎄 급한 일이 생겼지 뭔가. 그래서 급히 다녀왔으면 좋겠는데 나를 대신해 자네가 소미를 데리고 백마사에 다녀오면 안 되겠는가? 다른 날로 미루자 하여도 기대가 컸었는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서 내 마음이 편치 않구먼. 물론 자네의 선약이 중요하고 먼저인 것은 내 알지만 혹시라도 시급을 다투는 약속이 아니라면 잠깐 다녀 와 줄 수 없겠는가?”
“백마사라면 낙양 근교의 유서 깊은 절 아닙니까?”
“맞네. 최초의 불교사원이라 고풍스럽고 멋있다 내가 자랑을 한 것이 그만 화근이 되고 말았지.”
“그러게요. 저 역시 풍문으로 듣고 한번쯤 가보고 싶다 여겼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갈 생각에 들떠 있던 남궁소저의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남궁소저의 실망감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군요.”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자네에게 이리 부탁하는 걸세. 그 녀석이 내색은 안 해도 무척 실망한 눈치야. 한 두시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떻게 안 되겠나?”
애절한 눈빛으로 호소하는 남궁헌수를 대하자 비담은 쉬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물론 조손간에 오붓하게 구경하려던 것이 어긋나버린 현재의 상황에서 자신이 나선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장 남궁헌수가 노심초사 걱정하니 그거라도 해소해주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두시진이라면 크게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아니었기에 백마사에 다녀와 취선루의 일들을 처리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