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남궁소미였다. 그런데 저녁을 먹을 때와는 정반대의 살벌한 표정이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허허,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다 알고 있으니 그만 거두어라. 그리고 누차 이야기하지 않았더냐? 그리 쌍심지를 켜고 얼굴을 찡그리면 주름 생긴다고. 나중에 누굴 원망하려고 그러는지.”
“지금 주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대관절 사전에 아무런 언질도 주시지 않고 갑자기 그러시면 어떡해요? 때마침 증조할아버지께서 전음으로 부탁하셨기에 망정이지 그런 꼴사나운 연극을 하다가 상을 뒤집어엎을 뻔했잖아요.”
“휴우, 저놈의 성질머리하고는. 마침 여자이야기가 나와서 나도 좋은 기회라 여기고 밀어붙인 것이다. 불현 듯 떠오른 생각인데 언제 어떻게 너한테 그걸 설명할 수 있었겠느냐?”
“그래도 그렇지요. 토악질 나오려는 걸 겨우 참느라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제발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런 상황은 사전에 언질 좀 해주세요. 매번 그리 뒤통수치시지 말고. 그리고 저를 왜 그런 출신도 불분명하고 멍청한 작자에게 가져다 붙이세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무조건 시봉세의 대장인 청운비룡(靑雲飛龍) 모용천 오라버니와 혼례를 올릴 거라고요. 한쪽 귀로 들으시고 한쪽 귀로 흘리신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 오라버니 얼굴을 못 봐서 미칠 지경인데 증조할아버지까지 제 속을 뒤집어 놓으셨으니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물불 안 가리고 바락바락 대드는 증손녀를 보며 남궁헌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세가 내의 식솔들이나 강호의 풍문을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검황과 증손녀가 함께 다니는 것을 두고 남궁소미가 천고에 다시없을 효손(孝孫)이라 구구절절 떠들었다.
하지만 실상은 버르장머리 없는 증손녀 비위를 맞추느라 증조할아버지인 자신이 애를 먹고 있었다.
“알았으니 그만 하자. 그리고 설마하니 이 할아버지가 너를 오며가며 만난 저런 놈에게 시집을 보내겠느냐? 그냥 잠깐 이용하고 버릴 소모품이지만 그래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미인계를 쓰는 것이 시간도 절약하고, 의심도 덜 받으니까 그리 한 것이지. 할아버지의 깊은 뜻도 모르고. 에잉, 쯧쯧쯧.”
“정말이세요? 그냥 미인계를 써서 단순히 마음만 붙잡아놓고 이용만 하실 거예요? 진짜 저런 놈에게 저를 시집보내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당연하지. 내가 머리에 칼을 맞은 것도 아니고, 겉은 이래 보여도 아직 노망나기엔 너무 총기가 넘쳐 탈이지.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증조할아버지의 계획을 들어보겠느냐?”
“뭔데요? 벌써 계획까지 짜 놓으신 거예요?”
“흐흐, 10년 넘게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다녔으면서 아직도 나를 모르다니. 이리 가까이 오너라.”
호기심과 기대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다가온 남궁소미를 향해 빛의 속도로 전음을 날리는 남궁헌수였다.
‘이차 저차 하여 이러쿵저러쿵, 요리조리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단다.’
속사포처럼 이어진 남궁헌수의 세부계획을 모두 듣고 난 남궁소미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지며 말을 더듬는 것으로 자신의 놀람을 대신하였다.
“어, 언제 그런 계획을 짜셨어요? 그리고 정말 모용오라버니께서 낙양에 와 계신 거예요?”
“너를 위해 증조할아버지가 준비한 선물이니 가서 마음껏 회포를 풀고 오너라. 그리고 세가를 떠나며 전서구를 날린 터라 아직 그 녀석은 세부계획에 대해 모를 것이니 만나는 대로 방금 들은 계획을 전해주고, 차근차근 비담 그 녀석을 옭아맬 덫을 준비하거라. 알았으면 그만 얼어있고 어서 출발해. 괜히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그 녀석의 애간장 그만 녹이고.”
“꺄악! 역시 증조할아버지가 최고예요. 제 말을 그냥 흘려들으신 게 아니었네요?”
“켁켁. 인석아. 그러다 할아버지 목이 먼저 빠지겠구나. 그리고 당연히 너희 둘 사이는 진즉에 알고 있었지. 앞으로 오정회를 이끌어 무림을 휘어잡을 그 정도 녀석이나 되어야 너를 믿고 맡길 수 있지.”
“고마워요,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럼 얼른 다녀올게요.”
팔을 풀고 싱글벙글 웃으며 뛰어나가는 증손녀의 모습을 보며 절로 흐뭇해지는 남궁헌수였다.
“허허, 저리도 좋을까. 방금 전까지 악다구니를 쓰던 악녀는 어디가고, 생기발랄한 선녀가 나타났구나. 뭐 현탁이 그 녀석이 나중에 노발대발 하겠지만 이미 가문 간에 밀약이 된 상태이니 상관없겠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휑하니 비어있는 방안을 둘러보던 남궁헌수가 침상위에 쓸쓸히 놓여있던 자신의 애검을 집어 정성껏 닦기 시작했다. 서늘하게 빛나는 검 끝을 누군가에게 겨눈 채 말이다.
남궁소미는 저번에 모용천을 만났을 때 끝내지 못했던 아쉬움을 상기하며 기이한 열기와 기대로 몸이 붕 뜬 채 치장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목욕을 하고 가장 아끼는 옷을 꺼내 입느라 분주했고,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오라버니를 떠올리며 호흡을 가다듬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저번엔 가가의 손이 내 가슴에만 머물다 떠나셨지. 그놈의 불청객만 아니었어도 가가의 품에 안겨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었는데. 하지만 오늘은 방해꾼도 없고, 증조할아버지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내 전부를 드릴 수 있을 거야. 기다리세요, 모용가가.’
남궁소미의 마음은 벌써 모용천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가빠진 호흡을 뱉는 입술 역시 뜨거울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