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렇게 일식경 정도 불상들을 구경하였을까.
자연스럽게 접근한 중년의 남성이 불상의 내력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고, 남궁헌수와 남궁소미 역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남성의 설명을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이동하였다.
처음부터 같은 일행이라 오해할 정도로 중간에 녹아든 중년 남성의 행동은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이곳은 병에 대한 한방약처방이 적혀 있어 약방동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만들어진 계기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말을 하는 도중 중년의 사내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수법을 사용하여 남궁헌수에게 전음을 날렸다.
“아! 그런 이유로 이곳이 만들어졌는지는 처음 알았소이다. 이거 들을수록 신기하군요.”
‘나야 집안단속 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지. 림주(林主)께서는 무탈하신가?’
남궁헌수 역시 전음을 이용해 화답하였는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매우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임을 느낄 수 있었다.
“참! 제가 이 약불동에 전해져 오는 전설 한 자락 들려드릴까요?”
‘림주님께서는 무탈하게 잘 지내십니다. 그나저나 급히 저를 보자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약불동에 내려져 오는 전설이라. 벌써부터 구미가 당기는군요. 어서 들려주시지요.”
‘잘 지내신다니 다행이구먼. 다름이 아니라 자네를 급히 보자 한 이유는 사도련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일세. 그리고 그 와중에 내가 재미난 녀석을 하나 만났거든. 비담이라는 녀석인데 내력은 아직 불분명하나 가진 바 무공이 나에 필적하거나 아니면 이미 나를 능가했을 지도 모르는 유별나고 위험한 녀석일세. 내가 옆에서 쭉 지켜보며 감시하고 회유하겠으나 자네도 가서 림주께 이와 같은 정황을 알리고 림(林)의 정보력을 이용해 그 녀석의 내력에 대해 소상히 조사해주게. 그 어떤 것이라도 놓쳐서는 안 되네. 알겠는가?’
“하하, 너무 보채시니 당장 말씀을 드려야 되겠군요.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알겠습니다. 림주님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헌데 그자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군요. 어르신도 알다시피 림의 정보력을 움직이는 것은 많은 위험부담이 따르는데 말입니다.’
“으음, 정말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그런 전설이 담겨 있으니 이곳이 그토록 유명할 수밖에요.”
‘림의 밝은 앞날을 위해 우리 대신 선봉에 나서서 설쳐줄 허수아비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 그만한 적임자를 찾기도 쉽지 않은 일. 그 녀석이 전면에 나서서 사도련의 일을 방해하고 시선을 끌어준다면 그동안 우리는 음지에 숨어 사도련의 뒤통수를 칠 절호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걸세. 대어를 낚기 위해선 그만큼 먹음직스럽고 토실토실한 미끼가 필요한 법. 그만한 희생이나 위험부담은 당연히 감수해야만 하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그럼 다른 동굴도 마저 둘러보십시오. 아쉽지만 저는 볼일이 있어 이곳에서 그만 작별을 고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르신의 뜻 림주님께 그대로 전하고 내락을 받겠습니다. 그럼.’
“고맙습니다.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덕분에 오늘 제 귀가 좋은 이야기를 마음껏 듣는 호사를 누렸군요. 나중에 또 인연이 닿으면 제가 술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고맙네. 그럼 살펴가시게.’
약방동에서의 구경이 끝났는지 남궁헌수와 남궁소미 역시 객잔을 향해 서둘러 돌아갔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가 비담에게 괜한 오해를 사기 싫었고, 더불어 사도련의 간자들 역시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남궁헌수가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비담은 아직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고, 목욕을 한 후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자 때마침 비담이 객잔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나갈 때와 달리 혼자의 몸이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남궁소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궁헌수가 혼자 들어오는 비담을 향해 의문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어째서 혼자 돌아오는가? 내가 치료해준 그 환자야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데려다준다 하였으니 그리 알고 있네만 함께 간 자네의 형님은?”
“하하, 형님도 잠깐 집에 다녀온다며 가셨습니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는데 그 아가씨께 청혼을 하려면 준비할 것도 많고, 아버님께 허락도 받아야 한다며 부랴부랴 가버렸습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면서 금방 다녀온다는 말만 남기고 훌쩍 가버려 저 역시 물어보거나 말릴 틈이 없었지요.”
“정말인가? 낙양에 오는 내내 그런 내색이 전혀 없더니 무척 의외로구먼. 그나저나 그 마음에 두고 있다는 처자가 혹시 우리 소미는 아니겠지? 말이 나와서 말이네만 우리 소미만한 처자도 드물지. 저만한 미모에 단아한 품성하며 거기에 가문의 후광도 든든하겠다, 더불어 무공까지 받쳐주고 있으니 금상첨화 아닌가.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하여 시봉세에 이름을 못 올려서 그렇지 만약 세가에서 착실하게 지냈다면 당당히 들어가고도 남았을 걸세.”
“하하, 제가 보기에도 어르신의 증손녀 정도면 차고도 넘치는 신붓감이지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기로 형님께서 마음에 두고 있는 아가씨는 무림의 여식이 아니라 평범한 아가씨인걸요. 낙양에 오는 동안 어르신과 남궁소저가 곁에 있어서 내색을 못했을 뿐이지 부뚜막에 올라간 고양이처럼 전전긍긍 하였답니다.”
“그럼 자네의 짝으로 우리 소미는 어떤가?”
“저요?”
뜬금없이 집요한 눈으로 캐묻는 남궁헌수 때문에 비담은 일순 당황하였다. 적당히 구인철의 행적을 둘러대려 꾸며낸 말에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이 걸려든 꼴이었다.
“그래, 자네 짝으로 어떠냐 이 말일세.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처자가 따로 있는가?”
“남궁소저 정도면 저에게도 과분하지요. 아직 더 겪어봐야 알겠지만 낙양에 오는 동안의 모습만 놓고 보아도 저처럼 현숙하고 마음씀씀이가 넓은 아가씨는 요즘 드문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아가씨가 있습니다. 저를 좋게 봐주신 어르신의 관심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런가? 이미 마음에 둔 아가씨가 있어? 이거 애석하구먼. 자네가 우리 소미를 괜찮게 생각하고 마음에 두었다면 내 나서서 중간에 다리를 놓아볼 생각이었는데 이미 마음에 둔 처자가 있다니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 처자와는 혼례를 올리기로 약조를 하였는가?”
비담은 평소의 남궁헌수답지 않게 오늘따라 집요하다 여겼지만 그래도 무림의 대선배인지라 전혀 내색하지 않고 꼬박꼬박 묻는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냥 단순히 한번 보았을 뿐인데 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그 소저에게 빠져버린 것이지요. 제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상황이라 어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나중에 마음을 전했을 때 그 소저가 마음을 받아주고 허락해주면 좋겠다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지요.”
“어떤 아가씨인지 몰라도 자네 마음을 이리도 흔들다니 정말 대단하구먼. 그나저나 자네 말대로라면 나중일은 어찌 될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야 그렇죠. 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으니 장담할 수는 없지요.”
“그렇단 말이지. 그럼 자네에겐 속상하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 소미가 자네 옆에 다가가려면 그 처자와 잘 안되길 바라야 되겠구먼. 허허허.”
“아이 참, 증조할아버지도. 약주도 안 하셨는데 오늘따라 왜 그러세요?”
남궁헌수는 의뭉스럽게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새침하게 말하던 남궁소미가 당황한 비담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하얀 목덜미와 귓불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발그레 물들었고, 두 뺨 역시 저녁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비담이 장구치고 북치는 두 조손간을 멍하니 쳐다보며 어찌 대처해야 할는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오며 비담에게 닥친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하루 종일 움직이느라 허기졌던 비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온 음식들을 맛나게 먹었고, 장난스럽게 웃는 남궁헌수와 부끄러움에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남궁소미 역시 피식피식 웃으며 나온 음식들을 먹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저녁을 해결한 셋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다.
방으로 돌아온 남궁헌수는 자신의 애검인 무애검(無涯劍)을 꺼내 정성스레 닦고 있다가 문밖을 서성이는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망설이지 말고 어서 들어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