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더불어 전리품처럼 항상 잊지 않고 챙기는 사내들의 하물. 같은 여자인 문설란에게도 그것은 구토를 유발할 정도로 악취미이자 납득할 수 없는 매영의 일그러진 성격의 한 단면이었고, 불특정 사내들을 향한 집요하면서도 잔인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낙양에 도착한 비담은 흑막의 안가가 아닌 적당한 객잔을 잡아 일행들과 함께 묶었다. 흑막주 이성보의 신분이 들통 날 것을 염려한 이유도 있었고, 더불어 구인철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지금의 구인철은 정사대전이 사도련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는 내막을 알고 있기에 남궁헌수를 싫어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아직까지 5년 전 흑천맹을 급습했던 정도맹과 오정회의 만행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던 터라 함께 움직이는 것에 대해 조금은 꺼려하는 눈치였기 때문에 돈을 아끼지 않고 방을 여러 개 잡은 것이다.
그런 다음 남궁헌수에겐 적당히 핑계를 대고, 거동이 불편한 이성보를 데리고 흑막의 안가로 향했다. 비담이 안가에 도착하자 퀭한 모습의 선화가 한달음에 달려 나왔고, 만신창이가 된 이성보를 부여잡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이성보는 아픈 와중에도 딸을 보듬어 안으며 진정시켰고, 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깜짝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선화가 단순히 흑막의 고위층이라 짐작만 했을 뿐, 설마 막주의 딸일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의 상봉이 더더욱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선화가 눈물을 닦으며 비담과 구인철에게 성심을 다해 절을 올렸다.
“고맙습니다. 아버님께서 이리 살아 돌아오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자님들 덕분입니다. 앞으로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는지.”
“아니오. 막주님께서 저희들께 베풀어준 호의에 비하면 작은 보답에 불과하니 그만 일어나시오.”
정신을 차린 비담이 한사코 무릎을 꿇고 있는 선화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다독였고, 이들의 훈훈한 모습을 지켜보던 이성보는 아픈 와중에도 미소를 지었다.
“하하, 막주님께서는 안정을 취해야 빨리 나으실 테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네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수줍게 웃음 짓던 선화가 일행을 안가로 안내하였고, 그렇게 한바탕 기쁨의 상봉은 막을 내렸다.
선화는 정성을 다해 막주 이성보의 병간호에 매달렸고, 한숨 돌린 비담과 일행들이 마주 앉아 차후의 일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럼 형님께서는 지금 바로 흑천맹으로 떠나시지요.”
“나도 그게 좋겠다 생각하였네. 검황을 못 믿는 것은 아니네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안가에 있는 지금 몸을 빼는 것이 안전하고 비밀이 덜 새어나가겠지.”
“맞습니다. 검황 어르신께는 제가 적당히 둘러대겠습니다. 참, 그리고 빙소저와 까망이들은 계속 안가에 머물게 하고, 형님 혼자 다녀오십시오. 그게 저들의 이목에도 걸리지 않고,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알았네.”
간결한 대답과 함께 구인철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더니 부동자세로 서있는 흑천대의 부대주를 향해 짧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너도 알다시피 이곳은 흑막의 안가다. 당분간 저들의 이목을 속이고 은신해 있기에는 좋은 장소이나 무공을 전혀 모르는 빙소저나 지금 위중한 상태인 흑막주의 신변이 노출되었을 때는 이곳만큼 위험한 곳도 없다. 여러 가지 변수나 차후의 일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고 방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쓰고 주의하거라. 그리고 비담 동생 역시 이곳의 안전을 위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출입을 삼갈 것이다. 그러니 그 점 유념하고 네가 이곳을 책임져야 한다. 그럼 믿고 다녀오마.”
“복명.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대주.”
신뢰 가득한 눈으로 인사를 대신한 구인철이 안가를 막 떠나려 몸을 일으킨 순간, 망설이던 비담이 다급히 구인철을 불러 세웠다.
“저, 저기 형님?”
“응? 무슨 일인가?”
“휴우, 너무 미안해서 많이 망설였는데 그래도 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거 받으세요.”
홀딱 벗은 미녀를 앞에 두고 물건이 서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는 사내처럼 우왕좌왕하던 비담이 결심을 굳혔는지 결국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인철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 편지 같은데...”
“서희에게 전해주십시오. 부족한 필력이지만 서희를 생각하는 진심과 사랑을 가득 담아 한 줄 한 줄 써내려간 제 마음입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적은 것이라 엉망이겠지만 그래도 꼭 형님께서 전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그시 비담의 진심어린 눈을 바라보던 인철이 밝게 웃으며 편지를 갈무리했다.
“후후, 알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서희의 두 손에 자네의 마음을 전하겠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몸조심하고. 그럼.”
“형님도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구인철이 안가주위를 면밀히 살핀 후 한 점 바람이 되어 사라졌고, 비담 역시 침상에 누워 요양 중인 이성보와 선화, 그리고 빙루에게 인사를 건넨 다음 까망이들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준 연후 다시 객잔으로 돌아갔다.
비담은 앞으로 인철이 무사히 돌아오고 흑막주 이성보가 완쾌될 때까지 안가엔 얼씬거리지 않은 채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지낼 생각이었다.
비담이 적당히 둘러댄 후 눈물겨운 부녀상봉을 주선하던 그 시각.
객잔에 남아있던 남궁헌수와 남궁소미 역시 비담이 나간 것을 확인한 후 바로 외출에 나섰다. 장소는 낙양의 명소 중 하나인 ‘용문석굴(龍門石窟)’이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당나라 때 완성된 석굴로 약 10만 여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낙양의 대표적 명소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도 그 명성을 입증하듯 수많은 불자(佛者)들과 관광객들이 방문하여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난리가 아니었다.
남궁헌수는 처음 와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사람들 사이를 유연하게 피하며 남궁소미를 데리고 만 오천여개의 소불상(小佛像)들이 조각된 약방동으로 향했다. 그리더니 관광객처럼 태연한 신색을 지으며 연신 감탄성을 내뱉으며 구경하였고, 남궁소미 역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적극적으로 호응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