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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71/154)
  • 71화

    비담 일행이 남궁세가를 떠나 낙양으로 출발한지 사흘 후.

    거만한 자세로 태사의에 앉아 보고를 받던 구지신마 극현도의 얼굴근육이 미세하게 꿈틀 움직였다. 보고를 하던 은영각주 문설란은 련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자 침을 꼴깍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등을 타고 식은땀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미세한 경련을 시작으로 련주의 심기를 더 거슬렀다 죽어나간 목숨이 한둘이 아님을 알기에 초조하고 두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중간에 보고를 멈출 수도 없었다. 그것은 곧바로 죽음과 직결되기에. 그렇게 정신없이 이어나가던 보고가 끝이 나고, 다행히 아직 자신의 목이 온전히 붙어있음을 확인한 문설란이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극현도의 명을 기다렸다.

    “같은 놈이다?”

    “그렇습니다. 지난 번 보고 드렸던 빙궁의 일에 개입했던 비담이란 자가 이번 남궁세가의 일에도 관여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또 다른 조력자는 흑천맹의 구인철이고?”

    “그렇습니다.”

    “흑천맹이 조직적으로 이번 일에 관여했다?”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흑천맹에 심어놓은 간자에게 그와 같은 정황은 없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폐관에서 나온 구인철이 강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여행을 하는 도중 비담이란 자와 엮인 것 같습니다.”

    “둘의 관계는?”

    “거기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허나 보통사이는 아닌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근거는?”

    “낙양 취선루에서 함께 머무는 동안 잦은 술자리를 가졌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끊지 말고 계속하라.”

    “그것이 여인 둘과 한방에 머물며 밤새 그 짓을 했다는 첩보도 있었사옵니다.”

    “남녀 넷이서 한방에 머물며 교합을 하였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난잡하군. 둘의 무공수위는?”

    “천마의 진전을 이은 구인철의 무공수위는 최소 화경 급에 준한 것으로 판단되옵고, 비담이란 자 역시 그에 준하거나 조금 높은 것으로 예측하고 있사옵니다.”

    “젊은 나이임에도 화경의 벽을 넘었단 말이지. 그 정도의 무공수위라면 귀풍대 전원이 참패를 당한 것도 이해가 되는구나. 검황의 움직임은?”

    “비담이란 자와 합류하여 현재 낙양을 향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후후, 늙었으면 곱게 뒷방이나 지킬 일이지 괜히 나서서 명을 재촉하는구나. 아마도 남궁가의 판을 흩트려 놓은 자는 그 노인네가 틀림없을 것이다. 이거 보답으로 어떤 선물을 보내야 그것들이 만족을 하려나...”

    태사의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고민을 하던 극현도가 마침 좋은 생각이 났는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천면요희(千面妖姬) 매영(魅零)은 어찌 지내고 있느냐?”

    “특별한 일 없이 처소에서 쉬고 있습니다.”

    “좋다. 저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넸으니 마땅히 화답을 해주는 것이 도리에 맞겠지. 비담이란 자에게 그녀를 보낸다. 목만 아니면 어디든 하나쯤 잘라도 상관없다 전하여라.”

    “하오면 그 자를 살려두시겠다는 말씀이신지...”

    “후후, 그만한 실력을 지닌 장난감을 함부로 부술 수야 없지. 충분히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났을 때 버릴 것이다. 그리고 매영이라면 분명 그것을 선택해 잘라올 것이다.”

    “복명!” 

    짧게 대답하고 나가는 문설란을 바라보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실실 웃는 극현도였다.

    ‘흐흐흐, 병적으로 사내의 양물에 집착하는 그녀라면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비담이라 했던가? 앞으로 사내구실 못하게 될 네 녀석의 팔자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해주어야 되겠구나.’

    “하하하!!”

    속으로 조용히 삼키던 극현도의 웃음이 급기야 앙천대소가 되어 터져 나왔고, 곧 조용한 대전 안을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나갔다.

    극현도가 발작을 일으키며 대전이 떠나가라 웃던 그 시각.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다듬고 있던 20대 후반의 미녀가 살짝 아미(蛾眉)를 찡그렸다. 비단결처럼 부드럽던 머릿결에 미세한 상처가 생겨 머리끝이 흐트러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미녀는 일절 망설임 없이 손톱에 내공을 주입하여 흐트러진 머릿결을 잘라내었다.

    서걱

    마치 잘 벼려진 칼로 그은 듯 깔끔한 솜씨였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머리와 얼굴을 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미녀의 모습은 요사스러움 그 자체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치명적 유혹과 끈적끈적함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천면요희(千面妖姬) 매영(魅零)

    ‘천의 얼굴을 지닌 요사스런 계집’이란 별호가 말해주듯 사내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인 여인이었다. 특이하게도 매영은 사도련에 속해있지도, 그렇다고 전혀 별개의 인물도 아니었다.

    련주인 극현도에게 충성서약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재미를 위해 사도련에 몸을 의탁한 이상한 여인이었다. 사도련의 그 어떤 인물도, 심지어 련주인 극현도 역시 그녀의 사문이 어디인지 과거가 어떤지 그녀의 내력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도련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빈객(賓客) 신분이라 할 수 있었다.

    치장을 하기에 여념이 없던 매영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옥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 계시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들어오십시오.”

    “죄송하네요. 방해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아닙니다. 마침 끝내려던 참이었습니다.”

    매영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문 앞을 서성이던 의문의 방문객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은영각주(隱影閣主) 문설란이었다.

    거울을 통해 방문객을 확인한 매영이 문설란을 빤히 쳐다보며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련주님께서 특별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전하기 위해 이리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알겠습니다. 련주님은 늘 저에게 흡족한 사냥감을 던져주셨죠. 이번에도 믿고 가보겠습니다. 이름과 별호가 어찌 되나요?”

    “그자의 별호는 없습니다. 이름은 비담이라 하구요.”

    “별호도 없는 애송이라...뭐 만나보면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니 그건 그냥 넘어가죠. 장소는요?”

    “낙양입니다.”

    “기한은 언제까지 입니까?”

    “기한에 대한 언급은 없으셨습니다. 다만 목만 아니면 상관없으니 어디든 잘라도 무방하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마의 진전을 이은 흑천대주 구인철과 검황 남궁헌수, 더불어 현 남궁세가주의 여식인 소운검 남궁소미가 그자와 동행하고 있습니다.”

    “오호? 별호도 없는 애송이의 동료치고는 꽤나 화려한 조합이군요. 모두 건드리기엔 역부족일 것 같은데...”

    “련주님께선 간단히 인사정도만 나누길 원하십니다. 기회를 틈타 비담이란 자만 손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뭐 그거야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군요. 알겠습니다. 곧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뵙지요. 그 녀석의 하물과 함께 말입니다. 호호호.”

    짜랑짜랑한 교소와 함께 유쾌하게 웃어 재끼는 매영이었다. 무료했던 일상에 드디어 먹잇감이 던져졌고, 이제 차분하게 옭아맬 그물을 준비하여 사냥을 즐기기만 하면 끝이었다.

    문설란은 거울에 이리저리 몸을 비추며 즐거워하는 매영을 보다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사도련이 창설된 이후 가장 특이한 빈객이 매영이었고, 예측불허인 이 손님이 이제껏 사냥감을 놓치고 돌아온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상기하였다.

    ‘호호, 무슨 연유로 우리의 일에 끼어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네놈의 운명도 정말 기구하구나. 평생 남자구실 못하고 빌빌거리며 살아야겠지만 그래도 저토록 아리따운 여인을 한 번 품을 수 있다면 크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련주님의 마음이 언제 바뀌실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는 마음껏 비참함을 즐기거라.’

    천의 얼굴을 지닌 매영의 가장 큰 무기는 역체변용술과 손톱을 이용한 강기공. 화려한 꽃에 취해 앉은 벌과 나비들은 어느 순간 파고드는 가시에 온몸이 관통되어 절명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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