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54)
  • 69화

    존경의 염을 가득 담은 얼굴로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남궁현탁이었다. 나머지 남궁가의 식솔들 역시 가주의 행동에 맞추어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허리를 굽혔다.

    “57대 가주 남궁현탁이 삼가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시끄럽다. 가문을 이 꼬락서니로 만들어 놓고도 인사할 정신이 있는가?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비담을 바라볼 때는 한없이 자애로운 눈빛이었는데 어느 순간 돌변하여 가주를 향해서는 냉엄하게 질책하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준엄한 꾸짖음에 남궁현탁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데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남궁현호가 그만 발끈하여 나섰고, 화들짝 놀란 가주가 막아보려 애썼으나 이미 엎어지고 깨어진 사발이었다.

    “할아버님께서 10년 만에 다시 세가에 나타나신 까닭을 아둔한 손자로서는 짐작할 수 없으나, 그래도 형님이 세가를 책임지는 가주의 신분임을 감안해 주십시오. 옛날의 손자 대하듯 대하지 마시고 예의를 지켜 주십사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지랄하네. 내가 누구 때문에 우화등선을 포기하고 이 개고생인데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여기 소협과 대화를 나눈 후 너에 대한 처분을 결정할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주 확 그냥 엎어버릴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하거라. 망할 놈의 새끼들아.” 

    화려한 그릇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 안에선 민망할 정도의 똥물이 넘실거렸다. 역시 사람이나 사물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노인을 향해 비담이 짧은 감상평을 내놓았다.

    “밖에서 볼 때랑 다르게 집안이 엉망이네요.”

    “나도 알고 있으니 그리 친절하게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되네. 그럼 우선 통성명부터 하고 협상을 시작해볼까?”

    “무림말학 비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협상을 말씀하시는지...?”

    공손히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인 비담이 의문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후후, 모르는 척 의뭉을 떠는 것이 일품이로군. 협상에 대해선 차차 알게 될 것이니 서두르지 말게. 그 전에 내 소개부터 해야겠군. 난 저기 서 있는 못난 녀석들의 할아버지 되는 남궁헌수라는 사람일세. 무림의 동도들이 과분하게도 ‘검황’이란 별호를 붙여주었지.”

    “검황 남궁헌수 어르신이요?”

    “들어본 모양이군.”

    “아니오. 너무 거창한 별호라 조금 놀라서 되뇌었던 것입니다.”

    “으음. 왜 손자 녀석들이 자네의 입담에 휘둘렸는지 알만하군. 실없는 장난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저기 나무 아래에 도둑고양이마냥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숨어있는 녀석이 자네 일행인가?”

    “어찌 아셨습니까? 제 일행이 맞습니다.”

    “어쩐지 풍기는 기도가 몹쓸 것들이랑 일견 비슷해 보이면서도 조금 다르더군. 그리고 혼자 떨어져 있는 것도 미심쩍었고. 아무튼 자네 일행이라니 더욱 잘 되었군. 그래도 실력이 나름 쓸 만하니 둘이 알아서 잘 해결할 수 있겠어.”

    “지붕위의 것들 말하십니까? 어째서 저희들이 그놈들을 해결해야 되죠?”

    “아니 멀쩡한 집을 들쑤셔놓고 부셔놓았으면 응당 그 정도 책임은 져야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숨어있는 녀석이야 조심조심 다녔다고는 하나 무단으로 침입한 사실엔 변함이 없어.”

    “으음, 이거 생각보다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생겼네요. 그냥 양쪽 박 터지게 싸움 붙여놓고 조용히 내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죠. 지은 죄가 있으니 어르신 말씀대로 지붕 위에 있는 잡놈들은 저희 둘이 처리하겠습니다.”

    “어디에 몇 놈이 숨어 있는지는 알고 있겠지?”

    “하하, 제가 저것들 신나게 구경하라고 발에 땀나도록 세가 내를 뛰어다닌 줄 아십니까? 어디에 몇 놈이 숨어있는지는 파악되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정확히 몇 놈인가?”

    “스물다섯입니다.”

    “정확하군. 그럼 알아서 잘 처리해 주게.”

    “알아서 잘 처리해 드릴 테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어르신의 집안이나 잘 단속해주십시오.”

    “당연히 그럴 참이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네.”

    “말씀하십시오.”

    “내 식솔들의 어리석음을 바로잡은 연후에 자네와 동행할 것이니 그리 알게. 물론 저쪽에 서있는 내 증손녀와 함께 말일세. 어떤가?”

    “예? 제가 왜 그래야 되죠? 지붕위에 있는 놈들만 처리하면 전 아쉬울 게 없는데요.”

    “허허허, 과연 그럴까? 애초에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망각한 것은 아니겠지?”

    “이, 이런. 그럼 어르신께서...”

    “당연히 내가 보호하고 있지. 위중한 상처를 입었으나 거의 입신지경에 달한 내 의술로 말끔히 치료했다네. 한 두어 달 요양하면 거뜬히 일어설 것이네. 그래도 싫은가?”

    “휴우, 할 수 없죠. 그런데 무슨 연유로 저와 동행하시겠다는 것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네? 단순히 그 이유 만으로요?”

    “자네도 이 나이 먹어보게. 하루하루가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한지 모른다네. 내 망할 자손들 교육을 잘못시켜 우화등선도 포기한 마당에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그런데 마침 자네가 운명처럼 내 앞에 딱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를 놓칠 정도로 멍청한 노부가 아닐세. 그러니 앞으로 재미있게 지내보자고.”

    “그럼 어르신 혼자 따라오시면 되지 어째서 증손녀까지 동참시키는 것입니까?”

    “10년 동안 내 수발들며 따라다닌 아이니까 마땅히 함께 가야지.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이 따라나서더니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 모두 들어서 증 조손간의 정이 지극하거든. 그러니 자네가 이해하게. 내가 사경을 헤매는 녀석 치료까지 해주었으니 그 정도 셈은 이미 치른 것 아닌가?” 

    “왜 검을 들으셨는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네요. 장사를 하셨으면 진작 천하제일갑부가 되셨을 텐데요.”

    “후후, 나도 그 점이 애석하다네. 그래도 어쩌겠나? 검으로 일가를 이룬 남궁세가의 장자로 태어난 것을. 그러니 검을 드는 수밖에. 그럼 허락한 것으로 알고 시작하겠네.”

    “그렇게 하십시오. 이 마당에 시간 끌어 좋을 것도 없으니까요.”

    ‘이런 젠장. 좋은 미끼를 걸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저런 엄청난 거물이 나타나 덥석 물었담. 별다른 악의는 없어 보이나 무지 강해보이는 데 이거 앞날이 평탄치만은 않겠구나. 에이, 뭐 될 대로 되겠지. 일어나지도 않은 앞날의 걱정을 미리 사서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으니까.’

    비담은 애써 담담한 척 표정을 관리한 후, 인철이 숨어있는 나무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형님, 그만 나오세요. 남궁가의 일은 검황 어르신께서 알아서 정리하신다니 우리는 저위의 잡놈들이나 처리하죠.”

    비담의 외침에 인철이 머쓱한 표정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더니 몇 마디 소곤소곤 전음을 주고받은 연후 둘은 전각의 지붕위로 몸을 날렸다.

    소혼마(消魂魔) 위척은 자신을 향해 한 점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두 청년을 보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과 수하 4명, 그리고 귀풍대 스물이 펼치는 은잠술이 어디 보통 은잠술이던가.

    사도련 안에서도 은신술로만 따졌을 때는 련주를 제외하곤 모두 한 발 양보해줄 정도의 특화된 무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청년은 자신들이 숨어있는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처럼 행동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위척은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된 형국이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그래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설마 저 애송이 녀석들이 우리가 펼친 은잠술을 간파했으려고. 그냥 다른 볼 일이 있어 지나가는 길일 게야. 만에 하나 발각되더라도 저쪽은 단 둘.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서둘러 정리하고 도주하면 그 뿐.’

    조마조마한 심정을 억누르며 바싹 몸을 엎드린 위척이 혹시나 있을 사태에 대비하여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낸 다음 조심스럽게 검병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두 청년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은신해 있는 스물다섯의 긴장도는 고조되었고, 마침내 둘 사이의 거리가 사라진 순간.

    위척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두 청년은 그저 지붕 위를 스치듯 지나가버렸다. 단순히 기우에 불과하였음을 깨달은 위척이 땀으로 흥건히 젖은 손을 검병에서 내리며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휴우, 다행히 들키지 않은 모양이군.”

    “아닌데요. 들키셨어요. 다만 도주로를 차단하려 지나친 것뿐인데.”

    “허업! 어, 언제?”

    “우리 대화로 해결할까요? 아님 진하게 몸으로 해결할까요?”

    “들켰다. 모두 쳐라!”

    상황이 여의치 않자 소혼마 위척은 곧바로 공격명령을 내렸다. 어영부영 이곳에서 시간을 끌었다가는 분노한 남궁세가의 칼을 온전히 받아내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지붕위에서 기척조차 숨긴 채 은신해 있던 스물다섯이 동시에 검을 뽑아들고 덤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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