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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68/154)
  • 68화

    연못 위에서 주섬주섬 옷을 벗으려는 비담의 행동에 그만 인내력 많은 남궁현탁의 뚜껑이 날아가고 말았다.

    “지금 여인의 속옷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 뭣 때문에 그리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우시는지...?”

    “자네 때문에 싸우고 있지 않은가? 자네랑 말을 섞었다며 동생이 나를 천하의 불한당으로 몰아세우지 않는가?”

    “에? 남자랑 살갑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무슨 큰 흠이 된다고 저런답니까? 동생분의 그릇도 참. 취향의 문제인 것을 왜 이해를 안 해주고 저러는지. 쯧쯧.”

    “그게 아니래도. 내가 지금 자네를 미리 섭외하여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자신을 궁지로 몰았다며 누명 운운하지 않는가. 그래도 이해가 안 되나?”

    “아! 진즉 그리 말씀해주시지. 저는 여인의 속옷 한 장 가지고 동생분과 다투시는 걸로 오해를 했잖습니까? 그럼 제가 가주님을 오늘 처음 뵈었다고 하면 해결되는 것 아닌가요?”

    “말 한번 잘했네. 자네도 들었지? 저자의 입으로 오늘 나와 처음 만났다고 하는 소리를. 이래도 내가 자네에게 누명을 씌운 거라 주장할 텐가?”

    “후후, 그거야 서로 말만 맞추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이런. 자네 지금 나하고 한 번 해보자는 것인가?”

    “한 판 붙자면 못할 것도 없지요. 대신 어느 한 쪽이 크게 상할 것임은 각오하십시오.”

    끄응

    남궁현탁은 조용히 침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의문의 침입자를 통해 동생과 연결된 끈을 알아내려는 찰나 시의적절 나타난 동생이 이상한 쪽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는 바람에 묘하게 꼬여버렸기 때문이다.

    동생의 성격상 가문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권위와 욕심이 더 중요했고, 서로 비슷한 전력을 쏟아 부어 붙는다면 세가에 막대한 피해가 생길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남궁현탁이 얼굴을 찌푸리며 주춤 물러서자 남궁현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으름장을 놓았다.

    “거 보십시오. 제대로 된 증거도 없고 어설프게 연극을 꾸며 동생을 해하려고 하니 그 꼴을 당하시는 겁니다. 그만 망설이시고 어서 저 녀석이나 잡아 단단히 혼을 내주십시오. 그럼 더 이상 이번 일로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남궁현호는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자 의기양양 떠들었다. 하지만 그의 부푼 꿈은 생각지도 못했던 비담의 방해로 또 다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증거요? 그 련이라는 단체랑 저기 불같은 아저씨가 엮인 증거를 말하는 것입니까?”

    “네, 이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잘난 주둥이를 나불댈 생각이더냐?”

    “아저씨 주둥이도 아니면서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기 모범적으로 생긴 가주님이 증거를 찾고 있어서 도움을 드리겠다는 데 자꾸 왜 그러세요? 형한테 무슨 죄라도 지으셨나요? 뭐 마려운 멍멍이처럼 자꾸 왜 그러세요?”

    “저, 저놈이 미쳤나?”

    “조금은 미친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홀홀단신 여기로 들어올 수 있겠어요? 그렇죠? 그 부분은 조금 인정. 그런데 지금 제가 미쳤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아니 쉬운 길을 놔두고 왜들 어렵게 돌아가려 발버둥치는 지 통 이해가 안 되네요. 거 문신이란 것을 새겼다고 했으니까 그걸 확인하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헉!! 어떻게...!!”

    “휴우, 녹림왕 임성필을 놀렸던 것이 조금 후회가 되네요. 이곳에도 녹림에 가면 임성필 밀어내고 우두머리 꿰차실 양반들이 한둘이 아니니.”

    비담의 말을 들은 남궁현탁의 인상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자기라고 그 생각을 왜 못했겠는가.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기에 애써 참았던 것이다.

    남궁세가의 전 식솔들이 모인 이곳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면 어떤 사태가 야기될지 그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싸우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노심초사하며 말하지 않았는데 정말 재수 없게도 물 위의 동동 떠 있는 녀석이 그 부분을 콕 집어 말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뿐인 동생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모두를 향해 여봐란듯이 광고까지 하고 있었다. 이놈의 집구석.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굳이 확인할 필요 없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외부의 세력과 결탁하여 계획을 꾸민 자들이 보란 듯이 몸에다 증거를 남겨 놓았겠는가? 그런 단순한 수에 넘어갈 세가의 식솔들이 아니네.”

    형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자신을 변호하자 다시 용기를 얻은 남궁현호가 서둘러 비담에게 항변하였다.

    “형님의 말이 백번 지당하다. 우리가 그렇게 단순하고 멍청할 리 없지. 누굴 바보로 여겨도 유분수지.”

    졸지에 천하의 멍청이 바보가 된 창궁대 전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저런 분을 수장으로 믿고 따라온 그동안의 세월이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큰 뜻을 위해서라지만 상처 난 자존심이 아려왔다.

    “그러니까 확인을 하자고요. 그런 단순한 수에 걸려든 멍청이, 바보천치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가주님 말씀대로 그래도 대 남궁가의 혈족들인데 그런 팔푼이 짓들은 안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럼 당당히 까발리고 확인시켜주면 그만이잖아요? 안 그래요?” 

    “싫다. 우리 대 남궁가의 식솔들이 뭐가 아쉬워 네놈의 뜻대로 움직여야하지?”

    “싫으면 말고요. 저도 벌건 대낮에 남자들 속살이나 구경하는 악취미는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괜히 저 때문에 싸움이 중단되었네요. 마저 싸우세요.”

    얄밉게 웃으며 말을 던지는 비담을 향해 남궁가의 전 식솔들은 영문도 모른 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뭔가 놀림을 당한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꼬투리가 잡혀 놀림을 당했는지 당최 감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큰 볼일을 보고 뒤를 안 닦은 이 찝찝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비담의 개입으로 인해 김이 팍 새버린 둘은 은연중 서로 다행이라 여기며 일을 이쯤에서 마무리 짓기로 하였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형님도 이상한 거에 휘둘리지 마시고 어서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알았다. 내 걱정 하지 말고 너나 처신 잘 하거라.”

    “자, 잠깐! 뭐지? 뭔가 중요한 일을 해결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맞다! 네 이놈!”

    자신의 처소로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둘은 화들짝 놀라 다시 돌아섰다. 얄미운 녀석이 연못 위에 동동 떠있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남궁가의 식솔들 역시 오늘따라 이상한 말과 행동을 연발하는 두 형제를 지켜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두 형제는 우려했던 일이 잘 무마되어 순간적으로 비담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화근덩어리인 저놈의 입을 봉하기 위해 잠시만 손을 잡기로 무언의 합의를 하였다. 눈빛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인 남궁현탁이 비담을 향해 외쳤다.

    “이제 그만 연못에서 나오는 것이 어떤가? 물 위에 떠 있으려면 내공의 소모가 적지 않을 터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네가 불리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어라? 그새 두 분이 손을 잡으신 거예요?”

    “허흠, 누가 손을 잡았다고 그러는가? 자네가 걱정이 되어 한 말일세. 세가에 들어와 난동을 피운 것은 깨끗이 눈감아 줄 터이니 그만 나오게.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나갈 수 있도록 내 조치를 취하겠네. 가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 것이니 믿어도 좋아.”

    “에이, 일이 이렇게 흐지부지 마무리되면 기껏 들어와 난장을 핀 수고로움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보아하니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싶으신 모양인데 그럼 저도 어쩔 수 없죠.”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

    “두 분께서 그만 다투겠다고 하시니 저라도 나서야죠. 이렇게 구경꾼도 많아졌는데 공연이 싱겁게 끝나버리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저라도 공연의 흥을 돋우는 수밖에요.”

    “그게 무슨 뜻인가?”

    “지켜보시면 압니다. 이렇게 좋은 공연을 돈도 안 내고 몰래 지켜보는 관객들이 있어서요. 함께 어우러져야 제 맛이지 않겠습니까? 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런데 비담이 숨어있는 구경꾼들을 향해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의문의 그림자 하나가 그의 옆에 솟구치듯 나타났다.

    비담이 온 신경을 숨어있는 자들에게 집중하고 있다가 몸을 날리려는 절묘한 순간에 나타난 것이라 그 역시 당황하고 말았다. 서둘러 몸을 뒤로 뺀 비담이 갑자기 등장한 의문의 그림자를 경계하며 위아래로 살폈다.

    눈처럼 하얀 문사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선풍도골의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비담을 바라보았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백발과 멋스럽게 가슴까지 드리워진 하얀 수염이 조화를 이루며 흡사 신선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눈부신 자태를 연출하였다.

    “누, 누구십니까?”

    비담이 공손한 어투로 갑자기 등장한 신선노인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노인의 입이 아닌 남궁현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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