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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67/154)

67화

콰앙

얄밉게 웃으며 활짝 열려있는 창천각의 문을 일부러 시원하게 부수고 도주하는 비담이었다.

“어라? 문이 열려있었네요. 죄송!”

“네 이놈. 당장 저 놈을 잡아다 내 앞에 꿇어 앉히거라. 어서.”

중요한 기밀서류들만 아니었다면 당장 나서서 잡고 싶은 남궁현호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계획을 위해 지금은 심사숙고하고 인내하며 참아야만 했다.

“이야. 남궁세가 분들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제가 길을 잃고 헤맬까봐 직접 따라나서서 길안내를 해주시다니. 사실 건물들이 다 거기서 거기고, 하도 넓어 내심 걱정했는데 이리 함께 가주시니 정말 든든하네요.”

비담은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도 쉴 새 없이 입을 열어 창궁대의 속을 박박 긁어 놓았다. 전각들 사이를 지나치며 비담은 될 수 있는 대로 큰 소음을 일으켰다. 열려있는 문을 일부러 걷어차기도 하고, 멀쩡하게 서있는 담벼락을 화류선을 이용해 부순 다음 길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비담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세가 내의 지리에 밝은 창궁대원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포위망은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고, 세가는 태풍이나 지진을 만난 것처럼 때 아닌 몸살을 겪어야만 했다.

창궁대원들이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쫓아올수록 비담의 눈빛은 더욱 장난스럽게 물들었다. 도주가 거듭될수록 이제는 창궁대원뿐만이 아닌 세가내의 무사들까지 합류하여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때려 부수며 도주로를 확보하는 게 여의치 않자 비담은 급기야 ‘등평도수(登萍渡水)’를 이용해 규모가 큰 인공연못을 유유히 건너가 버렸다. 지붕위로 올라가 버린 닭을 보는 멍멍이 심정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은 추격자들은 연못가를 따라 빙 둘러 비담을 쫓아갔다.

연못의 반대편에서 희희낙락 추격자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비담이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무사들을 향해 방긋 웃어준 후 다시 반대편으로 ‘등평도수’를 시전 하여 건너갔다.

속에서 천불이 터진 남궁성운이 똑같이 ‘등평도수’를 시전 하여 쫓아갔으나 갑자기 날아든 부채에 화들짝 놀라 내공이 흐트러졌고, 그 순간 차가운 연못에 시원하게 몸을 담갔다. 물에 빠져 생쥐 꼴이 된 남궁성운을 향해 생긋 웃어준 비담은 그대로 다시 물위를 달렸다.

다행히 수영실력이 좋았던 남궁성운은 헤엄을 쳐 빠져나왔고, 기진맥진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비담이 몇 차례 연못을 끼고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 가주인 남궁현탁의 귀에도 이와 같은 정황이 들어갔고, 불순한 무리의 준동으로 오인한 남궁현탁은 천뢰대 전원을 이끌고 그 연못으로 출동했다.

세가의 실질적인 세력이 등장하자 비담은 도주하던 것을 멈춘 후, 그대로 연못 중앙에 둥실 떠 상황을 지켜보았다. ‘무력답수’라는 최상위 수준의 경공을 몸소 선보이며 무력시위를 한 것이다.

하지만 비담의 행동과 입담이 시정잡배와 다름없다는 창궁대의 보고를 받고, 가주 남궁현탁은 비담을 가벼이 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분명 연못에 가려 보이지 않는 연근(蓮根)을 밟고, 진짜인척 허무맹랑한 무력시위를 하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날개달린 새가 아닌 이상 이제는 비담이 연못 중앙에 포위되어 꼼짝도 못할 것이란 사실에 남궁현탁은 여유 있게 물었다.

“누군데 감히 이곳에 들어와 기물을 부수고, 건물을 파괴하고 난리를 치는 것인가? 이러고도 무사하길 바라는 것인가?”

“누구신데 힘없고 연약한 소생을 그리도 핍박하시는 것입니까?”

“네, 이놈. 감히 가주님께 그 무슨 망발이냐. 어서 나와 무릎을 꿇고 잘못을 시인하지 못할까?” 

분기탱천한 천뢰대주를 말린 남궁현탁이 조곤조곤 비담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핍박? 자네가 지금 세가 내에 들어와 무슨 짓을 했는지 직접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눈이 있으면 한번 둘러보게. 태풍이 지나가도 이 정도는 아닐 게야.”

“그야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뭘 좀 보여 달라기에 보여드렸더니 다짜고짜 공격하니 저로서도 피하는 수밖에요. 그러다 막다른 곳에 이르면 저도 살아야하니 부수고 도망가야지요. 그렇게 된 것입니다.”

“뭘 보여주었기에 공격을 한단 말인가?”

“그냥 여인의 검은색 속옷 한 장 보여드렸죠. 그런데 창천검 남궁현호 대협이 원했던 물건은 그것이 아니더군요. 그 정도 물건이면 어떤 사내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것이라 여겼는데 통하지가 않더라고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뭐. 저한테는 창천검 대협이 보여 달라는 련이라는 단체의 문신이 없으니까요.”

“련? 그리고 문신? 좀 더 소상히 말해보게. 어서.”

조곤조곤 말하던 남궁현탁의 목소리가 다급함으로 물들었고, 막 기력을 회복한 남궁성운의 얼굴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비담의 표정은 능청스러움 그 자체였다.

‘후후, 주연급 배우들은 다 모이고 무대도 마련되었으니 시작해볼까? 뒤에서 이 상황을 연출한 주역들이 튀어나오도록 말이지.’

동생과 끈이 닿은 의문의 조직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려 하자 남궁현탁은 안절부절 비담을 닦달하였다.

“허허, 어서 자세히 좀 들려주게. 대관절 련은 무엇이고 문신은 또 무엇인가?”

“저도 잘 모르죠. 아리따운 여인의 검은 속옷에 대한 품평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대뜸 ‘련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냐, 위조불가인 특수한 물감으로 자신과 창궁대에게 문신을 해주지 않았느냐, 빨리 문신을 보여달라’라고만 하셨어요. 여인의 속옷이야 제가 얼마든 구해서 보여줄 수 있는데 몸에다 덕지덕지 그림을 그리는 취미는 없어서 애석하게도 보여드리지 못했죠. 그게 다인데요?”

“정녕 그게 사실인가? 현호 자신의 입으로 련이라는 단체의 문신을 새겼다고 하였는가?”

“그렇다니까요. 창궁대의 명성이 자자하여 시원하게 실력이나 한번 겨루려고 왔다가 이 무슨 고생인지. 그나저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기물과 건물파괴의 책임은 묻지 말아주십시오. 저도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선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네. 대신...”

막 말을 이으려던 남궁현탁의 고개가 한쪽으로 매섭게 돌아갔다.

“네 이놈!! 주둥이 그만 나불거리지 못할까?”

남궁현호는 다된 밥에 재를 뿌리려는 천둥벌거숭이의 만행을 막고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리고 대화가 이어질수록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우선 고함부터 지르고 본 것이다.

“언어구사능력이 너무 후지네요. 기껏 찾아온 손님에게 주둥이라니. 그리고 제 입이 무슨 나팔입니까? 나불나불 거리게?”

남궁현호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떠드는 비담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조곤조곤 묻는 형에게 화살을 돌렸다.

“아니 형님은 지금 생각이 있으신 겝니까? 세가에 들어와 이리 난장을 친 녀석이랑 말을 섞다니요? 그냥 잡아서 세가의 쓴 맛을 톡톡히 보여준 연후에 내다 버려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슨 추태입니까? 가주로서 아랫사람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자네가 언제부터 가주인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였는가? 그리고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이유부터 듣고 혼을 내도 늦지 않아. 어디까지나 그것은 가주인 내 권한일세. 오히려 가주인 나에게 훈계를 하는 자네가 월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아니 드는가? 아랫사람들 보기 부끄러워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넬세.”

“지금 말 다하셨습니까? 어떤 미친놈이 들어와 세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그게 가주인 형님의 입에서 나올 소립니까?”

“왜 말이 안 되나? 그럼 자네방식대로 무조건 들이박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시위하는 것인가?”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유치하게 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집니까? 이유 불문하고 세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녀석과 대화를 나눌 가치가 있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대관절 무슨 소리가 듣고 싶어 저런 녀석과 말을 나누는 것입니까? 동생의 치부라도 만들어내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도 없습니다. 어디서 이상한 녀석을 하나 섭외하여 저를 함정에 빠트릴 요량인가 본데 그리 호락호락 당할 제가 아니지요.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못하십니까? 입이 있으니 변명을 해보십시오.”

“자네 나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인가? 내가 선량한 자네를 핍박하기 위해 이상한 놈을 섭외하여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왜 저런 놈에게 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것입니까?”

졸지에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은 비담이 날선 공방을 주고받는 형제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싸우시느라 바쁜 건 알겠는데 저를 이상한 놈 취급하지는 말아주세요. 전 누구의 편도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중립이니까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드려야 되겠네요. 저도 여인의 속옷 한 장이 이런 분란을 야기할 줄은 미처 몰랐어요. 지금 형님께서 검은색 비단 속옷을 못 차지하신 울분을 토로하시는 모양인데 아쉬운 대로 제 것이라도 벗어드릴 것이니 그만 화를 가라앉히시고 노여움을 푸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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