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후후, 그자는 단순한 연락책에 불과합니다. 모름지기 제대로 성공하려면 실력자가 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지당하신 말씀이나 어째 혼자 오신 것 같습니다만...”
“혼자 오나 떼로 몰려오나 일만 성사되면 그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절차에 따라 보여주시지요.”
‘뭘 보여 달라는 거지? 너무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분탕질 치러 온 마당에 이것저것 가리게 생겼나.’
비담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품안을 뒤져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꺼내었다. 비담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선화의 검은색 속옷이었다.
아마도 일을 치르며 품안으로 딸려 들어간 모양인데 하필 중요한 순간에 잡힌 물건이 그것이었다. 비담은 선화와의 오붓했던 밤들을 회상하며 검은 비단 속옷을 그대로 책상 위로 던져 버렸다.
“여기 있소.”
“엥? 이게 무엇입니까?”
남궁현호는 자신이 기대했던 문신과는 거리가 먼 검은색 비단조각이 훌훌 날아오자 잔뜩 경계심을 품고 물건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다 검은색 비단천이 여성의 은밀한 곳을 감싸는 속옷임을 깨닫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노발대발하였다.
“지금과 같이 중요한 순간에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것이오? 대관절 여성의 속옷을 꺼내놓은 저의가 무엇이오?”
“그 물건이 아니오? 몰래 간직한 채 냄새 맡고 야릇한 상상하며 시시덕거리는 정신 나간 놈들에겐 정말 귀한 것인데 그쪽 취향은 아닌가 보네요. 그나저나 나름 희소성이 높은 물건인데 그걸로 어떻게 안 되겠소?”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만 장난치시고 문신을 보여주시오. 고작 문신 하나 보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문신이요?”
“련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문신 말이오. 특수한 물감으로 새기기에 위조 자체가 안 된다며 저를 비롯한 창궁대 전원에게 시술하지 않았습니까?”
“련이요?”
“위쪽에서 오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위쪽에서 왔지요. 하남성이 안휘성에 비해 위쪽이지 않습니까?”
“뭐라? 그럼 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남성에서 내려왔다는 말?”
“네. 제가 위에서 왔다는 말을 했더니 이쪽으로 데려오던 걸요?”
“그럼 준비가 어쩌고 떠든 것은 무엇이고, 나를 지목하여 찾아온 연유는 또 무엇이오?”
“그야 한바탕 붙으려고 찾아온 것이지요. 준비가 되었냐고 말한 것은 그런 뜻이었는데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명성이 자자한 무림의 세력들을 상대로 진검승부를 하고 다니는 무사입니다. 창궁대의 무력이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듣고 한판 붙으려 찾아왔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 이런 망할 경우를 보았나. 지금처럼 중요한 때에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기어 들어와 방해를 한단 말이냐. 오냐,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니 그에 걸 맞는 대우는 해줘야겠지. 뭣들 하느냐. 목숨만 취하지 말고 대충 정리하여 쫓아 버리거라.”
“호오, 듣도 보도 못한 잡놈에게 된통 당하면 어떤 얼굴을 할지 사뭇 기대가 되네요. 그럼 빨랑빨랑 시작하지요.”
비담이 관절을 요란하게 꺾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사들을 향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련이란 단체의 입김이 여기에도 있단 말인데. 뭐 나랑은 상관없으니 우선은 내 할 일에만 충실하자고.’
남궁성운의 눈짓을 받은 창궁대의 검사 하나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날렸다.
차앙
맑게 울리는 검명과 함께 무사의 검이 그대로 비담의 몸을 쓸어갔다. 비담은 화류선을 꺼내 검을 살짝 옆으로 흘린 후 호들갑을 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릇 싸움을 할 때에도 서로간의 예의를 지켜야 하거늘 다짜고짜 칼부터 들이밀면 어쩌자는 것이오? 남궁세가의 위명이 쟁쟁하여 믿고 있었는데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오?”
“대협께 여인의 속옷을 던진 것은 예의에 맞다 생각하나? 어디서 굴러먹다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모르겠다만 오늘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버리거라.”
“물건을 잘못 꺼냈다 누차 이야기하지 않았소? 여인의 속옷 한 장 던졌다고 준비도 안 된 사람에게 칼부터 휘두르니 이게 무슨 경우요? 이러고도 무림의 명망 높은 가문이라 할 수 있겠소?”
빽빽 소리를 지르며 난장을 치는 비담으로 인해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급기야 화를 참지 못한 남궁현호가 노기 가득한 눈으로 아들인 남궁성운을 채근했고, 남궁성운은 검사 세 명을 추가로 투입하였다. 어떻게든 시끄러운 불청객을 빨리 제압하여 쫓아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네 명의 창궁대 검사가 달라붙어도 비담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고, 비담의 고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당황한 창궁대의 검사들이 어떻게든 꼴도 보기 싫은 비담의 입을 막으려 분전했지만 그때마다 적절하게 요리조리 피하는 비담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네 이놈. 언제까지 그리 도망만 칠 생각이냐? 칼을 든 무인이라면 정정당당 시원하게 한 번 붙자.”
“난 부채를 든 무인이다. 그럼 해당사항이 없지 않느냐.”
근엄하게 외치는 무사를 향해 놀리듯 항변한 비담의 몸이 기묘한 각도로 틀어지며 자신을 향해 내리그어진 검 세 자루를 피해내었다.
“정정당당 좋아하시네. 말 시켜놓고 칼을 냅다 긋는 건 무슨 경우냐?”
비담은 무사들의 속을 살살 뒤집으며 전각 안에 있는 고가의 기물들을 교묘하게 부수기 시작했다.
챙그랑
송나라 장인의 혼과 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명품 도자기 한 점이 비담의 몸에 부딪히며 그대로 깨어져나갔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칼을 피하려다 그만.”
부우욱
전각의 한쪽 면,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하던 한 폭의 백호도(白虎圖)가 듣기 거북한 소음과 함께 그대로 찢겨져 나갔다.
“어라? 이거 비싼 그림인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우당탕
고가의 물건들이 부서져 나갈 때마다 하나씩 툭툭 불거져 나온 이마위의 힘줄이 파도를 그리며 출렁거렸고, 급기야 더 이상 참지 못한 남궁현호의 입을 비집고 엄청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네 이 노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경거망동 하는 것이냐.”
분기탱천한 남궁현호의 외침에 식겁한 남궁성운과 창궁대 전원이 분분히 몸을 날렸다. 이대로 미꾸라지 한 마리를 방치했다간 물을 흐리는 선에서 일이 마무리되지 않고, 연못 자체가 사라질 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각 안의 기물이 부서질 것을 염려하여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창궁대원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미쳐 날뛰는 비담을 붙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잡힐 듯 잡힐 듯하며 도주하는 와중에도 물건을 툭툭 건드리는 비담의 만행으로 인해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비겁하게 건물 안에서 이러지 말고 넓은 수련장에 가서 한판 붙자. 네가 원하는 것이 우리 창궁대와 제대로 붙어보는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저도 그러고야 싶죠. 그런데 다짜고짜 칼부터 휘둘러 넓고 쾌적한 연무장에서 준비하고 멋지게 한판 어우러질 기회를 박탈한 것은 여러분들입니다. 이제와 가라면 못 갈 것도 없지만 이리 머리수가 많은데 지금 가면 제가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저, 저놈의 주둥이를 그냥...”
“에이, 손님에게 교양머리 없이 주둥이라뇨? 저 빈정 상해서 더 이상 이곳에선 못 도망 다니겠네요. 그만 갈래요.”
“저, 정말이냐?”
“네. 더 이상 이곳엔 부술만한 물건이 없어서요. 이참에 남궁세가 구경이나 좀 하죠. 혼자가면 심심하니까 길 안내겸 함께 가주시면 저야 고맙고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