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인철 역시 비담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서로에게 내보이지 못했던 감정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둘의 모습을 배웅하였다.
남궁세가의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은 자신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는 인영의 모습에 당황하여 황망히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질수록 긴장도가 높아지고 막 부딪히려는 순간, 아찔한 속도로 질주하던 그림자가 거짓말처럼 자신들 앞에서 뚝 멈추었다.
“누, 누구냐?”
“손님인데요.”
“뭐, 뭐라? 손님? 먼저 이름을 밝혀주십시오.”
언제 당황했냐는 듯 정문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비담이라 하는데요.”
“미리 약속을 하고 방문하신 것입니까?”
“예약을 해야 하나요?”
“지금은 세가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누구를 막론하고 함부로 들이지 말라는 가주님의 엄명이 내려진 상태라 저희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니 협조해 주십시오.”
“그럼 할 수 없지요. 손님이니 의당 방문한 곳의 법도를 따르는 수밖에요. 혹시 이곳에 창천검 남궁현호라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다행히 계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그분께 급히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요. 계시면 번거롭더라도 연통을 좀 넣어주십시오. 위에서 왔다고 하면 알아들으실 것입니다.”
“위요?”
“그렇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더 이상 숨거나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말하면 버선발로 뛰어 나올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우선은 그리 전하겠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문지기무사는 알쏭달쏭한 비담의 말에 강한 의구심이 들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기로 하였다. 괜히 윗사람들의 일에 미주알고주알 참견했다가 험한 꼴 당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비담이 한가로이 남궁세가의 편액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 무렵,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청년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나왔다. 비담은 험악한 인상의 청년을 바라보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후후, 이제 시작이구나. ‘불입호혈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란 말대로 한바탕 제대로 들쑤셔주마.’
“창천검 남궁현호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분의 휘하조직인 창궁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남궁성운이라 합니다. 그분의 장자이기도 하지요. 아버님께서는 지금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몸을 빼실 수 없다며 거듭 사죄의 말씀을 전하라 하셨고, 아울러 정중히 모셔오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저야 상관없으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럼 안내하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사온데...?”
“그게 무엇이오?”
“제가 듣기론 위에서 나오셨다 그러던데 정확히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여쭈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후후, 너무 많은 걸 알려하면 다치는 법이거늘.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모양이오. 뭐, 굳이 듣고 싶다면 가르쳐드리리다. 이곳의 이목과 상관없이 밝혀도 된다면 말이지요. 그래도 괜찮겠소?”
“아,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언짢음을 거두시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럽시다. 때가 되면 자연히 밝혀질 일, 피차 서두르지 맙시다.”
남궁성운은 비담의 능수능란한 응대에 본전도 못 찾고 바로 길을 안내하였다. 뒤가 구릴수록 허점도 많은 법.
비담은 여유롭게 밀고 당기며 숨어서 계략을 꾸미고 있는 쥐새끼들을 제 풀에 놀라 튀어나오게 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미끼마다 주렁주렁 방울을 달아 가급적이면 요란하게 흔들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면 집중될수록 인철의 수색은 한결 수월해 질 테니까.
회랑을 따라 한참 걸어가자 가주의 집무실 못지않은 크기의 으리으리한 전각이 비담의 눈앞에 나타났다.
창천각(蒼天閣)
남궁세가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천뢰대(天雷隊)와 쌍벽을 이룬다는 무력집단, 창궁대(蒼穹隊)의 실질적 수장인 창천검 남궁현호가 머무는 전각이었다. 으리으리한 전각의 규모에서도 알 수 있듯 가주의 동생으로서의 위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세가의 특성상 혈족으로 이루어진 집단이고, 그러한 특수성 때문에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의 전통과 가문을 지켜내기 위해 몇몇 힘을 가진 혈족에게 힘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한 결속력과 탄탄한 무공을 바탕으로 세가는 험한 무림의 풍파 속에서도 가문을 지켜내었고, 지금은 그러한 힘의 균형이 가주인 남궁현탁과 둘째인 남궁현호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가의 전통과 불문율은 외부세력으로부터 가문을 지켜주는 튼실한 바람막이 역할도 하였으나 그에 따른 치명적인 약점도 내포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누군가 혈족을 배신하고 안에서부터 균열이 생겨 무너져 내리면 속수무책 당한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설마 가족을 배신하겠냐는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있기에 그러한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마찰 없이 이러한 구조가 유지되었으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세월이 흐르다보면 가족에게 칼을 겨누는 패륜아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거니와 늘 누군가의 그림자에 갇혀 열등감 속에 살아온 망나니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바로 남궁현호처럼 말이다.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른들로부터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형과 달리 늘 비교당하며 암울한 시절을 보내야했던 남궁현호.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남궁현호는 형을 이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단히도 무공을 연마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남궁현호의 무공은 나날이 성장하였고, 어느새 가문 안에선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가주인 아버지와 어른들은 무재(武才)가 뛰어날지언정 성정이 급하고 편협한 현호보다는 성품이 온화하고 배려심 많은 현탁을 차기 가주로 내정하였고,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형이 가주에 오른 순간부터 자신의 무력을 이용하여 암암리에 세를 불리던 남궁현호는 급기야 창궁대라는 친위대와 다름없는 무력집단을 창설하였고, 세가 내에서 순수하게 무를 쫓는 젊은이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였다.
남궁현호의 철저한 개인교습과 혹독하기로 소문난 훈련과정을 견디며 창궁대는 세가 내에서 최고의 무력집단으로 인정받았고, 창천검 남궁현호에 대한 충성심 역시 맹목적일 정도로 치솟았다.
처음엔 남궁현호 역시 외부의 세력과 결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몸속을 흐르는 피 역시 남궁가의 것이니까. 하지만 창궁대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남궁현탁의 견제가 시작되고, 가문 어른들이 계속 다그치자 남궁현호는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무력이 막강했지만 지닌바 성격이 폭급했고, 조언을 해줄 마땅한 책사의 부재로 인해 무력을 이용해 단순히 위협만 하여 가주의 자리를 찬탈하려던 계획을 전면 수정하여 끝내 해서는 안 될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썩은 부위를 과감히 도려내어 새살이 돋게 하려는 전략. 서로의 세가 대등한 상황에서 남궁현호가 내세울 패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급기야 외부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도련은 이러한 세가의 정황을 사전에 파악하여 남궁현호를 대신해 수년간에 걸쳐 치밀한 계획을 세워주었고, 적당히 지원을 해주었다. 두 세력이 부딪혀 ‘양패구상’할 정도로 말이다.
이를 알 리 없는 남궁현호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날의 계획들을 점검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때마침 그 상황에 맞추어 비담이 방문한 것이다.
비담이 성큼 들어서자 남궁현호는 담담히 웃으며 맞이하였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빛나며 비담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허허, 이거 죄송합니다. 대계를 위해 자리를 비우지 못한 점 이해해주십시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이 제일 바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준비엔 차질이 없겠지요?”
“그야 저보다는 상부에서 더 잘 파악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더 잘 알고 있으나 확인 차 물어본 것입니다.”
“헌데 늘 저를 찾아오시던 분은 어디가고 당신께서 오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