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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154)
  • 64화

    제 8 장 남궁세가(南宮世家)

    안휘성 천주산에 위치한 남궁세가의 본가.

    지붕위에 납작 엎드린 채 다급하게 뛰어가는 한 인영을 눈으로 쫓는 의문의 그림자들이 있었다.

    “세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찌할까요?”

    “후후, 쥐새끼 한 마리 잡자고 그동안 공들여 지었던 집을 홀랑 태워먹게 생겼구나. 귀풍대(鬼風隊)에선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었느냐?”

    “녀석이 교묘하게 흔적을 지우고, 교란하여 그동안 애를 먹었으나 결국 이곳으로 다시 숨어들어온 정황증거를 포착하였다는 보고가 방금 들어왔습니다. 세가의 규모가 방대하여 숨은 위치를 정확히 찾는데 시간이 조금 소요되겠지만 곧 꼬리가 잡힐 것 같다고 하옵니다.”

    “어떤 녀석인지 정말 애를 먹이는구나. 잡히면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세가의 움직임은 그냥 내버려둔다. 련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무림전복지계(武林顚覆之計)’가 조금 앞당겨 지겠지만 세가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무너지는 것은 예견되었던 일. 우리는 귀풍대의 보고가 올라올 때까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본다.”

    “복명!”

    복면을 한 괴한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나며 다시 지붕위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명을 내린 사내는 무림을 뒤집어엎을 거대한 파도를 상상하며 음침하게 웃었다.

    전각 앞을 정신없이 뛰어가던 사내는 가주가 머물고 있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더니 침상의 한 쪽 귀퉁이를 돌린 후 드러난 공간으로 잽싸게 몸을 던졌다. 사내를 삼킨 침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의 자리로 미약한 소리와 함께 원상복구 되었다.

    의문의 사내는 일렁이는 횃불에 의지한 채 좁다란 통로를 따라 끊임없이 걸었고, 곧 조그마한 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똑똑 똑똑똑

    일정한 음률에 맞춰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도 화답하듯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 사내는 문안으로 몸을 던졌다. 사내가 들어선 방에는 이미 어른 10명 정도가 둥글게 원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문사건을 단정히 쓴 40대 중반의 남성이 들어온 사내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그 자의 상태는?”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허나 워낙 깊은 상처를 입어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그래, 그자가 가지고 있다는 치부책은 회수하였느냐?”

    “그것이 아직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세가를 벗어나 도망가는 와중에 의문의 괴한들에게 쫓긴 듯 보이고, 그 와중에 어딘가에 숨겨놓은 것 같습니다. 지금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지라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아니다. 그래도 그자가 목숨을 건졌다니 한 줄기 희망은 보이는구나. 만약 그와 같은 치부책이 저들의 손에 넘어가거나 정도맹의 손에 넘어간다면 세가는 다시 일어설 기반조차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한낱 꼭두각시가 되어 더러운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게 될 것이야. 그자가 깨어나는 대로 이유 불문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것을 회수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가주님.”

    “고생했다. 돌아가 쉬어라. 참, 현호와 창궁대, 더불어 정체모를 더러운 녀석들이 세가 곳곳에 숨어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을 것이니 각별히 주의해서 이동하여라.”

    “알겠습니다, 그럼.”

    검례를 취한 사내가 서둘러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고, 방안에 남은 사람들은 깊은 한숨과 함께 꼬여버린 세가의 운명에 대해 개탄을 하였다.

    “가주, 그나저나 이제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직은 저도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현호와 그 녀석이 데리고 있는 창궁대를 상대하기에도 벅찬 마당에 그동안 어둠속에 숨어 세가를 좀먹었던 쥐새끼들이 호시탐탐 뒤를 노리고 있으니...휴우!”

    방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가주 남궁현탁의 시름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 역시 동화되어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장으로썬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봅시다. 현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는 하나 설마 혈족을 향해 칼을 들이대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요.”

    세가에 드리워진 암운을 걷어내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회의를 거듭해온 가솔들은 가주의 말대로 우선은 기다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남궁현호가 늘 형의 그림자에 묻혀 분노를 표출하기는 하였으나 세가의 안위를 도외시한 채 혈족들을 상대로 막 나가지는 않을 것이란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비상대책회의를 하던 그 시각.

    낙양을 떠난 비담과 인철이 천주산 끝자락에 막 당도하였다.

    “부리나케 달려온 보람이 있네요. 단 하루 만에 두 개의 성을 가로질러 오다니...”

    “휴우, 한 번은 쉬었다 가자 할 줄 알았는데, 정말 태어나 원 없이 달려본 하루였어.”

    “죄송합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중간에 쉴 수가 없었어요.”

    “후후, 그냥 해본 말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나저나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남궁세가에 한바탕 불을 지를 생각입니다. 그래야 꼭꼭 숨어있는 쥐새끼들이 튀어나올 것이고, 이성보 막주님께 집중된 이목도 분산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튀어나오는 대로 족족 편 가르기를 해서 막주님을 괴롭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줘야지요.

    제가 시선을 분산시키는 동안 형님께선 막주님을 찾아봐 주십시오. 세가 어딘가에서 바깥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숨죽이고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 괜찮겠는가? 자네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네만 그래도 혼자 상대하기엔 세가의 저력도 만만치 않을 테고, 막주를 뒤쫓았다는 의문의 복면괴한들 역시 아직 이 근처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음, 이 상황에서 형님께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너무 걱정하시니 드려야 되겠네요. 저번에 국경지대에서 형님과 제가 신나게 싸웠을 때 제가 얼마의 능력을 사용했다 생각하시는지요?”

    “팔 할 이상의 능력을 썼다 여겼네.”

    비담은 걱정스레 답하는 인철을 향해 방긋 웃으며 손가락 일곱 개를 펼쳐 보였다.

    “일곱?”

    “네, 형님의 자존심 상하실까 저어되어 말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는 싫었거든요. 저는 그 때 본신실력의 단 칠 할만을 사용하였습니다. 형님께서 무얼 걱정하시는지 충분히 알고 있고, 저 역시 서희를 생각해 모험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형님께서는 흑천맹 흑천대의 대주가 아니십니까? 저야 그저 무림의 떠돌이에 불과하여 무슨 사고를 쳐도 자유로이 빠져나올 수 있지만 형님은 위치가 위치인지라 잘못하면 정사대전으로 번질 소지도 다분히 높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형님이 전면에 나서시는 것보단 제가 혼자 나서서 들쑤셔놓고, 그 틈을 이용해 뒤에서 형님이 막주님을 수색하는 양동작전이 훨씬 효율적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일곱이라. 겨우 일곱의 능력만 사용한 자네와 팔 할의 실력을 사용한 내가 대등하게 싸웠다 이 말이지? 이거 형님으로서의 위신이 안 서는구먼. 지금은 상황이 이러니 나중에 오붓하게 한 번 더 붙기로 하고, 우선은 자네 말에 따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겠군. 하지만 나와 한 가지는 분명히 약조를 해주게.”

    “그게 무엇입니까?”

    “자네는 이제 자네 혼자의 몸이 아닐세. 자네가 어떤 상황을 우려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네만, 만약 몸 성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정말 제2차 정사대전이 벌어질 것이란 사실만 명심하고 떠나게. 알겠는가?”

    비담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인철을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천애고아로 자란 자신에게 친 혈육의 정을 나누어주었던 스승님이 돌아가신 이후 가족처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준 이는 인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인철의 눈빛을 보았을 때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앞뒤 가리지 않고 큰일을 벌일 인철의 기세를 느끼며 비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맴돌았다.

    ‘가족이 옆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하고 좋은 거였구나. 외롭고 쓸쓸했던 그 길을 이제 더 이상 혼자 걸어가지 않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형님.’

    “정사대전을 막기 위해서라도 더 몸조심해야겠네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허흠, 자네보다는 혼자 남게 될 서희가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너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게.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

    “하하, 오해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그래도 형님이 정색을 하며 싫어하시니 이쯤에서 그만 헤어지지요. 혹시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모습 드러내지 마시고, 세 시진 후 여기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자기 할 말만 후다닥 끝낸 후 서둘러 자리를 뜨는 비담이었다. 어느새 점이 되어버린 비담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인철이 툴툴 웃었다.

    “후후, 싱겁기는. 아무튼 가족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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