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까망이들의 동공이 급속도로 커지며 비담을 징그러운 벌레 보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이어지는 구토.
우웩
어우욱
비담 역시 인철의 뜬금없이 터져 나온 모함에 할 말을 잃을 채 붕어처럼 입만 벙긋벙긋 벌렸다. 저것은 오해라고, 자신 역시 피해자라며 변명을 하고 싶었으나 너무 큰 정신적 충격에 모든 사고가 정지해 버리고, 뇌마저 자신의 기능을 팽개치고 직무유기를 하는 바람에 홀라당 더러운 누명을 덮어 쓰고 말았다.
채앵
곳간 안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으나 구토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까망이들은 미처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아직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뇌로 인해 비담 역시 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이야! 정말 쭉 뻗은 모습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이거 언제 넣어야 되요?”
“소저의 마음이 흡족해지면 그 때 넣겠습니다.”
“정말요? 그럼 더 구경해도 되나요?”
“하하, 그 녀석 역시 민감하니 조심히 다루기만 한다면 얼마든 구경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소저께서 만족을 느끼신 후 넣고 싶을 때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제가 넣어 드리겠습니다.”
“호호, 자상하시네요. 고맙습니다. 그럼 밝은 곳에서 구경할래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리 신나십니까?”
“그럼요. 매일 침상에 누워 상상만 했는걸요. 그러다 제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아마도 오늘밤을 잊지 못할 거예요.”
“저도 자랑스레 제 물건을 꺼내 보여드릴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곳간 안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영혼 둘의 경쾌한 대화가 이어질 무렵, 수풀 속에선 정신 줄을 놓고 허망하게 앉아 있는 비담과 그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며 입가에 묻은 분비물을 훔치는 까망이들의 묘한 대치상황이 이어졌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비담과의 거리를 벌린 까망이들은 비담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던졌고, 비담은 억울함과 분함이 가득한 눈으로 까망이들에게 호소하였다.
하지만 곳간 안의 대화가 새로운 전기를 맞자 비담과 까망이들은 암묵적으로 휴전에 합의하고 다시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 충분히 구경했으니 그만 넣어주세요. 너무 바깥구경을 오래했다며 잔뜩 화를 낼지도 모르잖아요. 헤헤.”
“별 말씀을요. 이 녀석은 원체 바깥에 나오는 걸 좋아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넣어도 된다고 하셨으니 염치불구하고 넣겠습니다.”
“아니에요. 자꾸 구경을 시켜달라며 조른 것은 저인걸요? 그런데 집이 조금 작아 보이는데 꽉 끼어서 답답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네요.”
“보기엔 이래보여도 들어가면 꽉 맞물려 한 치의 틈도 없답니다. 음양의 조화가 오묘하다는 것을 넣을 때마다 느낍니다.”
“우와, 물건을 보면서도 그런 걸 느끼시다니 정말 존경스럽네요. 저도 빨리 그 물건을 가지고 싶어요.”
“하하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소저께 어울리는 아담하고 가벼운 것으로 말이지요.”
“저, 정말요? 제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까요?”
“당연히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 있습니다. 소저라고 해서 이런 물건을 가지지 말란 법이 없지요. 나중에 손수 무공도 몇 가지 가르쳐 드리고 제 손으로 직접 장만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때는 마음껏 쥐고 휘두르십시오.”
“꺄아! 생각만 해도 벌써 흥분되고 미칠 것 같아요. 오늘의 약속 꼭 지키셔야 되요.”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 했으니 반드시 소저와의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돌아오는지 모르겠군요?”
“그러게요. 음식을 구하러 가신 까망이님들도 그렇고 볼 일 보러 가신 분들도 감감 무소식이라 걱정이 되네요. 나가신지 꽤 오래 되었는데.”
“함께 나가서 찾아볼까요?”
“네. 그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참, 소저의 보드라운 물건 챙겨 나오십시오.”
“호호, 대장님도 물건 빠뜨리지 마시고 가슴에 끌어안고 나오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녀석과 저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걸요. 하하하.”
둘은 곳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곳간 주변의 수풀에 서서 귀신이라도 보았는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는 비담과 까망이 스물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눈엔 지금 인철의 품에 살포시 안겨있는 검 한 자루와, 조심스럽게 자신의 털옷을 쓰다듬는 빙루의 모습이 망막 가득 잡혀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하냐?”
“여기서 뭐하세요? 무슨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었나요?”
정말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인철과 빙루였다. 둘은 서로의 털옷과 검을 보며 대화를 나누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구경꾼들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펴며 제대로 농락당한 것이었다.
다시 곳간으로 돌아온 일행은 17호와 18호가 얻어온 음식을 먹으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비담은 음식을 먹으며 간간히 까망이들을 향해 눈에서 광선을 내뿜었고, 본의 아니게 오해와 억측들로 비담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까망이들은 지은 죄가 있었던 터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눈치 없는 인철과 빙루는 비담과 까망이들 사이에 생긴 깊은 오해의 골이 자신들의 대화 때문임은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즐겁게 음식을 먹느라 바빴다.
비담은 까망이들이 꼬리를 말고 묵묵히 식사에만 열중하자 이번엔 분노의 화살을 인철에게 돌렸다. 좋게 처음부터 칼이라 설명하고 비담과 서로 무기를 섞어가며 즐겁게 싸웠노라 이야기를 했다면 지금처럼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굳이 물건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한순간이었지만 자신에게 씻지 못할 불명예를 안겼기에 속에서 화산이 터질 지경이었다.
비담은 쌍심지가 돋은 눈으로 태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는 인철을 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식사가 끝나는 대로 저 좀 보시죠.”
“응? 갑자기 왜?”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 시간 좀 내주십시오.”
“아, 알았네.”
비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인철은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으나, 바로 이어지는 말을 하며 비담이 살짝 부채에 손을 가져가자 마지못해 승낙을 하였다. 만약 거절을 하면 무조건 부채를 날릴 기세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하루 종일 고단했던지 빙루가 먼저 잠을 청하고, 까망이들 역시 곳간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눈을 붙였다. 태연하게 잠을 청하려던 인철은 얼굴 한쪽이 따끔따끔 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다 비담과 눈이 마주쳤고, 나오라는 비담의 신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거참 알 수가 없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순한 양처럼 내 말이라면 고분고분 따르던 동생의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없네. 아, 정말 따라 나가기 싫은데.’
비담은 어기적어기적 따라 나서는 인철을 데리고 인적이 거의 없는 근처 야산으로 올라갔다. 인철은 비담이 자신을 데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또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고 그러는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곳간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비담이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고, 자신의 옆자리를 인철에게 내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그, 그러지.”
“형님?”
“어? 왜 그러나?”
“여인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셨군요.”
“그, 그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네.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가?”
“빙소저가 마음에 드십니까?”
“뜬금없이 왜 그런걸...?”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 마음에 드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