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54)
  • 56화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던 빙루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빙루의 눈에는 정말 시커먼 장정들이 부채의 장단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것으로 비쳐졌고, 자신을 당당히 까망이들의 대장이라 칭하는 구인철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제법 외관과 잘 어울리는 별칭이라 ‘까망이’, ‘까망이’하며 입속에서 되뇌었다.

    비담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신고식도 잘 넘기고, 더불어 갑자기 불어난 시커먼 장정들로 인해 긴장했을 빙루의 마음도 풀어주어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후후, 우리 까망이 대원님들! 앞으로 여기 계시는 아리따운 소저의 안전과 신변 잘 부탁드립니다. 혹여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면 제 부하랑 함께 춤을 추시게 될 것이니 각오하시구요.”

    “넵. 걱정하지 마십시오.”

    잔뜩 군기가 든 흑천대를 바라보며 비담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인철 역시 분위기가 한결 밝아지고 부드러워지자 흑천대에게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위치로!”

    나타났을 때처럼 흑천대 스물은 그대로 연기로 화해 구릉 주변으로 스며들었다.

    “그럼 저랑 까망이들의 소개는 끝났고...이제 두 분이 서로 소개를 하면 되겠군요.”

    “전 빙루에요. 올해 스물넷이구요.”

    “아! 빙소저였군요. 저는 까망이대장...아니 구인철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서른둘입니다.”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밝히며 구인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말이 잘못 나올 정도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우세요?”

    “예?”

    “얼굴이 너무 빨갛게 변하시고 이마에 땀도 송글송글 맺히셔서...”

    “그, 그러게요. 사막이라 그런지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많이 덥네요.”

    빙궁의 침상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12년을 보낸 빙루였다. 좋게 말하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눈처럼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안 좋게 말하면 남녀 간의 일을 비롯해 세상 물정엔 영 맹탕인 여인이 바로 그녀였다.

    빙루는 덥다는 인철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소매를 들어 그의 이마를 닦아 주었고, 인철의 육신과 영혼은 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30평생을 검만 휘둘러온 외롭고 험난했던 길.

    하지만 가문과 맹의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끝없이 도전하고 참고 이겨내며 묵묵히 걸어온 외길 인생에 드디어 꽃이 피려 하고 있었다.

    묘하게 흐르는 둘 사이의 기류를 지켜보며 비담은 둘의 인연이 천생연분임을 직감했다. 외롭게 병마와 싸워온 빙루와, 한 결 같이 고독을 씹으며 무의 길을 걸어온 인철은 분명 닮아 있었다.

    그리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인철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 여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시큼하게 아렸던 비담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기로 결심을 굳혔다. 눈치 없는 둘에겐 이것이 최선이었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니까.

    비담이 속으로 세부적인 계획을 마련하고 있는 동안에도 빙루는 여전히 인철의 땀을 열심히 닦아 주었고, 인철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대로 ‘얼음’인 상태로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담은 어느 정도 계획이 수립되자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들다가 땅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인철의 모습에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하아! 저러다 얼굴 터지시겠네. 참, 남녀 간의 일은 불가사의하단 말이야. 어떻게 세상 모든 사내가 덤벼도 꺾일 것 같지 않은 형님의 목과 불굴의 의지가 여인의 가녀린 손짓 한방에 꺾이느냔 말이지. 누군가 했다던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이나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이다.’라는 말이 생각나는군. 휴우, 숙맥인 형님과 세상물정에 어두운 아가씨 둘 다 교육시키려면 보통일은 아니겠구나. 제대로 된 함정이 아니면 걸리지도 않고 어설프게 일만 그르치겠어.’

    더 이상 어색한 상황을 보다 못한 비담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시죠. 낙양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할 테니까요. 참, 형님께 부탁하나만 드릴 게요.”

    해롱거리던 인철이 부탁이라는 비담의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리며 반문했다.

    “부탁?”

    “예. 다름이 아니라 형님도 알다시피 빙소저는 무공을 모르잖아요. 안 그래도 저는 이틀 동안 업고 온데다 거기에 형님이랑 시원하게 어우러지고, 좀 전엔 까망이들 상대로 이기어선까지 써서 너무 지쳤거든요. 그래서 형님께서 저 대신 빙소저 좀 업고 달려주시면 고마울 것 같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내, 내가 말인가?”

    비담의 말을 들은 인철의 입이 떠억 벌어지며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네. 형님이 빙소저를 업어주시면 한결 수월하게 낙양에 당도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야 그렇지만 서둘러 꼭 가야할 이유라도 있는가? 그리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우리 까망이들 중에 찾아보면 다리가 튼실한 놈이 있을 터인데...”

    “아까도 말씀드렸듯 제가 취선루주에게 신세를 진 게 있어서 그분의 안위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까망이들이야 지들 몸 건사할 실력밖에 되지 않으니 안심이 안 되서 그렇습니다. 혹여 까망이들에게 소저를 업혔다가 무슨 불상사라도 생기면 어쩌시려 그럽니까? 저는 형님의 실력은 철썩 같이 믿어도 아직 그 녀석들은 믿지 못하니 소저의 안위를 맡길 수 없습니다.

    뭐 형님께서 정 내키지 않으시면 지친 제가 소저를 업고 달리는 수밖에요. 아이고, 삭신이야.”

    툴툴거리며 과장되게 몸 이곳저곳을 두드리는 비담이었다. 비담의 의도를 눈치 챈 흑천대원들은 간절히 자신들의 주군을 응원하며 제발 승낙의 말이 튀어 나오길 학수고대하였다.

    칼 한 자루에 몸을 맡기고 허허벌판에서 칼바람 맞아가며 평생을 외롭게 산 양반이 바로 자신들의 주군이었다. 이제 가정을 꾸리고 안정과 행복을 누릴 권리가 넘치고도 남았으며 이번이 절호의 기회였다.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빙루라면 주군의 짝으로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기에 어떻게든 진도가 나갔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들 모두의 바람이었다.

    이런 모두의 바람이 전달되었던지 인철은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굽혀 빙루에게 등을 내밀었다. 비담이 빙루를 향해 어서 업히라는 눈짓을 보냈고, 빙루는 수줍은 듯 조심조심 인철의 등에 업혔다.

    “허허, 소저. 그렇게 업히시면 달리다 떨어져요. 팔을 이렇게 돌려 형님의 목을 단단히 두르고, 가슴이랑 상체는 좀 더 등에 밀착시키고.”

    일일이 빙루의 자세를 교정해주는 비담이었다. 비담의 지시에 따라 업히자 널따란 인철의 등에 포옥 밀착이 되었고, 옷을 수도 없이 껴입었으나 생생히 등으로 전해지는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인철의 얼굴은 이제 불이라도 난 듯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비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철의 자세도 교정해 주었다.

    “형님도 마찬가지로 그런 구부정한 자세로 달리시면 힘만 더 들고, 요란하게 흔들려 등에 탄 소저가 어지럽습니다. 나이도 자실만큼 자신 양반이 그게 뭡니까? 서희가 어렸을 적에 한 번도 업어준 적 없으세요? 팔을 이렇게 둘러서 소저의 엉덩이를 튼튼하게 받쳐주셔야 안정감을 느끼죠. 자요, 이렇게요.”

    비담이 굳어있는 인철의 팔을 억지로 끌어당겨 빙루의 엉덩이를 감싸게 만들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빙루의 엉덩이 감촉에 인철의 심장이 쿵덕쿵덕 뛰기 시작했다.

    자세를 손봐준다는 핑계로 둘의 몸을 더욱 밀착시키는 비담이었다. 모름지기 사랑의 감정은 접촉에서 시작되는 법.

    “음, 이제야 달릴 만하겠네요. 앞으론 제가 따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두 분 모두 이리 업고, 업히시면 됩니다.”

    “아, 앞으로? 오늘만 이러는 게 아니고?”

    “하하, 낙양까지 가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족히 사흘은 걸릴 겁니다. 형님도 제 얘기를 들어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공을 상당부분 써버렸으니 다시 내공이 찰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형님께서 제 내공이 얼른 채워지도록 여인들과 동침을 하는 것을 허락할 리도 없고, 저 역시 서희를 두고 함부로 그러기도 싫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낙양에 도착하면 기루에 들러 여인들과 동침을 해야 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저 역시 뾰족한 방도가 없으니 조금만 양해해 주십시오.”

    “아, 알았네.” 

    “그럼 모든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낙양을 향해 출발하지요.”

    “그, 그러세.”

    뒷정리를 깨끗이 마친 비담을 선두로 우람한 곰과 그의 등에 업힌 눈처럼 하얀 토끼 한 마리, 나머지 까망이들은 태양이 막 떠오르는 사막 위를 쏘아진 화살처럼 달려 나갔다.

    꼬박 하루를 쉼 없이 달린 일행들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무렵, 하북성 북단의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하였다. 하루 종일 달리느라 지친 다리와 여독을 풀기 위해 마을의 공동으로 사용하는 빈 곳간 하나를 빌려 짐을 풀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