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고아가 된 일부터 어떻게 귀문에 들어가 강신귀공의 수련을 했는지, 그리고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은 원영신이 바뀐 일화와 그걸 바탕으로 도색성 길천과 인연을 맺고 선법과 색공을 익힌 사실에 최근 북해빙궁에서 겪었던 일까지 그렇게 비담의 일대기를 담은 한편의 대서사시는 완성이 되었다.
정말 다채로운 이야기가 한데 섞여 있어서 이야기를 듣는 내내 구인철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론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하니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허, 정말 굴곡진 삶을 살았구먼. 그나저나 만약 대법이 제대로 성공했다면 천마 할아버님의 진전을 이어받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였겠어.”
“대법이 끝났을 때, 정말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이 절절히 와 닿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왜 낙양으로 다시 돌아가는가?”
“낙양에 있는 취선루에 볼 일이 있어서요.”
“취선루? 자네가 도박을 하고, 기녀랑 밤새 뒹굴고, 술 먹고 시봉세 하나를 손봐준 그곳?”
“네, 그곳이요.”
“문 닫았던데. 내 부하들이 만류하지만 않았어도 그놈의 문짝 시원하게 두 동강 내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럼 이리 고생하며 사막을 뒤지지도 않았을 테고.”
“헉! 정말 문을 닫았어요?”
“내가 왜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가도 소용없네. 자네가 낙양을 떠나던 그날, 문을 닫았으니까.”
“흐음. 형님 말을 못 믿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구요. 제가 그곳의 루주랑 아는 사이라 그냥 넘길 수 없어서 그러니 직접 찾아가 확인을 해봐야 되겠어요.”
“그건 자네가 알아서하게. 나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열심히 먹을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취선루가 폐쇄되었다는 소식에 비담의 신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비담은 자신을 물심양면 지원해준 흑막주 이성보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며 꺼져가는 모닥불에 남은 장작을 집어 던졌다.
잠에서 깬 빙루는 새로 합류한 의문의 사내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12년 동안 빙궁에서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늘 보아오던 여인들이 아닌 건장한 사내를 보게 되자 신기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평생 무의 길만을 고집스레 걸어온 인철에게 빙루의 집요한 시선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고, 그래서 차마 마주보지 못한 채 먼 곳을 응시하거나 비담에게 시답지 않은 농을 걸기 바빴다.
비담은 화끈한 성정과 호탕한 사내다움으로 무장한 인철이 빙루에게 쩔쩔매자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 키득거리느라 바빴다.
그러다 현재의 어색한 상황에 안절부절 못하는 인철을 위해 비담이 화제를 전환시켜 주었다.
“참, 형님의 떨거지들 소개시켜 주셔야죠.”
“아! 어쩐지 뭔가 허전하다 싶더니 그게 빠졌었구먼. 모두 그리 납작 엎드려만 있지 말고, 나와서 서로 인사 나누거라.”
인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릉주위에 은신해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던 흑천대원 스무 명이 비담과 빙루의 앞에 연기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빙루는 급작스레 시커먼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인사를 하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흑천 1호라 하오. 흑천대에 드는 순간 이름 석 자는 버렸으니 더 이상 소개할게 없군요. 그럼.”
“흑천 2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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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 20호입니다. 제가 흑천대의 막내니 앞으로 부담 느끼지 마시고 마음껏 애용해 주십시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막내 20호까지의 소개는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소개가 끝나는 순간 구인철은 우직하고 고까운 표정의 부하들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마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내라면 모름지기 저래야 하는 법. 부러질지언정 결코 휘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강자존의 세계, 그곳이 바로 마도였다.
거기에 자신들을 떨거지 도매급으로 취급했으니 더욱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게 이해가 되었다.
그나마 둘의 싸움을 직접 지켜보았던 막내만이 웃으며 정중히 자신을 소개하였다. 두 눈으로 힘의 우열을 이미 확인했으니 알아서 기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성의 없이 고개만 위아래로 까딱 흔들며 비담의 신경을 살살 건드렸다. 걸어오는 도발을 마다할 비담이 아니었기에 맞불로 응수해 주었다.
“시커먼 하늘 1호부터 20호? 거참 허우대들은 멀쩡한데 작명 솜씨는 영 꽝이네. 그러지 말고 그냥 떨거지 1호부터 20호가 어떨까? 까만 하늘보다는 그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 너무 지나치군요. 아무리 대주님과 각별한 사이라고 해도 저희들과는 별개의 일이니 그걸 빌미로 아랫사람 대하듯 삐딱하게 그러면 안 되지요. 버르장머리 없이.”
“후후, 떨거지라는 표현이 많이 걸렸던 모양이야. 사내들이 고작 그런 걸로 속 좁게 굴기는. 아니 주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실력이면서 대우해달라 칭얼대기만 하면 알아서 실력이 쑥쑥 자라나? 한심하기는.”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 더 이상 우릴 건드리거나 자극하지 마시오.”
“오우, 표정들이 살벌하네. 눈빛만으로도 사람 여럿은 그냥 죽이겠네. 왜? 자꾸 자극하면 덤비게?”
“두말하면 잔소리.”
막내는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천대 선배들이 결국 싸우려 하자 그냥 포기해버렸다.
굳이 나서서 칼을 섞고 우열을 가리겠다고 하니 말릴 명분도 없었고, 싸움구경처럼 신나고 재미난 일도 없었으니까. 정말 밥보다 싸움을 더 좋아하는 선배들다웠다.
“하하, 화통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어. 좋아! 그럼 신나게 한판 붙자고. 대신 나도 위치와 체면이 있으니 어느 정도 대우는 받아야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내 부하를 먼저 내보낼 것이니 한번 어우러져 보게.”
뜬금없이 부하 운운하는 비담을 지켜보며 순간적으로 흑천대는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감을 극대화하여 살펴보아도 이곳에 있는 스물 셋을 제외하곤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의혹만 커져가는 찰나. 비담의 손을 떠난 ‘화류선’이 이기어선의 수법으로 흑천대 사이를 날아다니며 그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날개라도 달렸는지 무시무시한 강기를 머금은 부채가 훨훨 자신들 사이를 날아다니자 분분히 검을 뽑아든 흑천대가 이리지리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검을 곧추세워 날아오는 부채를 쳐냈던 몇몇의 칼은 이미 두 동강이 난지 오래였고, 그 모습에 식겁한 나머지 흑천대원들은 칼을 맞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몸을 사리기에 급급했다.
“뭐야? 스물이나 되는 머릿수로 내 부하 하나도 제대로 감당 못하는 거야? 이거 이리 약해서 어찌 하늘같은 주군을 보필하려고 그러나. 좀 더 분발해보게. 하하하.”
유쾌하게 웃는 비담과는 달리 신출귀몰한 부채의 움직임을 상대하는 흑천대는 죽을 지경이었다. 정말 한순간 정신 줄이라도 놓으면 바로 골로 가버릴 상황.
이제 자존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한 식경을 미친 부채에 쫓겨 도망 다니던 대원들의 호흡이 눈에 띠게 흐트러졌고, 눈빛 역시 칙칙하게 죽어 들어갔다.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 망할 놈의 부채 좀...흐익!!”
말을 잇던 흑천 3호가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부채를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으나 결국 흑천 3호의 머리카락이 댕강 잘려나가며 허공에 흩날렸다. 자신의 떨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3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만약 부채의 주인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댕강 잘려나가 땅을 나뒹구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자신의 목이었을 테니까.
대원들의 눈빛이 공포에 젖어든 것을 확인한 순간 비담은 장시간 이기어선을 하느라 내력 소모가 심해져 있었기에 바로 화류선을 회수하였다.
“춤들 추느라 고생이 많았네. 어디 내 부하랑 어우러져 더 추고 싶은 사람?”
“어, 없습니다.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오! 모두 만족한 눈치네. 내 부하는 늘 한가하니까 언제든지 어려워말고 말하게. 내 명령 한마디면 껌뻑 죽어서 고분고분 따르니까.”
존경의 염을 가득 담아 비담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흑천대였다. 흑천대의 얼굴에선 비굴함 없이 순수하게 무와 힘을 숭상하는 우직한 성정만 배어 나왔다. 그리고 가슴속 깊이 비담을 인정하였기에 좀 전의 무례함이나 고까운 표정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비담은 비록 다혈질이고 호전적이긴 하나 실력을 인정하는 순간 담백한 태도를 보이는 이런 사내들이 마음에 들었다.
“형님, 그래도 훌륭한 수하들을 두셨군요. 떨거지란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대신 까망이들이라 부르죠. 헤헤.”
“뭐야? 그럼 난 까망이들의 대장이 되는 건가? 까망이대장? 하하하.”
“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