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고요함 사이로 극현도의 음침한 웃음과 함께 가느다란 독백이 흘러 나왔다.
“후후, 앞으로 3년. 사도의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나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 혈귀대의 완성과 함께 구파일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며, 돈에 혈안이 된 황실의 절대 권력 역시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오정회의 뿌리는 썩어 문드러질 것이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마도의 하늘 역시 곧 붕괴될 것이다. 바야흐로 황실과 무림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최고 권력자가 탄생하는 것이지.
허나 방심은 금물. 거대한 둑도 작은 균열로부터 무너지는 법. 오늘과 같은 사태가 반복되면 견고하고 원대한 나의 계획에도 틈이 생기고 구멍이 생길 것이니 앞으로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한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천하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시켜주마.”
극현도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빙궁의 빙회석 함정을 아슬아슬 빠져나온 비담은 기다리고 있던 빙루와 만나 다시 낙양을 향해 길을 나섰다. 우선은 취선루를 찾아가 흑막주 이성보에게 빙루의 일신을 의탁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살을 애일 듯 불어 닥치는 눈 폭풍을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걷기를 하루.
급격히 떨어지는 빙루의 체력을 보다 못한 비담이 양해를 구한 후 빙루를 업었다. 설랑(雪狼)의 털로 짠 모자를 머리까지 푹 눌러쓴 빙루가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고, 비담의 육신이 남쪽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비담의 육신은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올라선지 오래였기에 이정도의 추위와 바람은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이틀의 시간을 꼬박 달리자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대륙 북쪽의 접경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우,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은 이 느낌은 뭐지? 아무튼 화류선도 얻고 이리 무사히 돌아왔으니 된 거지 뭐. 그나저나 빙소저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 많이 지쳤을 테니 오늘은 적당히 쉬었다 가는 게 좋겠구나.”
비담은 자신의 등에 업혀 혼절한 빙루를 배려하여 적당히 쉬었다 갈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방이 확 트인 야트막한 구릉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으로 다가가 꼼꼼히 살핀 후 빙루를 내려놓았다. 적당한 높이에 사방으로 시야가 확보되어 누군가의 접근을 사전에 발견할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빙루를 눕힌 후, 주변을 돌며 땔감이 될 만한 것들을 죄다 긁어온 비담이 모닥불을 피웠고, 이내 모닥불 주위로 따스한 온기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빙궁의 여인들이 챙겨준 물과 건량을 꺼내 한데 넣고 말간 국물이 배어나올 때까지 푹푹 끓였다.
비담은 조잡하지만 그래도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 완성되자 쓰러져있는 빙루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빙루가 미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깨어나자 비담은 준비한 물로 조금씩 빙루의 입술을 축여주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 여기는...?”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국경지역입니다. 아직 조금 더 가야하지만 날씨도 많이 풀리고 위험도 많이 사라진 터라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셨는데 오늘은 이곳에서 푹 쉬며 허기를 달래시기 바랍니다.”
비담이 그릇에 국물을 떠서 건네자 빙루는 따스한 그릇을 손에 쥔 채 비담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치료해준 것으로도 모자라 빙궁에서 구해준 은혜에 이렇듯 세심한 배려까지.
“고맙습니다. 어찌 이 은혜를 갚아야 할는지...”
“아닙니다. 저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길천 어르신을 생각하니 그동안 소저께서 겪었을 고초가 남의 일 같지 않아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국물이 식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비담이 웃으며 거듭 권하자 빙루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손에 든 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비담 역시 빙루가 음식을 먹자 자신도 남은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었다.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하루 종일 서쪽으로 부지런히 달려온 태양도 자신의 쉼터인 지평선 너머로 아득히 사라져갔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비담은 빙루가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땔감을 충분히 넣어주었다. 비담의 따뜻한 배려에 빙루는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이를 확인한 비담이 조심스럽게 구릉 위로 올라갔다.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여 잔뜩 긴장한 채 달려오느라 길천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이제야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형님? 괜찮으세요?’
‘후후,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아네. 신경써줘서 고마우이.’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사이에 무에 그리 망설이나. 내가 왜 무작정 10초식 ‘설매풍류(雪梅風流)’를 시전 하라 하였는지 많이 궁금했지?’
‘그렇습니다. 땅에 새겨진 ‘雪中梅花流春風(설중매화류춘풍)’라는 글귀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자네는 그 글귀를 누가 새겼다 생각하는가?’
‘당연히 초하련 궁주님이 남기신 게 아닐런지요?’
‘맞네. 자네의 예상대로 그 글귀는 하련이가 남긴 거였어. 나와의 추억을 잊지 않았던 게지.’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 초하련 궁주님께서 형님과의 일을 회상하며 남겨 놓으신 글귀가 맞았군요.’
‘하련이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가 어디인지 아는가?’
‘글쎄요...’
‘화산이었다네.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수놓던 늦겨울, 화산 어귀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마을에서 처음 하련이를 만났지. 자네도 알다시피 화산은 매화로 유명한 곳이라네. 수북하게 쌓인 설경을 뒤에 두고 찬연하게 자신의 존재를 피워낸 수천 송이 붉은 매화의 향연이란...정말 황홀한 그 광경에 우리 둘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지.
선계의 풍경인양 아름답게 펼쳐진 장관에 나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 때 창안한 초식이 바로 ‘설매풍류’였다네. 분분히 흩날리는 눈송이와 그것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 바람, 그리고 모든 매화꽃들 사이를 정신없이 뛰노는 어린 하련이까지. 정말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지. 하련이에게 기쁨을 주기위해 나 역시 화류선을 펼쳐들고 함께 춤을 추었고, 내손을 떠난 화류선도 장단에 맞춰 함께 흩날렸다네.
하련이는 그 때 당시 삶에 대한 어떠한 미련도 없는 상태였었지. 어린 나이지만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통찰력을 지녔던 하련이에게 삶은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네. 그래서 하련이는 그 날 이후 늘 입버릇처럼 말을 했었지. 자신이 죽으면 가게 될 저세상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날의 풍경의 펼쳐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하얀 눈을 얹은 매화 사이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흘러갔으면’이란 말을 한참 되뇌곤 하였다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 처음 받은 선물이 너무 좋다며 나에게 고마움을 전하던 그 촉촉한 눈망울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네.
나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있던 하련이에게 내 초식을 선물하였지. 물론 하련이가 익힐 수는 없었지만 너를 위해 만든 춤이라고 하였더니 무척 기뻐하며 팔짝팔짝 뛰더군.
‘설매풍류’는 검법의 ‘이기어검’과 같은 경지인 ‘이기어선’의 경지라네. 그렇기에 아무리 힘을 써도 뽑히지 않았던 게야.’
‘아마도 제 생각엔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신 초하련 궁주님께서 형님과의 애틋한 추억이 녹아있는 설경 속 매화 밭을 회상하시며 어린 시절 그때처럼 생의 마지막 춤을 추신 것은 아닐런지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는 그 글귀만 남겨 놓으신 채...’
‘그렇게 믿고 싶으이.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네. 설후가 모르는 우리 부녀만의 추억은 오직 그거 하나였으니.’
무엇을 추억하는지 길천의 음성이 뚝 멎었고, 비담 역시 숙연해진 분위기에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에게 눈을 돌리며 독백을 하였다.
‘사부님은 제가 지치고 힘들 때마다 늘 밤하늘의 별을 보라 하셨지요.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이 밤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까닭은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지상에 남겨진 이들에게 마음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아마도 초하련 궁주님의 별도 어딘가에서 밝게 빛나며 형님께 속삭이고 있을 거예요. 그만 슬퍼하셨으면 좋겠다고 말이지요.
차가운 눈의 시련을 견디고 이겨낸 매화만이 찬연한 봄날의 바람을 마주할 수 있듯 형님도 그만 궁주님을 놓아주세요.’
다시 자리로 돌아온 비담은 빙루가 덮고 있는 옷을 다시 추켜올려준 후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비담이 그렇게 한참의 시간동안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의문의 사내가 모닥불이 타고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누구지? 내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나 가까이 접근하다니.’
의문의 흑의사내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비담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불 좀 빌립시다. 사막의 밤이 이리도 매서울지 미처 몰랐구려.”
“사막이란 놈은 준비 없이 맞닥뜨리기엔 유별나고 무서운 녀석이지요. 행색을 보아하니 며칠 고생을 한 모양인데 이쪽에 앉으시지요.”
“하하, 고맙소이다. 이거 초면이지만 염치불구하고 앉겠습니다.”
사막에서 만난 뜻밖의 불청객을 위해 비담은 넉넉히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의문의 사내는 횡재라도 했다는 듯 밝게 웃으며 모닥불 앞으로 바싹 다가와 앉았다.
“그나저나 사막에서 이리 사람을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갑구려. 국경을 넘어 나가시는 길이오, 아니면 국경 밖에서 들어오시는 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