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비담의 말을 들은 6명의 여인들은 싸늘한 눈으로 궁주에게 다가가 염천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태에 대해 설명하고 궁주에게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공자님의 말이 사실입니까?”
당돌하게 따지듯 묻는 여인들로 인해 대전은 금방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비담 개인의 생각으로 치부하기엔 앞뒤의 정황이 그럴싸하게 맞아 떨어졌고, 더불어 꽤나 구체적이어서 그냥 웃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궁주 역시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비담을 날카롭게 쏘아 보았다.
“이제와 이러는 연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화류선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제게 이러시면 안 될 텐데요? 그리고 너희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째서 궁주인 나보다 저자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것이냐? 감히 설후궁주님께서 남기신 기록을 의심하는 것이냐?”
“물론 저희들 역시 설후궁주님의 유지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허나, 만약 공자님 말대로 무공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또 그와 같은 사실을 궁주님께서 사전에 알고 계셨다면 어째서 저희들을 사지로 몰아넣으신 것입니까? 무인에게 있어 무공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궁주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많다. 나 역시 저자의 말에 깜빡 속아 그러한 부작용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무공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사실은 지금에야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요. 그와 같은 부작용을 사전에 알고 계셨으면서 어째서 저희들을 염천에 몰아넣어 지원자를 뽑으신 겁니까? 빙궁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써 부하들부터 사지로 밀어 넣는 다는 것이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하셨는지요?”
“이것들이 오냐오냐 해줬더니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그럼 너희들은 수장인 내가 먼저 나서서 극히 희박한 확률에 도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냐?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궁은 누가 책임질 것이냐? 너냐? 아니면 너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궁주가 여인들을 지목하자 대전의 공기는 삽시간에 싸늘히 식어 버렸고, 수뇌부와 일반 궁의 여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감정의 골이 깊게 패이고 말았다.
“궁주님께서 궁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고 하시니 저희들도 그 부분에 대해선 한발 양보하겠습니다. 그럼 빙루의 일에 대해선 어찌 해명할 것입니까? 정말 구음절맥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부모를 죽이고 그 아이를 데려온 것입니까? 아니면 저희들이 모르는 어떤 내막이 숨어 있는 것입니까? 어째서 빙궁의 위상에 먹칠을 하는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하신 것입니까?”
“호호, 가소로운 것들. 감히 언제부터 너희들이 내가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따졌단 말이더냐? 염천에서 저놈과 잠깐 뒹굴더니 아주 간이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그리고 빙루의 일도 그렇다. 저자의 말만 철썩 같이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 증거가 있느냐? 내가 그리했다는 증거 말이다. 증거.”
궁주가 증거를 대라며 호기롭게 외치자 여인들은 그만 꿀 먹은 벙어리마냥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묵묵부답이었다. 비담의 말에 욱해서 무작정 뛰어왔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빙루가 대전에 나타났다. 궁의 여인들은 혈색이 돌아온 건강한 모습의 빙루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고, 궁주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궁주는 아직 치료도 채 끝나지도 않은 빙루가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뿐더러 나타난 순간 역시 매우 절묘했기 때문에 속으로 침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뭐, 뭐지? 어째서 저토록 건강한 모습인 게야? 분명 저자의 말대로라면 아직 1차 치료밖에 하지 못했다고 그랬는데. 그럼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모두 거짓보고였단 말인가?’
“오랜만에 뵙는군요. 나소희 궁주님.”
또박또박 이름을 밝히는 빙루의 눈매가 서늘했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는 빙루의 등장에 여인들은 모두 침을 꼴깍 삼키며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혈색을 보아하니 구음절맥의 치료가 완전히 끝난 것이냐?”
“호호, 아직도 제가 구음절맥에 걸렸다 믿고 계시는군요. 공자님께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하신 모양인데 사실 저는 구음절맥과 비슷한 증상이었지 초하련궁주님과 같은 절맥이 아니었습니다. 이거 애석해서 어찌하지요?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까지 저를 데려오셨는데 궁주님의 야심이 허망하게 무너졌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여인에 불과하답니다. 그나저나 궁의 여인들이 모두 모였으니 잘난 궁주님의 입으로 직접 해명을 해주시지요. 어찌하여 제 부모님과 저희 마을사람들을 도륙하신 것입니까?”
“가, 감히.”
나소희가 비담을 씹어 먹을 듯 바라보았다. 이번 일을 이렇게 만든 원흉은 그저 고개만 푹 숙인 채 서있었다. 일이 크게 틀어졌다고 생각한 나소희는 실실 웃으며 결국 본색을 드러냈다.
“호호, 일이 아주 고약하게 되버렸구나. 아직은 시기상조라 여겨 참고 있었다만 일이 이 지경까지 된 마당에 무얼 더 망설이겠나?”
나소희는 사이한 미소를 입에 물더니 거침없이 자신의 소매를 찢어버렸다.
부욱
그리고 소매 안, 하얀 팔뚝에는 핏빛의 글씨로 련(聯)이라는 문신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나소희의 행동을 지켜보던 친위대 역시 궁주처럼 자신의 소매를 찢어 버렸고, 똑같은 모양과 빛깔의 문신이 같은 위치에 새겨져 있었다.
“표정들이 아주 가관이구나. 그리 토끼눈을 뜨지 않아도 놀랐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그만 거두거라. 그나저나 이제 시원하게 편 가르기를 해볼까?”
“궁주님? 설마 궁을 버리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사특한 문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도대체 저희들 몰래 그동안 무슨 일을 꾸미신 것입니까?”
“련(聯)에 대해 알려하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진다. 많은 것을 알려하지 말거라.”
“련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흐음,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자세히 알려하면 다친다고 누누이 설명했건만. 더 이상 묻지 말거라. 하지만 그동안의 정을 생각하여 한 가지 사실만은 일러주마. 머지않아 무림은 련에 의해 일통이 되고 사도천하가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당당히 무림을 활보하고 싶다면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거다. 언제까지 이런 촌구석 오지에서 썩어 지낼 셈이냐?”
“언제부터입니까? 도대체 저희들 몰래 언제부터 그 련이라는 단체와 손을 잡은 것입니까?”
“뭐 이 마당에 무얼 더 숨기겠느냐? 련에선 정확히 12년 전에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머지않아 사도천하가 도래할 것이고, 당당히 자리 하나를 꿰차고 싶다면 지금 선택을 하라고. 난 오랜 고민 끝에 그들이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고 비상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련에선 내게 첫 번째 임무를 부여했지. 바로 빙루의 마을을 초토화시키라는 명을. 나도 처음엔 꺼림칙해서 이유를 따져 물었으나 절대 말해주지 않더구나. 오로지 쌓는 공적치에 따라 나중에 위치가 결정될 것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해주었지.”
“하지만 그들을 어찌 믿고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하신 것입니까?”
“후후, 너희들은 그래서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했더라면 이처럼 고여 썩지도 않았을 것을. 잘 들어라. 솔직히 여기 포섭된 친위대를 비롯해 궁 전체의 여인들이 모두 덤벼도 사자로 온 그들 넷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처음부터 작정하고 찾아온 그들의 강요된 선택이란 말이다. 나는 그제야 궁의 초라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고, 무림은 철저히 약육강식의 논리로 움직인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만약 내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빙궁은 12년 전에 무림에서 지워졌다. 그들에겐 충분히 그럴만한 힘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궁을 지켜냈을 뿐이다. 더 이상 긴말 하지 않겠다. 선택하라. 나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곳에서 뼈를 묻던지.”
음산한 궁주의 물음에 여인들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급작스레 생각지도 못했던 대형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 셈이었다. 비담은 련이라는 단체까지 거론되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간파했다.
그저 궁주와 친위대를 제거하면 일이 마무리될 거라 여겼던 것은 자신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만약 궁주의 말대로 그처럼 어마어마한 세력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면 섣불리 나서기도 애매했기에 우선은 사태를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나소희는 정신을 못 차리는 궁의 여인들을 향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후후, 너희들로썬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허나, 나를 그동안 믿고 따라왔던 것처럼 그대로 따라오면 된다.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나 역시 그리 호락호락 련에 놀아나지 않았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설후궁주님께서 남긴 기록이 모두 날조된 것이라 저놈이 떠들었지만 사실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지 않느냐? 그리고 빙루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헛다리를 짚은 셈이 되었지만 련의 눈을 피해 그녀를 데려온 것 역시 궁의 앞날을 걱정했던 내 충정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고, 련에 대항할 내 노림수요 안배였다. 저기 서있는 놈의 지랄 맞은 성격을 예상하지 못해 일이 조금 앞당겨지게 되었으나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 사소한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으로의 일만 고민하는 게 어떻겠느냐? 강요하지 않겠으나 궁에 남겠다면 모질게 손을 쓸 것이니 후회 없는 선택을 하도록.”
여인들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선택을 강요하는 궁주로 인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빙루의 일만 놓고 보았을 때, 어떤 이유가 되었건 한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 행동은 용납할 수도 또는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것도 무림과 전혀 연관이 없는 일반인을 상대로 말이다.
허나 련이라는 단체가 정의로운 곳이 아니라고 해서 배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눈을 치켜뜨고 자신들을 쳐다보는 궁주와 그녀의 친위대의 무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빙루 역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련이라는 단체의 등장과 함께 상황이 묘하게 꼬여버리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12년 간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여인들로 하여금 눈 뻔히 뜨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