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무탈하게 잘 지냈지요. 그런데 빙루를 치료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을 터인데 급히 저를 찾아온 연유라도 있으신지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하하, 아닙니다. 치료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 제게 부탁하실 일이라도...”
“부탁은 아니고 빙루의 1차 치료가 마무리되어 중간에 시간이 남아 이리 들렀습니다. 빙루는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해야 2차 치료를 할 수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시간이 남아서 말인데 저번에 제게 부탁하신 일을 해드리려고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부탁했던 일이라면 빙궁의 여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는 말씀이신지?”
“그렇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처녀성이 깨진 설후궁주님의 빙백신공이 더욱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알 수는 없으나 지극한 환대를 받은 마당에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해서 이리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끝을 흐리는 비담이었다. 궁주는 비담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난색을 표하자 그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뒤에 말을 재촉하였다.
“왜 그러십니까?”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제가 도색성 길천 어르신의 무공과 색공을 이어받은 전인이 맞기는 하오나 워낙에 특별한 방법을 통해 그것들을 익힌 터라 실전된 부분도 있고, 당시 길천 어르신께서 빙궁을 방문한 연후에 창안하신 기술도 있어 빙궁의 여인들에게 혹여 부작용이나 해를 끼칠까 저어되어 많이 망설여집니다. 궁주님의 생각은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부작용이 심각한 것입니까?”
“기대를 많이 하고 계셨을 궁주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무척 송구스럽군요. 아직 정확한 부작용은 확인된 것이 없으나 쾌락의 강도가 매우 높아진 대신 무공을 회복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지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최악의 경우 무공이 전보다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도색성 길천 어르신께서 사용하셨던 색공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이런 사단이 벌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아쉽게도 그 부분은 실전이 되어 제가 익히지를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런 일로 죄송해하시면 오히려 듣는 제가 미안해지니 거두어주십시오. 그럼 지극한 쾌락을 얻는 대신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는 말씀인데 혹시 더욱 무공이 고강해질 수도 있는지요?”
“물론입니다. 큰 위험부담을 감수한 만큼 희박한 확률이기는 하나 엄청난 혜택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종의 도박인 셈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보니 처음부터 궁주님과 교합을 하는 것이 선뜻 내키지가 않는군요. 만에 하나 궁주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궁 전체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자신과 궁의 안위를 배려해주는 비담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나소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사의를 표했다.
“공자님께서 그토록 궁을 아껴주시니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공자님의 뜻에 따를 것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해주십시오.”
“궁주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군요. 그럼 제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궁주님께서는 위치가 위치인 만큼 먼저 실험을 하실 것이 아니라 궁의 다른 여인들을 상대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일종의 실험대상을 구하는 셈이지요. 허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여인들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지원한 여인들에 한해 일을 진행할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염천에 궁의 여인들을 모두 모아주십시오. 제가 나서서 이와 같은 정황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자원할 사람을 모은 연후에 교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염천에서 교합을 하는 동안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나머지 여인들은 궁주님께서 모두 데리고 궁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저는 마음 편하게 교합을 하는 동안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공자님의 원대한 계획과 은혜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한달음에 달려 나가는 나소희였다. 비담은 그런 궁주의 뒷모습을 보며 비릿하고 쓸쓸하게 웃고 말았다. 궁에 속한 여인들이 망가지든 말든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저런 년을 우두머리로 앉혀놓은 빙궁의 현실이 암담하여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썩은 미소였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 궁주는 손수 비담을 염천으로 안내하였다. 염천으로 다가갈수록 열기가 더해지며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비담이었다. 염천에 당도하자 100여명에 달하는 빙궁의 여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비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주에게 살짝 언질을 받았는지 기이한 욕망이 저마다 꿈틀대는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여인들을 둘러보던 비담의 눈이 순간 부릅떠지고 말았다. 여인들 너머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는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염천의 가운데 조그마한 섬이 솟아 있었고, 물건은 그 섬의 가운데에서 찬연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비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자신을 부르는 듯 손짓하자, 강한 끌림에 이끌려 한걸음씩 물건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그런 비담의 행동을 조용히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바로 궁주 나소희였다.
“호호, 당연히 공자님의 손에 들어갈 보물이니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것이?”
“맞습니다. 저것이 바로 화류선이지요. 초하련 궁주님께서 저곳에 부채를 꽂아놓으신 이후 수백 년 동안 빙궁의 여인들은 목숨을 걸고 저것을 지켜내었지요. 이제 그분의 후인이 나타났으니 의당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맞겠으나 그 전에 저희들의 정성과 노고를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초하련 궁주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으로 부채의 진정한 주인만이 저것을 뽑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의 약조를 먼저 지켜주신 연후에 공자님께서 부채를 뽑으시면 됩니다. 공자님께서 그분의 전인이라면 별 무리 없이 부채를 손에 넣으실 것입니다.”
비담은 완강하게 버티는 궁주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괜히 지금 나섰다가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화류선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큰 결례를 범할 뻔 했군요. 경거망동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주인을 부르는 소리에 당연히 끌리셨겠지요. 다 이해합니다. 다만 노파심에 저희들의 노고를 먼저 보살펴 달라 청한 제가 더 면목이 없지요.”
“소중한 보물을 보살피고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궁주님의 말씀대로 그에 대한 보답을 드리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각자의 목적을 숨긴 채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이었다. 비담은 화류선에는 일절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모여 있는 여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바쁘신 와중에 이렇듯 한 자리에 모여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모두 모이게 한 이유는 저와 동침을 할 지원자를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궁주님께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300년 전 설후 궁주님과 운우지락을 나누셨던 길천 어르신의 전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월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그분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길천 어르신께서 설후 궁주님과 합궁을 한 이후에 창안하신 검증되지 않은 기술들도 있습니다. 그로인해 혹여 여러분과 동침을 하였을 때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초래될 수도 있기에 걱정이 되어 이렇듯 나선 것입니다.”
비담의 말에 여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웅성웅성 떠들었다. 부작용이 있다는 비담의 말이 전해준 파급효과는 예상보다 막강했다. 그 중 용기를 낸 여인 하나가 손을 번쩍 들더니 비담에게 말했다.
“화류선의 주인께서는 부작용에 대해 소상히 말씀해주십시오.”
“음,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저도 무척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을 전해야 나중에 생길 부작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에 저로써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양해해주십시오.
부작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설후 궁주님께서는 길천 어르신과 합궁을 한 후 1년 만에 무공을 회복함과 동시에 더욱 높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저와 동침을 한 후 얼마 만에 무공을 회복하실지 장담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부작용입니다. 짧게는 1년이 걸릴 수도 있고, 길게는 10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두 번째 부작용입니다. 심할 경우 무공이 회복되지 않고 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저야 최선을 다해 색공을 시전 할 것이나 워낙에 실전된 부분이 미묘한데다 섬세하게 다뤄야 할 부분이 많아 선택의 폭이 넓지 않습니다.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후반부의 기술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화류선을 지켜주신 여러분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은 저의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이런 현실을 감안하시어 현명한 선택을 해주십사 부탁을 드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제 선택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지극한 쾌락을 얻음과 동시에 희박한 확률에 도전할 것인지, 아니면 이런 부작용을 감안하여 그냥 물러설 것인지를 말입니다.”
기대로 한 달 내내 설레었던 여인들의 가슴에 비담은 시원하게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여인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갈팡질팡 서로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담은 차분한 마음으로 여인들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에 결정을 내렸는지 용감하게 손을 든 첫 번째 지원자가 나섰다.
“저는 공자님을 믿겠습니다. 설사 희박한 확률이라고는 하나 도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담은 손을 번쩍 든 여인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호오,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찬 첫 번째 희생양이로구나. 그렇게 경고를 했음에도 고강한 무공을 얻어 한바탕 휘젓고 싶다 이거지? 좋다. 소원대로 해주마.’
속내와는 달리 비담은 존경의 눈빛을 가득 담아 지원한 여인을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