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54)

43화

빙루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공자님께서 저를 치료해 주셨나요?”

“그렇습니다. 부족한 실력이긴 하나 아가씨의 상태가 워낙 위중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치료를 하였지요.”

“빙궁은 금남의 구역이라 알고 있는데 어찌 이곳까지 들어오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하하, 화류선을 찾겠다고 하니 그냥 들여보내주던 걸요? 태어나 이처럼 지극한 환대는 처음 받아보았습니다.”

“예? 화류선의 주인이셨습니까?”

화들짝 놀란 빙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려 하였다. 그동안 빙궁의 고위인사들에게 어떤 언질과 교육을 받았는지 반사적으로 취하는 행동이었다.

“빙루가 삼가 화류선의 주인을 뵙습니다. 저를 치료해 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런지 모르겠사옵니다.”

빙루의 급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비담이 서둘러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이제 기력을 회복하신 것 같으니 저와 대화를 좀 나눠볼까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비담을 멀뚱히 쳐다보던 빙루가 자세를 바로한 채 고개를 숙였다.

“무엇이든 하문하십시오. 성심을 다해 은공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쩝, 뭐 은공이라 하시면 제가 면이 서지를 않는데. 아무튼 그게 편하시다면 호칭이야 그냥 넘어가죠. 그나저나 어찌 빙궁에 오셨는지 여쭤 봐도 실례가 안 될 런지요? 궁주에게 듣기론 역병에 부모님을 모두 여윈 당신이 불쌍하여 데려왔다고 하던데...그게 사실입니까?”

“궁주가 은공께 그리 말하던가요?”

빙루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날조했다고는 하나 화류선의 주인에게까지 그리 말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비분강개한 빙루의 반응에 비담은 옳거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까?”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입니다. 제가 12살이 되던 해에 마을에 역병이 돌아 마을사람들 태반이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저희 부모님께서도 역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계셨지요. 하지만 천운인지 부모님께서는 점점 회복을 하셔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 궁주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이 나타나 부모님과 마을의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죽였습니다.

한 폭의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잔인한 장면에 충격을 받은 저는 그만 혼절을 하였고, 그 후론 깨어보니 이곳이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으나 마을 사람들 모두를 죽이려고 찾아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정말 그녀들은 지옥에서 막 튀어나온 야차보다도 무서웠습니다.”

당시의 악몽을 되살리며 빙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의 목숨은 취하지 않고 여기로 데려와 보살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빙궁의 목적이 마을사람들 전부의 말살이라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혹시 은공께서는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저를 치료하기 위해 그녀들이 어떤 언질을 주진 않았나요?”

“그것은 당신이 구음절맥이란 희귀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충격으로 혼절하면서 병을 얻은 것 같습니다. 얄궂게도 부모님을 잃고 얻은 그 병으로 인해 여태 목숨을 보존하신 겁니다.”

“구음절맥이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빙루를 보며 비담은 궁주의 의도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초하련 궁주처럼 빙루 역시 살인병기로 키우려는 시커먼 궁주의 의도를.

“정확히 말씀드리면 구음절맥과 비슷한 증상의 병입니다. 단순히 혈맥이 막혀 생긴 병으로 크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12년이란 세월동안 억지로 침상에 누워 보내야 했기에 기력이 많이 쇠했던 것일 뿐입니다.

후후, 빙궁의 궁주는 다시 한 번 날개를 달고 싶었겠으나 그녀의 무지몽매한 계획은 한바탕 꿈이었음을 곧 깨달을 것입니다.”

“은공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냥 혼잣말을 한다는 것이 당신의 심기를 어지럽혔군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비담은 길천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하여 빙루에게 들려주었다. 비담의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빙루는 자신을 살인병기로 이용하려 했다는 궁주의 의도에 몸서리를 쳤으나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만약 진짜 구음절맥이란 희귀병에 걸리고 은공이 그러한 내막을 모르고 자신을 치료하였다면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무림에 벌어졌을 것이다.

250년 전의 그날처럼. 설산검후(雪散劍后) 초하련의 또 다른 별호는 설혈귀(雪血鬼)이기도 하였으니까. 설산검후 초하련은 죽기 한 달 전, 의문의 폭주와 함께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지나는 길을 모두 시산혈해로 만들어 버렸었다.

다행히 은거기인들이 폭주하는 그녀를 빨리 제압하여 흉흉한 소문은 돌지 않고 마무리되었으나 무한 지방에 살았던 빙루는 누구보다 자세히 그러한 끔찍한 전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우는 아이도 멈추게 한다는 설혈귀의 전설을 말이다.

비담의 상단전에서 자신의 딸이 말년에 그와 같이 미쳐 날뛰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전해들은 길천은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아마도 세뇌의 부작용으로 인해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으리라. 비담 역시 설혈귀의 전설을 처음 접한 터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길천이었다.

침통한 표정의 비담을 향해 빙루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저 설혈귀가 빙궁의 초하련 궁주라는 말을 했을 뿐인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제가 은공께 무슨 실수를 했나봅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노여움을 푸십시오.”

“아! 아닙니다. 당신 때문이 아니라 궁주를 비롯한 망할 년들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정말 나소희인지 뭔지 하는 궁주를 가만히 두면 안 되겠군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설혈귀의 이야기도 쏙 빼놓고 제게 들려준 것이 아닙니까. 정말 무림을 전복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끔찍한 계획을 세울 순 없습니다. 그런 부작용을 알면서도 뻔뻔한 얼굴로 내게 치료를 부탁하다니.”

비담이 무서운 얼굴로 주먹을 그러쥐자 그의 안위가 걱정이 된 빙루가 말리고 나섰다.

“은공?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십시오. 궁주를 비롯한 그녀의 친위대는 무공이 정말 막강하고 잔인할 정도로 무섭습니다. 은공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나 혼자의 힘으로 그녀들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옵니다.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 훗날을 도모하시는 게 현명한 방법이옵니다.”

“아닙니다. 썩은 나무는 뿌리까지 완전히 없애야만 숲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법. 설후가 남겼다는 기록부터 궁주를 비롯한 모든 재앙의 뿌리를 제거해 버리겠습니다.”

“하, 하오나?”

“당신이 무얼 걱정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있고, 저들은 무방비한 상태에서 뒤통수를 맞을 것이니 승산이 높습니다. 그나저나 당신의 거취가 걱정이군요. 제가 한바탕 빙궁을 들쑤셔 놓으면 평범한 당신이 이곳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저, 저기 외람된 부탁이오나 혹시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저를 데리고 나가주시면 안 될까요? 부모를 죽인 원수들과 함께 지낼 수는 없사옵니다. 은공께 짐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니 부디 저를 데리고 나가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은공.”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당신을 데리고 나갈 것입니다. 추후 당신의 결정을 존중하여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약조를 해주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무조건 하겠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한 편의 연극을 통해 월척을 낚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미끼가 필요한 법이지요. 제가 모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처녀의 몸으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어렵겠지만 저들의 염탐꾼이 와있는 동안 거짓으로 교합하는 척 신음소리를 내주십시오. 가능하겠습니까?”

“성심을 다해 신음소리를 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사냥감을 물색하고 등급을 정해 썩은 부분을 도려냅시다.”

비담은 빙루를 치료하는 것처럼 연극을 꾸며 시간을 벌었다. 가끔씩 일의 진행을 살피기 위해 궁주의 친위대가 귀를 기울였지만, 그때마다 신들린 듯 연기를 하는 빙루로 인해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번 비담은 빙루의 입을 통해 궁주를 비롯한 악질적인 그녀의 친위대 목록을 작성하고 옆에다 살(殺)이라고 표시하였다. 길천과 빙루를 봐서라도 그녀들을 용서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죽음의 명단 작성이 끝나자 비담은 길천과 상의를 하였다. 죄질은 약하지만 색정에 눈이 먼 여인들의 처리가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 무공이 높아졌다는 설후의 기록만 맹목적으로 믿는 어리석은 여인들이었다. 무지 밝히는 여인들이기도 하였고.

장시간 상의를 한 끝에 비담은 ‘천와주’를 시전하기로 길천과 합의를 보았다. 함부로 목숨을 취할 수는 없었기에 순음지기를 깨서 잠재적 화근을 미리 뿌리 뽑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계획이 갖춰지자 드디어 웅크리고 있던 비담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표는 잠재적 화근의 제거였다.

근 한 달여 만에 궁주와 마주앉은 비담이 웃으며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