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흔쾌히 승낙을 한 나소희가 비담과 함께 음봉각으로 향했다. 궁주를 따라 나선 비담은 길천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궁주 앞에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을 이용해 궁주가 어떤 음모나 계략을 꾸미고 있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어찌 보면 궁주 역시 설후가 남겨놓은 그릇된 기록에 의거하여 이번 일을 계획했을 것이니 그녀 역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설후라는 궁주가 뿌려놓은 것이지 후인들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음봉각에 도착한 비담은 궁주의 소개로 구음절맥에 걸렸다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파리한 안색에 병색이 완연한 것이 딱 봐도 그냥 환자였다. 어째서 길천이 300년 전 초하련 궁주에게 측은지심을 가졌었는지 이해가 되는 비담이었다.
“이 아이가 바로 구음절맥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빙루(氷淚)입니다. 제가 12년 전 무림에 나갔을 당시 역병이 창궐했던 호북성 무한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떠돌던 빙루를 거두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우선 데려왔으나 구음절맥에 걸렸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고, 그 외에 이름이나 나이, 다른 신상명세를 하나도 몰랐기에 그냥 빙루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병은 점점 더 깊어져 이제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부디 공자님께서 그 분의 후인이라면 이 아이의 천형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으음, 궁주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 여인의 처지가 정말 참담하군요. 역병에 부모를 모두 잃은 것도 견디기 힘들었을 터인데 거기에 천형의 굴레까지 짊어져야 하다니.”
“치료가 가능하겠습니까?”
“잘은 모르겠으나 조금 더 살펴본다면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제가 필요한 것들은 추후 궁주님께 도움을 청할 것이니 우선은 둘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음봉각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출입을 철저해 통제해주시기 바랍니다. 궁주님도 알다시피 치료과정 자체가 조금 화끈한 터라...”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궁주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두 볼이 발갛게 물들더니 모기만한 소리로 비담의 요구조건을 수락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음봉각에 출입하는 궁의 제자들은 제가 철저히 단속할 것이니 염려 놓으시고 치료해 주십시오. 빙루의 목숨은 이제 공자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럼 공자님께서도 100일의 시간을...?”
“아닙니다. 구음절맥에 걸렸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개개인의 상태나 체질에 따라 여인들마다 치료의 시간은 다릅니다. 그것도 나중에 제가 보고를 드릴 것이니 지금은 그만 물러가 주십시오. 한시가 급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럼 공자님만 믿겠습니다.”
황급히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궁주의 뒷모습을 보며 비담은 어이가 없었다.
‘허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제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상상하며 볼이 빨갛게 물드는 사부라니. 이놈의 집구석도 제대로 돌아가는 건 아니구나.’
고개를 좌우로 흔든 비담이 빙루의 모습을 살피며 길천에게 의념을 전달했다. 빙루는 죽은 듯 침상에 누워있었기에 강신귀공을 운용해도 별 무리는 없어보였다.
‘형님? 초하련 궁주의 증상과 여기 빙루의 증상이 같습니까? 정말 구음절맥에 걸린 여인입니까?’
‘음, 구음절맥에 걸린 여인이 맞구나. 헌데 한 가지 하련이와 다른 것 같은데...’
‘그게 무엇입니까?’
‘이 아이는 타고난 구음절맥이 아닌 것 같구나. 얼핏 보기에도 하련이와는 차원이 달라.’
‘예? 차원이 다르다고요?’
‘그래. 하련이는 선천적으로 순수한 음기가 강했고, 체내에 가득하여 구대혈맥이 막혀있는 상태였지. 그래서 오성은 뛰어났으나 몸은 말도 못할 정도로 유약했고 절명할 운명이었지. 허나 저기 누워있는 저 아이는 후천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혈맥이 막혀있는 상태란다. 보기엔 혈색이 안 좋아 보여도 절명할 팔자로는 안 보여.’
‘정말이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후천적으로 구음절맥에 걸릴 수도 있는 거예요?’
‘당연히 걸릴 수 있단다. 궁주의 말대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 울분과 슬픔에 혈맥이 막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로 인해 혈맥이 막혀 구음절맥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 거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련이의 절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라는 거지.’
‘그럼 치료방법도 훨씬 간단하겠군요?’
‘하련이에 비하면 저 아인 치료할 것도 없는 상태야. 겉으로 보이는 증상은 같으나 병의 뿌리는 완전히 다르니까 네 녀석의 내공을 이용하여 막힌 혈도만 뚫어주면 정신을 차리고 곧 일어날 것이다.’
‘그럼 이 같은 정황을 궁주는 몰랐단 말이에요? 그 정도의 고수가 어찌...’
‘사람이란 족속이 원래 그런 거란다. 아무리 날고 기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 욕심에 취하면 두 눈과 두 귀가 머는 것은 물론 머리 역시 자신이 믿고자 하는 방향으로만 생각을 진행시키지. 아마도 궁주는 저기 누워있는 아이가 구음절맥에 걸린 아이라 철썩 같이 믿고 싶었을 것이고, 만약 운이 하늘에 닿아 나의 무공을 전수받은 전인이 자신의 대에 찾아온다면 무림을 호령할 수 있다는 멍청한 꿈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럼 형님 말대로 저 여인을 깨우면 모든 내막을 들을 수 있겠네요.’
의념을 접은 비담이 서둘러 빙루에게 다가가 맥을 짚기 시작했다. 한 줄기 자신의 내공을 여인에게 밀어 넣어 막힌 혈맥을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음,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없어. 아마도 충격으로 혈맥이 막힌 이후 궁주에 의해 바로 빙궁으로 끌려와 죽은 듯 누워있었던 모양이야. 그나저나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긴 하나 12년 동안 이렇게 누워있는 여인을 보살핀 정성이 대단한데.’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혹여 약해질 대로 약해진 빙루의 혈맥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비담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무려 한 시진(2시간)에 걸쳐 진맥을 마친 비담이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막힌 혈맥을 모두 찾아내었다.
“휴우, 예상보다는 혈맥이 많이 상해있지 않아 다행이구나. 앞으로 사흘의 시간이면 충분히 막힌 혈맥들을 뚫을 수 있겠어.”
비담은 다행이란 표정으로 죽은 듯 누워있는 창백한 빙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이곳까지 끌려와 저리 누워있는지는 몰라도 길천이 초하련 궁주를 사랑했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어 자신 역시 정성을 다해 저 여인을 치료해주고 싶었다.
사흘 후.
비담의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본시 구음절맥과 비슷한 증상만 보였을 뿐 치료 자체가 난해한 중병이 아니었기에 이변이 없는 한 빙루는 오늘 깨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거기에 약해진 기력만 보충한다면 수개월 내로 다시 평범한 자신의 삶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으음!”
다시 혈색을 되찾아 발그레한 빙루의 입술을 비집고 미약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빙루가 깬 것을 확인한 비담 역시 사흘간 한숨도 못자 붉게 충혈 된 눈을 들어 조금씩 가쁜 숨을 몰아쉬는 빙루를 응원하였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린 빙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물었다.
“누, 누구시죠?”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은 많이 쇠약해진 몸부터 돌보십시오.”
“혼절한 기억밖에 없는데 제가 며칠이나 누워있었나요?”
“하하, 그것 역시 차차 알게 될 것이니 그만 묻고 한숨 더 주무십시오.”
빙루는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비담이 시키는 대로 다시 눈을 내리 감았다.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숨소리를 내뱉는 빙루의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비담은 마지막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의식을 회복한 빙루의 모습을 확인하자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 기대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고 먼저 잠에서 깬 빙루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자신의 침상에 기대어 잠이 든 비담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성이 자신의 침실까지 들어온 것도 의문이었고, 이제는 죽는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생명이 아직 붙어 있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순간 삶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렸는데. 이렇듯 깨어나니 다시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구나. 그나저나 쓰러진 저분께서 내 생명을 구해주신 것 같은데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곤히 잠든 분을 깨워 물어볼 수도 없고.
휴우, 내게 힘이 있었다면 궁주를 비롯한 파렴치한 년들을 모두 잡아 죽이련만. 하늘에 계신 부모님을 뵐 낯이 없구나. 그래도 이리 건강을 되찾았으니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일러. 오늘과 같은 기적을 또 바랄 수는 없겠지만 분명 노력한다면 좋은 방법이 생길 거야.’
입술을 앙다문 빙루의 표정이 사뭇 비장해 보였다.
빙루가 회한을 곱씹으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무렵.
곤히 잠들었던 비담이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하암!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이거 간호를 한다는 것이 함께 잠이 들고 말았네요.”
비담은 곤히 잠들고 만 자신의 모습이 멋쩍었던지 머리를 긁으며 딴청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