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예? 정말이요? 하지만 빙백신공인가 거시기인가는 처녀성이 깨지면 안 된다면서요?”
“길게 설명하면 복잡하단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니미, 내가 그년을 안고나서 얼마나 눈물을 훔쳤는지...소매가 젖지 않은 날이 없었지. 사실 동침을 해서 그년의 목숨을 구해준 게 나였거든. 망할 년이 무공은 엄청 강한데 강호 경험이 일천해서 최음제에 당해 해롱거리다 겁탈을 당하려는 순간 내가 구해준 거야. 절대 내가 자의로 덮친 게 아니라고. 헌데 나중에 깨어나 보니 자신의 무공이 깨졌다며 책임지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내 앞에서 목숨을 끊겠다며 협박을 하였지. 당시 나는 중요한 볼 일이 있어 그럴 수 없다며 사정을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쫓아다니며 나를 협박하고 괴롭혔지. 은혜를 원수로 갚은 파렴치한 년이었어.
그러다 나는 반포기를 하고 알아서 하라며 내버려두고 볼 일을 보고 돌아다녔는데 그러다 구음절맥에 걸린 하련이를 만나게 되었단다. 하련이의 처지에 측은지심이 생긴 나는 하련이를 의붓딸로 거두었고, 어떻게든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 하지만 방법을 찾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을 뿐더러 무공을 모르는 둘을 데리고 돌아다니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단다. 그래서 우선은 설후 그 년을 설득해서 하련이를 빙궁에 맡겨놓은 거야. 내가 반드시 방법을 구해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정말이요? 검의 여제라 불렸던 초하련 궁주가 형님의 딸이라구요? 헌데...100일간의 동침은 그럼...헉!”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비담의 영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길천은 비담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너 같으면 의붓딸이어도 엄연히 내 딸인데 100일간 동침을 했겠냐?”
“그, 그렇죠? 아니죠?”
“당연하지. 그래서 내가 날조되었다고 한 거야. 망할 년들이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려고 말이야. 아마도 너를 단순히 나의 후인으로 여기고 그런 망발을 늘어놓은 모양인데 어림없는 수작이지. 버젓이 너의 상단전에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해줄 내가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이번 일을 꾸민 거야. 하여튼 옛날부터 하는 짓들이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럼 어째서 100일 간 동침을 했다 기록해 놓았을까요?”
“설후 그 년의 속 좁은 복수지. 내가 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나중에 찾아오는 나의 전인에게 엿을 먹이려는 수작으로 그런 꼼수를 부린 거야. 나는 단순히 치료를 하기 위해서 100일간 하련이와 함께 머물렀을 뿐이야. 솔직히 말해 딸아이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물론 치료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으로 알몸을 보기는 했지만 그 어떤 불순한 감정도 들지 않았어. 하련이는 정말로 소중한 내 딸이었으니까. 부평초처럼 때로는 바람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나에게 처음으로 아버지라 불러준 아이였으니까. 흑흑.”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감정이 복받쳤는지 길천의 원영신이 칙칙한 빛으로 물들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비담이 다가가 길천의 손을 잡아주며 토닥거려 주었다.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정말 죄송해요, 형님.”
길천이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르고 비담의 영체를 고맙게 바라보았다.
“사실 자네가 이곳에 오겠다고 했을 때 강하게 말리지 않았던 이유는 설마 300년 전의 비사를 저들이 기억하겠냐는 안일한 생각과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강한 열망 때문이었어.”
“무엇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으셨는데요?”
“100일간 하련이의 치료를 하며 나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네.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치료에 매진했거든. 그런데 3년이란 시간동안 설후도 그 아이에게 나 못지않은 감정을 품었던 게야. 그래서 나에게 제안을 하더군. 함께 모두 모여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자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네. 아니 솔직히 그러기가 싫었네. 하련이와 둘이 천하를 주유하며 살다가 정착하고 싶었어. 설후는 집착과 욕심이 무서울 정도로 강한 여인이라 솔직히 정이 가지 않았었거든.
그런데 내가 계속 망설이며 대답을 안 하자 이번에는 하련이를 걸고넘어지더군. 자신도 하련이를 딸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 빼앗길 수 없다는 거였어. 심지어는 하련이와 나를 죽이고 빙궁도 모두 파괴시켜 버리고 자신도 따라 죽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지.
당시 나는 내공이 바닥난 상태였기에 눈물을 삼키며 혼자 빠져나왔다네. 하련이와 함께 도주할 힘이 내게는 없었거든. 훗날을 기약했던 것이지. 하지만 설후가 하련이에게 어떻게 세뇌를 시켰던 것인지 하련이의 기억 속에서 나와 설후는 부부로 설정되어 있었고, 가족들을 팽개치고 주색잡기에 여념 없는 짐승만도 못한 아비로 기억하더란 말일세.”
“이상하네요. 초하련 궁주가 치료과정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던 것입니까? 하지만 제가 아는 상식으론 구음절맥에 걸린 사람은 반대급부로 엄청난 오성을 지닌 천재들로 알고 있는데 일방적으로 설후의 말만 믿는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후후, 그러니 설후 그 년이 요망하다는 것이네. 자신의 욕심과 집착을 채우기 위해 하련이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었거든. 자신은 사랑이라는 말로 근사하게 포장하였네만 내가 볼 때 그것은 더러운 욕망의 집합체일 뿐이었어. 하련이의 기억을 조작해 놓은 거지.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으나 단순히 싸움만 하는 도구, 즉 살인병기로 하련이의 미래를 전락시켜 버린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나는 믿고 싶었네. 이지를 상실한 하련이가 나와의 짧았던 추억을 기억해주기를. 따뜻하게 아버지라 불러주었던 그 모습을 잊지 않았기를. 화류선이 이곳 빙궁에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설마 하면서도 하련이가 나를 추억하며 이곳에 보관해 놓았다고 믿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하련이에게 추악한 아버지가 아닌 진정한 아버지였음을.”
길천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비담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늘 밝은 모습의 길천에게 저렇게 가슴을 후벼 팔정도의 아픈 과거가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고, 절절한 외침 속에 녹아있는 한 가닥 기대의 끈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듬어주고 싶었다.
아마도 길천은 정신을 되찾은 초하련 궁주가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화류선을 거두어 보관했다 믿고 싶었던 것이리라. 후인을 기다리며 또 한 번 무림을 뒤흔들 희생양을 만들 빙궁의 더러운 음모가 아니길 믿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런데 형님?”
“응?”
“처녀성을 잃은 궁주가 1년 후에 무공을 다시 되찾았다고 하던데 그건 사실입니까?”
“그건 사실일세.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내 정기를 왕창 빼앗기고 말았어. 그래서 설후 그 년의 행동이 더욱 괘씸했는지도 몰라. 난 모든 걸 희생해가며 지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 더 달라고 칭얼대기만 하니 내가 예뻐 보였겠는가?”
“형님의 정기만 빼앗겼다고요?”
“그렇다니까. 아마도 중독된 최음제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하련이의 일로 미처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네.”
“그렇군요. 그럼 형님말대로 라면 제가 이곳의 여인들과 동침을 하면 그녀들의 무공이 깨진다는 소리 아닙니까? 당시의 궁주가 최음제에 중독되어 그와 같은 기연을 만난 것을 이곳의 여인들은 모르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그럴 거야.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설후가 그렇게 기록을 한 모양인데 만약 이곳의 여인들이 자네와 동침을 해서 순음지기가 깨어져나간다면 무공을 잃어버리고 말걸세.”
“하하, 그렇다면 제가 귀빈이 아니라 재앙이었군요.”
“저들에겐 그런 셈이지. 그래서 설후가 요망한 거야. 자신의 욕심에 눈이 멀어 빙궁을 한 순간 무림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는 끔찍한 기록을 자랑삼아 남겼으니까.”
“그건 그렇고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어요. 왜 나중에 다시 초하련 궁주를 데리러 오지 않았습니까? 내공을 회복한 연후에 말입니다.”
“왜 안 왔겠는가? 하지만 어느새 빙궁의 후계자가 되어 이지를 상실한 채 무작정 덤비는 하련이를 상대로 무공을 펼칠 수는 없었지. 가슴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네. 비릿한 설후의 비웃음만이 나를 배웅하더군.”
“죄송합니다. 계속 형님의 가슴만 아프게 하는군요.”
“아니야,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상처와 아픔이 이번 일을 계기로 자네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어 조금은 아무는 것 같으이. 내 걱정은 하지 말게. 그나저나 이제 어쩔 생각인가?”
“당연히 빙궁의 여인들을 건드리지 말고 부채만 찾아 돌아가야지요. 초하련 궁주가 형님의 딸이었음을 안 이상 함부로 그분의 후예를 건드릴 순 없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있네요.”
“그게 뭔가?”
“궁주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다며 구음절맥에 걸린 아이가 한 명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녀가 계속 마음에 걸리네요.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후후, 우연은 개뿔. 모르긴 몰라도 아마 계속 구음절맥에 걸린 아이를 대대로 찾아다녔을 것이네. 신비방파라고는 하나 이런 세외에 찌그러져 지내는 문파에서 천하제일인을 배출했다는 달콤한 전례가 있는 이상 쉽게 그 유혹을 떨쳐버리긴 힘들지. 구음절맥을 치료하는 방법은 내가 자세히 알고 있으니까 우선은 그 아이를 한 번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네. 만약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에 끌려왔다면 치료를 해주고 함께 돌아가 아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도록 하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 이미 세뇌를 당했다면 그저 절맥만 치료하고 빙백신공을 익힐 수 없도록 순음지기를 부셔버리게. 그릇된 욕심으로 인해 무림에 또 다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자네도 원치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은 그 아이를 만나보고 결정하면 되겠군요.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저는 이만 물러갈 테니 조금 안정을 취하시고 쉬십시오.”
“담아?”
“네?”
“고맙다...”
“참, 형님도. 별 말씀을 다하시네요.”
손을 휘휘 내저은 비담이 길천의 눈빛을 피해 서둘러 육신으로 돌아갔다. 오고가는 눈빛 속에 천 마디의 말보다 더 깊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니까.
육신으로 돌아온 비담은 궁주인 나소희를 불러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궁주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기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염천에 가기 전에 구음절맥에 걸렸다는 아이를 먼저 만났으면 합니다. 무작정 치료를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요. 우선은 상태를 살펴본 후 치료를 시작할 지의 여부를 결정할 것이니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공자님께서 치료를 해주시겠다는데 무얼 더 망설이겠습니까. 구음절맥에 걸린 아이는 지금 음봉각에 머물고 있으니 저를 따라 오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