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54)
  • 39화

    평소엔 차분하고 사리분별력이 뛰어나신 분이 꼭 여동생의 일과 연관이 되면 쉽게 흥분하고 마치 딴 사람이 된 듯 행동하였다.

    크게 가슴을 쓸어내린 대원들은 오열하는 주인의 손에 큼지막한 은자 열 덩이를 쥐어주더니 금세 구인철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비담은 자신으로 인해 낙양이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것도 모른 채 드디어 열흘 만에 북해의 언저리에 도착하였다. 비교적 상세히 알려준 이성보 덕분에 헤매지 않고 곧장 당도할 수 있었다.

    “흐음, 오지게도 춥구나. 나야 뭐 한서불침의 몸이라 상관은 없지만. 그나저나 경치 하나는 끝내 주는구먼.”

    하얗게 펼쳐진 설원을 보며 비담은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경치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비담의 감각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여러 개의 기운이 잡혔다.

    “호오, 마중까지 나오셨어?”

    잠시 후.

    눈처럼 하얀 백의를 입은 일단의 여인들이 나타나 칼을 겨눈 채 잔뜩 경계하며 비담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여기는 빙궁의 영역이다. 감히 금남의 구역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가 무엇이냐? 바른대로 말하여라.”

    “‘화류선’이란 부채 찾으러 왔습니다.”

    “헉!! 드디어...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뭣들 하느냐? 어서 궁주님께 보고를 드리거라.”

    “엥? 그냥 화류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뭐 다른 거는 안 물어보셔도 되요?”

    “필요 없습니다. 어서 서둘러라.”

    “흐음, 절차가 간소하고 빨라서 좋긴 하지만.”

    분분히 하얀 눈처럼 몸을 날리는 여인들을 감상하며 비담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로 바라보는 여인들 때문에 비담은 어디에 시선을 고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전쟁에 나갔다 십년 만에 돌아온 서방님을 기다리다 만난 아낙도 저런 눈빛과 표정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아무튼 화끈거림을 억지로 참으며 기다리기를 한 식경.

    일단의 여인들이 빛의 속도로 날아와 비담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하였다.

    “빙궁의 여인들이 은공의 후인을 뵙습니다.”

    공손하고 지극한 환대에 비담은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토록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백의를 걸친 중년의 미부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빙궁의 궁주로 있는 소설수(素雪手) 나소희라 하옵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궁으로 드시지요.”

    만년설도 녹여버릴 만큼 화사한 미소를 지닌 여인의 정체는 바로 빙궁주 나소희였다.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인 아니 잔인할 정도로 배척하는 빙궁의 여인들임을 감안할 때 직접 궁주가 나서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정말 파격적인 일이었다.

    비담도 어느 정도 빙궁에 대한 정보를 이성보의 입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잔뜩 긴장을 했던 것이 사실이라 쏟아지는 관심과 환영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곳을 찾은 목적이 화류선을 찾는 것이기에 나중에 길천이나 빙궁주 나소희의 입을 통해 자세한 내막을 듣기로 하고, 우선은 화류선이 잠들어 있는 빙궁으로 이동했다.

    끝없이 하얗게 펼쳐진 설원을 따라 한참을 걷자 주변의 경관과 교묘하게 어우러진 작은 둔덕이 보였다. 전혀 건물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언덕 아래에 바로 세외 신비방파인 빙궁의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극한의 오지이다 보니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던 신세계였고, 길천과 인연이 닿은 비담 역시 처음으로 밟아보는 미지의 세계였다.

    조그마한 얼음 문을 통과하자 아래로 향한 계단이 보였고, 그 계단을 따라 계속 내려가자 조금씩 주변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담은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여 구경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호오, 극한의 추위에 맞서 살아가는 여인들이라 여겼건만 지하에는 이토록 별천지가 있었구나.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정도 기온이라면 땅속에서도 제법 지낼 만 하겠는걸.’

    지하로 갈수록 끝없이 이어진 통로는 점점 넓어졌다. 그런데 지하로 내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수정이 동굴 곳곳에서 영롱하게 빛나며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해 주어 어둡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더불어 여기저기 동굴의 구석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한 비담이 궁주인 나소희에게 물었다.

    “저기 궁주님? 지하로 내려와 어두울 줄 알았는데 곳곳에서 빛나는 수정으로 인해 전혀 어둡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밖은 살을 애일 듯 추위가 몰아치는데 이곳은 마치 봄날이라도 되는 양 훈훈한 것이 저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김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호호, 공자님께서는 이곳이 처음이라 많이 궁금하시겠군요. 300년간 외부의 손님이 들어오지 않아 설명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설명할 기회를 주셔서 영광이네요. 공자님께서 예측하신대로 이곳이 훈훈한 까닭은 바로 ‘염천(炎泉)’이 있기 때문입니다.”

    “염천이요?”

    “그렇습니다. 자연의 조화로움은 실로 오묘하여 인간의 지성으로 판단하기엔 한계가 있죠. 음과 양은 본디 서로 조화를 이루어 균형을 맞추는 법. 극한의 냉기가 가득한 절지가 바로 이곳 북해입니다. 한쪽으로 편향된 극음지기를 순화시키기 위해 자연은 지하에 염천이라는 거대한 난로를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일반 온천에 비해 그 순도가 매우 높고 강렬하여 일반인들은 이용하기 힘들지만 이곳에 터전을 잡고 수백 년을 살아온 저희들에겐 정말 보물 같은 장소지요. 나중에 꼭 공자님을 모시고 갈 것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저기 하얗게 올라오는 수증기의 정체 역시 염천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 비밀이 숨어있는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벌써부터 따뜻한 온천욕이 기대가 되는군요.”

    “차차 아시겠지만 부채를 가져가시기 위해 염천에 몸을 담그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기 빛나는 수정은 ‘빙회석(氷廻石)’이라 불리는데 수천 년 동안 쌓인 극음지기가 이곳 염천의 열기와 압력에 의해 석화된 것입니다. 강도는 말할 것도 없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받아 서로 반사되어 저토록 영롱한 빛과 색을 내는 것입니다. 저것 또한 자연의 신비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몰론 유사시엔 적을 향한 가장 악랄하고 무서운 무기로 변하기도 하지요.”

    “무기요? 그럼 저기 매달려 있는 수천 개의 빙회석이 모두 함정이란 말씀이십니까?”

    “네, 무서운 함정으로 돌변하지요. 여태껏 한 번도 발동된 적은 없으나 아마도 빙회석이 모두 쏟아져 내리면 이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화경 급의 고수라 해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의 장소가 되는 것이지요. 빙회석은 검강으로도 벨 수 없는 강도를 지녔으니까요.”

    “호오, 정말 그 정도의 강도를 지녔다니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나저나 정말 한 번도 발동된 적이 없었나요?”

    “물론 300년 전, 은공께서 방문하셨을 때 발동 직전까지는 갔었지요. 일이 화끈하게 잘 마무리되어 나중에 유야무야 발동이 멈추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도색성께서 참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셨네요. 그 양반이 왜 여기까지 흘러들어와 무슨 일로 화끈한 마무리를 지었는지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헌데 저는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검강으로도 벨 수 없다는 빙회석을 도대체 무슨 수로 한꺼번에 떨어트린다는 것인지.”

    “호호호, 참 호기심이 많으시군요. 극비 중에 극비인 사항이라 함부로 발설할 수 없습니다. 허나 공자님께서 화류선의 진정한 주인이라 확인이 되면 모든 것을 가르쳐드릴 것이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십시오.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의 원리만 알고계신다면 매우 간단한 일이니까요.”

    비담은 고드름, 고드름을 입으로 되 뇌이며 궁주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가 확 밝아지며 큰 공동이 보였고, 그곳에 여러 개의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길을 따라 빙궁의 여인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비담이 지나가는 속도에 맞춰 깍듯이 절을 올렸다.

    “은공의 후인을 뵙습니다.”

    “화류선의 주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구국의 영웅이나 일국의 황제가 빙궁을 방문한다 하더라도 얼음의 여인들에게 이정도의 예와 존경을 받기란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빙궁의 주인인 궁주가 지나가도 이토록 극진하게 환대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빙신(氷神)’이 강림해야만 기대할 수 있을 정도의 환영인파와 예의였다.

    비담은 처음엔 낯설고 당황하였으나 점점 적응이 되고 내성이 생기자 수많은 여인들의 끈적끈적한 시선을 즐기며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여인들의 눈동자는 번들거리는 기대로 하나같이 몽롱하게 풀려있었다.

    여인들의 눈빛만 놓고 보았을 때 이러한 사태를 야기 시킨 장본인은 길천이 분명했다. 도대체 300년 전 어떤 분탕질을 쳐서 휘저어놓으면 여인들의 눈빛이 저렇게 풀리는지 궁금증만 더욱 커지는 비담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지나온 비담의 눈앞에 드디어 눈처럼 하얀 궁전이 나타났다. 궁주가 머무는 궁전답게 으리으리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혹한의 대지 그 아래에 이런 건물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비담도 믿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였다.

    비담은 궁전을 눈처럼 하얗게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마치 제 집이라도 되는 양 성큼성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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