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54)
  • 38화

    제 6 장 북해빙궁(北海氷宮)

    열흘 후.

    낙양의 풍화객잔에 머물고 있던 구인철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나선 흑천대원들을 기다리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2층에 앉아 바쁘게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실로 5년 만에 느껴보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떠올리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지며 구인철의 얼굴이 무섭게 찡그려졌다. 찻잔의 찻물이 파문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놈, 감히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어렵게 낙양까지 쫓아왔건만 그새 어디로 도망갔단 말이지. 잡히면 정말 곱게 데려가진 않을 것이야.”

    비담의 일정과 상관없이 무조건 자신을 피해 어딘가로 도망갔다 여기는 인철이었다. 차갑게 식은 찻물만큼이나 마음이 급속도로 차가워진 인철이 화를 삭이고 있을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흑천대원들이 하나 둘 풍화객잔에 들어섰다.

    객잔에 머물며 차를 즐기고 음식을 먹던 사람들은 살벌한 기도의 흑의남성들이 계속해서 들어오자 영문도 모른 채 바싹 긴장하며 서둘러 음식을 처리하고 자리를 피했다. 20명의 흑천대원들이 모두 모이자 넓었던 객잔의 2층은 텅 비어 버렸고, 오로지 구인철과 흑천대원만 남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영업방해를 했음에도 구인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두려움에 벌벌 떨던 점소이가 마지못해 다가왔다.

    “저, 저기 주문을 하시면 제가 신속히 내어 오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주문을 받는 점소이의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로 비장해보였다. 인철은 흑천대원들의 면면을 둘러보더니 짧게 주문하였다.

    “소면 20그릇.”

    “네? 아, 네.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조촐한 식사가 마무리되자 흑천대원들은 하나 둘 입을 열어 비담에 대한 정보를 인철에게 보고하였다.

    “비담은 열흘 전에 낙양을 떠난 것 같습니다. 낙양에 머물렀던 기간은 나흘 정도로 추정되며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 방문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나흘간의 행적은?”

    “첫날은 취선루의 도박장을 방문해 도박을 하였고, 황금 1000냥을 땄다고 합니다.”

    “도박?”

    “예, 대주님. 무슨 내막이 숨어있는지 모르겠으나 연속해서 큰돈을 걸었고 승승장구해서 그처럼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런 망할 새끼가. 자고로 남자는 술과 도박, 여자를 조심해야 하거늘 서희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도박에도 손을 댔다? 정말 가만두면 안 될 녀석이구나. 나중에 서희가 마음고생을 하기 전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놔야 되겠어. 계속!”

    “그렇게 도박을 하다 황금 600냥 정도의 손실을 보았고, 새로 투입된 여직원을 향해 희롱의 말을 건네 쫓겨났다고 합니다.”

    “어떤 말이냐?”

    “‘은은히 비치는 속옷의 색이 검은색인 모양인데 잘 어울린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뭣이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 대주의 모습에 대원들은 조용히 구인철의 눈치만 살폈다.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았는지 구인철이 다시 자리에 앉아 다음 보고를 재촉했다.

    “휴우, 5년 폐관을 하면서도 이런 시련은 없었건만.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계속하거라.”

    “첫날의 일정은 거기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대원은 보고가 끝났는지 자리에 앉았고 기다렸다는 듯 다른 대원이 일어나 비담의 다음 행적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는 취선루에서 사흘간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직원을 희롱했음에도 다시 취선루에 간 것을 보면 그곳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비밀이라...그게 뭐라 생각하느냐?”

    “아마도 낙양을 방문한 목적과 일맥상통할 것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취선루에 머물다 바로 떠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취선루를 족치면 되겠구나. 그전에 사흘간 뭘 하며 지냈다고 하더냐?”

    “그게 기녀들을 상대로 방중술을 전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방중술? 확실한 것이냐?”

    “확실하진 않사옵니다. 허나 녀석이 방문한 기간 동안 문을 닫은 적 없다는 취선루가 내부수리를 목적으로 하루 동안 문을 닫았다는 정황과 그 사이 기녀들의 방중술이 일취월장했다는 상황을 조합해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옵니다.”

    구인철의 앞에 있던 탁자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나갔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인철이 홧김에 내려친 것이다. 객잔의 기물이 허망하게 부서져 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객잔주인의 마음도 부서져 나갔다.

    “그럼 네 생각엔 녀석이 사흘 간 여인들과 뒹굴었다? 기술을 전수해 준다는 핑계로?”

    “그렇습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십중팔구 정확합니다.”

    “이런 개새끼가 있나. 도박으로도 부족해 기녀들을 옆에 끼고 희희낙락 사흘 동안 뒹굴며 여색을 탐했다? 도대체 그 녀석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럽구나. 서희 같은 아이를 팽개치고 도망가서 한다는 수작이 고작 도박과 계집을 탐하는 것이라니. 휴우, 그나마 술 쳐 먹고 깽판은 안 부려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나름 위안을 찾으려는 구인철을 향해 가장 끝에 앉아 있던 대원이 안절부절 못하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보고를 하였다.

    “저, 저기 대주님?”

    거듭된 보고에 정신이 붕괴될 정도로 무너진 인철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귀찮은 듯 물었다.

    “뭐냐?”

    “그, 그게 그것까지 한 것 같습니다.”

    “뭘 했다는 말이냐?”

    “술을 쳐 먹고 깽판을 부린 거 말입니다.”

    “뭐시라? 이런 우라질 개새끼가 보자보자 하니 구만리 같은 서희의 앞길을 막은 걸로도 부족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가며 하는구나. 나 말리지 마라. 잡히면 그냥 죽여 버린다.”

    “진정하십시오, 대주님.”

    20명의 대원들이 모두 덤볐음에도 불구하고 인철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길길이 날뛰며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부수는 인철의 행동에 객잔의 2층은 전쟁터처럼 변하고 말았다. 주인은 그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떨구었다.

    “대주님? 고정하십시오. 깽판을 친 대상을 들으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것입니다. 제발 고정하고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지금 도박에 여자, 술까지 쳐 먹고 깽판을 친 녀석의 만행을 듣고도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절대 그딴 녀석에게 안겨주기 위해 금이야 옥이야 키운 동생이 아니란 말이다. 저리 비키지 못해? 말리면 늬들도 다 죽는다.”

    “시봉세의 팽철영을 손봐주었답니다.”

    마지막 보고를 하던 대원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평소 차분한 모습의 대주지만 한번 꼭지가 돌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큰 사단이 벌어졌던 전례가 많았기에 극약처방으로 무작정 소리를 지른 것이다. 역시나 고함을 친 효력이 금새 발동하며 구인철이 탁자의 나무다리 하나를 쥔 채 그대로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방금 누구라 그랬느냐?”

    “손을 봐준 대상이 오정회에 속한 시봉세의 팽철영이라 그랬습니다.”

    “팽철영이면 하북 팽가의 소가주라는 그 망나니 녀석 말이냐?”

    “그렇습니다. 어찌나 호되게 당했는지 앞으로 두 달은 요양을 해야 칼을 쥘 수 있다고 하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하는 짓이 밉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는 있었구나. 그런 망나니를 손봐줄 정도면 영 맹탕은 아니었어. 아무튼 취선루로 가자. 여기 망가진 기물 값은 알아서 변상하도록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하태평으로 걸어 나가는 대주를 보며 대원들은 막내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정말 미쳐 날뛰는 대주는 통제 불능이었고, 자신들 스무 명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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