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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36/154)

36화

길천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팽철영과 같은 유형의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설프게 손을 보든 제대로 손을 보든 저런 유형의 사람은 꼭 후환을 남기는 법이었다.

특히나 명문가의 후광이라는 달콤한 열매에 길들여진 망나니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고 편견과 그릇된 사고방식을 마치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에 확실히 손을 봐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백약이 무효한 게 현실이기는 하였지만.

길천은 답답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팽철영의 머리채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항복하려고? 에이, 싱겁게 그러지 말고 좀 더 버텨봐. 사나이는 모름지기 강단이 있어야 대접을 받는 거야. 아직 서너 군데 뼈가 더 부러져야 끝날 거니까 기대하라고. 그리고 왜 아가씨를 때렸는지 잘난 네 녀석의 주둥이로 떠들기 전까진 끝낼 생각이 없으니까 그것도 참고하도록.”

쫘~악!!

길천은 팽철영의 얼굴이 보기 사납게 부어오를 때까지 계속 좌우로 따귀를 때렸다. 길천의 손아귀에 잡힌 팽철영은 마치 어두운 밤길에 사나운 호랑이를 만난 동물처럼 속수무책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당했다.

“마, 말하겠습니다.”

“엥? 벌써 말하려고? 이제 슬슬 손맛도 좋아져 재미가 붙고 있는데 조금만 더 참았다가 말하면 안 될까?”

아쉬움이 역력한 길천의 말에 팽철영은 그만 질리고 말았다. 자신도 무림에서 악독하기로 유명했지만 눈앞의 젊은이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정하듯 부탁하는 표정이나 말투가 진심이라 은연중 부르르 몸을 떠는 팽철영이었다.

“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낱낱이 말하겠습니다.”

몇 대 때리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길천은 진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쩝, 할 수 없지. 굳이 말하겠다는데 기회는 줘야겠지. 그래, 어째서 아가씨를 때렸는가?”

“그, 그게 저 년이 감히 교합을 하는 도중에 제 위에 올라타서...”

“고작?”

“고작이라니요. 감히 여자 주제에 남자 위에 올라탄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허어, 당연히 말이 되지. 네 녀석의 허리를 부러뜨려 줄까? 평생 그 짓 할 때마다 여자가 올라타도록? 도대체 어떤 영단을 잘못 쳐 먹으면 그런 부작용이 생기는 거냐?”

“부작용이 아닙니다. ‘남자는 하늘’ 이게 당연한 것입니다. 감히 여자 주제에.”

“휴우, 마지막 밤을 뜨겁게 보내려 했건만 삐딱한 개망나니 바로잡는데 할애하는 수밖에. 오냐, 한바탕 어우러지자는데 뭘 더 망설이겠냐. 네 놈이 어느 구멍을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인지 단단히 각인시켜주마.”

길천은 상단전에 머물며 관찰한 비담의 평소 행실 중에 꼭 따라 해보고 싶었던 구타의 기술들을 상기하며 복날 개를 패듯 팽철영을 패기 시작했다.

그날 밤, 밤새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정체 모를 비명에 낙양의 개들은 영문도 모르고 숨소리마저 죽인 채 악몽 같은 밤을 지새웠다.

취선루의 후원.

한바탕 폭풍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그곳엔 만신창이가 된 사내 하나만 널 부러져 있었다. 가끔 미약하게 숨을 몰아쉬는 것이 아직 목숨은 붙어 있는 것 같았으나 꼴은 말이 아닐 정도로 엉망이었다.

한때는 진열대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을 최고급 비단은 군데군데 보기 사납게 찢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남아있는 핏자국이 처참했던 구타의 현장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개운한 표정으로 탁탁 손을 턴 길천은 어느새 동녘으로 뿌옇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쓰러져 있는 사내를 다시 한 번 걷어찼다.

“니미럴,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망나니 교육시키느라 모두 허비하고 말았구나. 진탕 술 퍼먹고 선화랑 침상에서 오붓하게 뒹굴기에도 모자랄 시간을 냄새나는 사내놈에게 헌납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담이를 구슬려 한번 제대로 노는 수밖에.”

휘적휘적 걸어가는 길천의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제 쓰러진 사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 살아있을까?”

“에이, 그걸 말이라고 하나. 분명 죽었을 거야. 아무리 칼을 차고 다니는 무사라고 하더라도 밤새 무자비하게 얻어 터졌으니 목숨이 붙어 있지 않을 거야.”

“어? 아니야. 자세히 봐봐. 조금씩 꿈틀거리는데?”

“정말이네. 이럴게 아니라 어서 관리인에게 말해 의원을 불러야겠어. 허허, 그나저나 맷집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젊은이군. 얻어터지는 꼴을 봐서는 관 하나 짜겠구나 싶었는데 말이야.”

“그러게 왜 여자를 때려서 저런 참변을 당하는지 모르겠군. 무사들 중에 미친놈이 많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여자가 올라탔다고 때리는 게 말이나 되는가?”

“쉬잇! 목소리 좀 낮춰 이 사람아. 괜히 누워있는 젊은이에게 봉변당하지 말고.”

“흠흠, 날이 꼴딱 샜으니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젠장! 기녀랑 그 짓도 제대로 못했는데 말이야. 조금 아쉽기는 하군.”

“대신 신나는 싸움 구경을 했잖은가. 우리가 언제 저런 진귀한 구경을 해보겠는가. 아무튼 박진감 하나는 최고였어. 그렇게 시원하게 날아가는 장면은 돈 주고도 구경하기 힘들 거야.”

취선루의 관리인들이 나타나 부산스럽게 후원을 정리하는 동안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어떻게 흐른 지도 모를 만큼 호쾌하고 통쾌한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기녀를 사기 위해 사용한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길천은 약속했던 사흘이 모두 지났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상단전에 머물고 있는 비담을 깨웠다. 상위의 원영신인 자신은 비담의 상단전에서 마음대로 구경하며 머물 수 있었지만, 아직 영력이 약한 비담에겐 무리였다. 그래서 비담은 그냥 영체의 상태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동생? 아직 자고 있나?”

“으흐음. 아! 형님이세요?”

“흐흐, 나 말고 누가 또 동생을 깨우겠는가. 그나저나 약속했던 사흘이 모두 지난 모양이야.”

“지났으면 지난 것이지 ‘지난 모양이야’는 또 무슨 말입니까?”

“쩝, 어떤 개호로새끼의 정신머리 좀 고쳐놓느라 하루를 허비한 게 너무 아쉬워서 그랬지. 아무튼 자네와 했던 약속은 철썩 같이 지켰네.”

“개호로새끼요? 설마 무슨 사고치신 거예요?”

“아닐세. 절대 사고치지 않았어.”

비담의 영체가 빛나며 순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자 결국 길천은 팽철영과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내 말을 믿어주게. 하늘에 맹세코 절대 사고치지 않았어. 단지 약속한대로 이막주에게 방중술을 전해주었는데 고맙다며 한사코 술을 대접하겠다고 그러지 뭔가.”

“형님이 술상을 내오라고 시킨 것은 아니고요?”

“허허, 귀신 잡을 일 있나? 귀신 체면이 있지 내가 어찌 인간에게 술을 구걸한단 말인가. 자네도 나를 겪어봐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기야 고결하고, 우아하고, 고상한 형님 성격에 미.천.한.인.간.따.위.에.게 술을 구걸하진 않으셨겠죠.”

“흠흠, 당연하지. 아무튼 이막주가 준비한 성의를 감안하여 못이기는 척 술을 마시고 있는데 글쎄 그 개호로새끼인 팽가의 꼬맹이가 옆방에서 기녀를 패고 난동을 피우지 뭔가. 그래서 무림의 선배로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따끔하게 교훈을 준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네. 정말이야.”

“팽가의 꼬맹이요?”

“하북에 있는 팽가의 소가주라나 뭐라나 하는 녀석일세. 보기보다 허약해서 별로 손봐줄 것도 없었네. 식후 간식거리도 아니었으니 자네는 신경 쓰지 말게.”

“알겠습니다. 형님 얘기를 듣고 보니 별일도 아니네요.”

“그렇다니까. 정말 별일 아니었어.”

“그나저나 막주가 부채의 행방에 대해 알려주던가요?”

“그건 내가 거나하게 취해서...아, 아니 오늘 아침에 찾아오면 알려준다고 하였네. 뭐 하는가, 어서 서둘러 막주를 만나러 가야지. 바쁜 사람 기다리게 하면 못써.”

말이 잘못 튀어나와 자신의 만행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던 길천이 다급히 비담의 영체를 상단전의 궁전에서 쫓아내 버렸다. 개운치 않은 느낌에 비담은 한사코 버텼으나 워낙 완강하게 밀어내는 길천의 영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다. 비담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길천이 크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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