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기절하여 축 늘어진 기녀의 몸을 한쪽으로 팽개친 팽철영은 저벅저벅 길천을 행해 다가왔다. 엄청난 분노로 인해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이 더욱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방금 나에게 말한 것이냐?”
“꺼억!”
팽철영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길천의 트림이었다.
“아! 미안허이. 내가 하도 오랜만에 술을 즐겼더니 몸이 통제가 안 되는구먼. 방금 뭐라 그랬나?”
“후후, 아무리 천박하고 가진 것 없는 미천한 놈이라도 제 목숨 소중한 법은 알아야하거늘. 다시 한 번 묻겠다. 방금 나에게 욕을 한 것이 네놈이냐?”
“지랄하네. 딸꾹. 좁디좁은 복도에서 생생하게 들어놓고 도대체 꼭 확인을 하는 저의가 뭐냐? 허리에 칼 차고 다니는 놈들은 이래서 문제야. 그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으스대는 꼴이라니. ‘네, 제가 당신에게 개호로새끼라고 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싸우면 덜 미안해지냐? 형님이 오늘 간만에 기분 좀 내고 달릴 거니까 빨리 끝내자. 여기는 좁아서 그렇고 후원으로 가서 붙을까? 딸꾹.”
“허어!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따위 망발을 늘어놓는 것이냐? 가문의 어른들께서 일반인을 해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계시지만 수틀리면 오늘 네 목숨 거두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도 덤빌 생각이냐?”
“당신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정체를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지. 너의 정체는 개.호.로.새.끼 잖어? 그치? 정확하게 맞췄지? 나 이런 거 잘 맞춰. 히히, 딸꾹. 사내가 얼마나 칠칠치 못하면 여자나 때리고 말이야. 가운데 달고 다니는 그 물건이 아깝다, 새끼야.”
“으음.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상관없다. 팽가를 모욕한 너의 죄를 물어 목숨을 거둘 것이다. 너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고 말았다.”
으스스하게 울려 퍼지는 팽철영의 목소리에 복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나 술에 취해 호기롭게 나섰던 청년의 목이 댕강 날아가는 끔찍한 장면이 모두의 머릿속에 이 순간 그려지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힘겹게 걷는 길천의 등을 보며 팽철영은 일순 어이가 없었다. 대관절 중원 오대세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하북 팽가를 옆 동네 강아지쯤으로 여기는 태도도 우스웠지만 전혀 무공을 익힌 흔적도 없으면서 당당히 앞서 걷는 만용에 기가 찼던 것이다.
‘술에 취해 자기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위인이 왜 나서서 화를 자초하는지 모르겠군. 가문의 존장들이 무서워 함부로 죽일 수는 없으나 평생 폐인으로 살게끔 만들어줘야만 직성이 풀릴 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 네 자신을 원망하거라.’
취선루의 후원에 당도한 길천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체내의 내공을 이용하여 취기를 몰아내었다. 순식간에 진하게 퍼져나가는 주향에 팽철영은 당황하고 말았다.
“뭐, 뭐지? 무공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팽철영은 최소 절정급 이상의 무인이 아니고서는 체내의 내공을 이용하여 취기를 몰아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팽철영을 더욱 긴장하게 만든 것은 취기를 정화하여 몰아내는데 걸린 시간이다.
눈앞의 젊은이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취기를 몰아내었다. 자신의 상식으로 가문의 가주인 자신의 아버지도 저토록 빨리 취기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최하 화경 급의 고수임이 분명했고, 오히려 선을 넘은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팽철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길천의 신위를 목격한 팽철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누, 누구십니까?”
팽철영은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기어 들어가는 전형적인 소인배의 모습을 보이며 어느새 경어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너 왜 그러냐?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것이라 그러던데 혹시 그거냐? 몸으로 진하게 대화를 나누자는데 갑자기 웬 존댓말?”
“그게 아니라 왜 정체를 숨기고 저를 모욕하셨는지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대관절 누구시기에 입에 담기도 민망한 욕을 제게 하신 겁니까?”
“꼴에 명문가의 자손이라 유세하는 거냐? 뭐 다행히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니 목숨은 거두지 않으마. 괜히 목숨 값을 받아낸다며 떼로 덤비면 골치 아프니까 가볍게 몸이나 풀자. 덤벼.”
불량스럽게 손을 까딱까딱 거리며 비아냥거리는 길천의 모습에 팽철영은 화가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나름 명문가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이 효과를 발휘하였고, 그것이 팽철영에게 여벌의 삶을 선물하고 있었다. 물론 팽철영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당신에게 덤빌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를 모욕한 것에 대한 사과는 받아내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정파 나부랭이들은 정이 안가요. 화끈하게 몸으로 대화를 나누자는데 뭔 말이 그리도 많은지. 임마? 네가 먼저 기녀를 두들겨 팼잖아? 그러니까 나도 너에게 욕을 하고 두들겨 패겠다는데 뭐가 잘못됐냐?”
“그럼 제가 왜 여인을 때렸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다짜고짜 욕을 하고 싸움으로 해결하자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만.”
“휴우. 근사하게 모든 절차 다 밟아가며 밟히겠다는데 그 정도는 눈감아 줘야지. 주둥이만 산 팽가의 꼬맹아, 힘없고 연약한 아가씨를 왜 개 패듯 때리셨나? 조금이라도 덜 맞고 싶으면 신나게 나불거려야 할 거야.”
“듣자듣자 하니 말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오? 보아하니 나랑 연배도 비슷한 것 같은데 어찌 그리도 말을 함부로 한단 말이오? 당신의 무공이 높다는 것은 인정하나 예의를 갖춰 주었으면 좋겠소.”
“그건 인간일 때나 적용되는 것이고. 개보다 못한 놈한테 갖출 정도로 여분의 예의를 들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멍멍이보다 못한 자네가 이해하게. 그리고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게. 자네의 몇 대조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나랑 무난하게 말을 섞을 수 있는지 따지려면 골치만 아프니까 그건 그냥 넘어가고. 그나저나 빨리 말 안 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기다리는 거야. 누구처럼 숫자를 세야만 주둥이를 열래?”
“가, 감히 팽가의 소가주인 나를 이리도 핍박하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오? 오늘은 내가 약세를 인정하고 잠시 물러가겠지만 언젠간 반드시 오늘의 치욕을 되갚아 주겠소.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오.”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팽철영을 가만히 두고 볼 길천이 아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길천의 입매가 더욱 휘어지며 짙어지더니 바로 팽철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디서 꼬랑지를 말고 도망가려고. 난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줬어. 나중에 딴소리하면 아주 팽가네 기둥을 사정없이 뽑아버릴 테니 알아서 하고, 오늘의 가르침에 더 이상 토를 달지 말거라.”
“흐익!”
팽철영은 빛의 속도로 달려드는 길천을 보며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서둘러 도를 뽑는다고 뽑았으나 채 반도 뽑지 못하고 길천과 마주치고 말았다. 길천은 팽철영의 도병을 쥐고 다시 도갑에 그대로 밀어 넣어 버렸다.
쾅
길천은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팽철영의 몸을 들이받았다. 팽철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아가 볼썽사납게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길천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공중으로 도약하여 쓰러져 있는 팽철영의 몸을 무릎으로 내리 찍었다.
빠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팽철영의 정강이뼈가 그대로 부러져나갔고, 곧 후원은 팽철영의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아아악!!!”
“명문가의 자손이라 뼈가 튼실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부실하구만.”
길천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팽철영의 복부를 다시 냅다 걷어차 버렸다.
퍼억
“으윽!”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팽철영이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팽철영은 태어나서 오늘과 같은 수모와 고통은 정말 처음이었다. 칼을 잡은 이후로 가문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로 기대와 질시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던 팽철영이기에 지금 이 순간 몸의 고통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 더욱 치욕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