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54)

34화

길천이 이성보와 함께 방으로 이동하던 그 시각.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잠시 하남성에 들렀던 하북 팽가의 소가주 혼원도(混原刀) 팽철영이 취선루를 방문했다. 오정회(五正會)의 후기지수 모임인 ‘시봉세(始鋒勢:날카로운 칼날의 시작이 되는 세력)’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무력이 막강한 팽철영은 가진 바 무공에 비해 손속이 잔인하고 사람됨이 간사한 것으로 더 유명한 자였다.

거기에 막강한 가문의 후광까지 갖추고 있으니 무림에서 정과 사를 막론하고 기피대상 1호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무슨 운명의 배알이 꼴린 장난인지 길천이 머물고 있는 장소에서 뜻하지 않은 시간에 함께 조우하게 되었다.

화려한 방으로 안내된 길천은 300년 만에 술을 즐긴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고무되었다.

“하하하, 주향이 그윽한 것이 막주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구만. 금존청인가?”

“하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술의 향기만 맡고 종류를 알아맞히시다니 역시 풍류를 즐기시는 도색성 어르신이십니다. 어르신의 노고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특별히 북경에서 공수해온 금존청인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으음. 향기가 진한걸 보니 최상급의 술이로구먼. 이거 막주의 배려와 마음씀씀이에 모처럼 호사를 누리게 생겼어. 이거 몸이 달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니 어디 한번 따라보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졸졸졸

누런 황금빛의 액체가 술병에서 졸졸 흘러나와 길천의 잔을 채웠다. 입맛을 다신 길천은 음미하듯 천천히 잔에 채워진 술을 목으로 넘겼다.

“캬아~!! 죽이는구먼. 역시 이 맛이야.”

감탄사를 연발하며 거듭 잔을 비우는 길천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성보 역시 기분이 좋았다. 내심 자신의 준비가 미흡하여 길천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었는데 기우에 불과하였다.

“밤은 길고 술은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즐기십시오. 참, 이럴게 아니라 선화도 부르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길천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이성보가 밖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부르셨사옵니까?”

“선화를 부르거라. 그리고 여기 술도 넉넉하게 더 내어오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잠시 후, 속이 은은하게 비치는 황금빛 나의를 걸친 선화가 술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귀빈에 대한 예우로 날아갈 듯 사뿐히 절을 올린 선화는 길천의 옆으로 다가가 앉더니 비어있는 잔을 채워주었다.

“소녀 공자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하하, 아리따운 선화가 술을 따라주니 그 맛이 더욱 달고 향기롭구나. 오늘 밤은 내가 너를 책임질 것이니 더 가까이 앉거라.”

길천이 옆에 앉은 선화의 허리를 감싸더니 바싹 끌어당겼다. 선화는 못이기는 척 길천의 품에 안기며 비음을 적절히 섞어 말했다.

“아이, 뭐가 그리 급하세요. 도망가지 않고 공자님 옆에 꼭 붙어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셔요.”

“정말 좋구나, 좋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길천은 오랜 세월 잊고 지냈던 옛 추억들을 되새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빈 술병이 점점 늘어나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길천의 얼굴이 붉으스름하게 변했다. 눈치 빠른 이성보는 이쯤에서 자리를 비켜주기로 하고 길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는데 제가 오히려 방해가 되는군요. 저는 이만 물러갈 것이니 선화와 긴긴 밤을 달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채의 소재에 대해서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딸꾹, 그렇게 하십시오. 내일 아침 막주를 찾아뵐 것이니 살펴 가십시오.”

가볍게 이성보를 배웅한 길천은 내공을 이용해 취기를 다스릴 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그리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정중히 인사를 올린 이성보가 방을 빠져나가자 길천은 기다렸다는 듯 선화를 품에 안았다.

선화 역시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 위해 길천을 끌어안고 급박하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천이 막 선화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주무르려는 순간.

콰앙

옆방의 문이 부셔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런 썅! 오냐오냐 해줬더니 감히 내 위에 올라타? 감히 계집 주제에 겁 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죄, 죄송합니다. 소녀는 단지 대협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아가리 닥치지 못할까? 이곳의 책임자가 누구냐? 어서 썩 내 앞에 나타나 사죄하지 못할까?”

소란의 주인공은 하북 팽가의 소가주 혼원도 팽철영이었다. 잔뜩 치켜 올라가 역 팔자를 그리며 꿈틀대는 눈썹이 그의 분노가 작지 않음을 대변해주었다.

사건의 발단은 간단했다. 내부 수리를 마친 취선루의 기녀들이 남자를 다루는 기술이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다는 소문을 듣고 평소 여색을 밝히던 팽철영이 찾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병적일 정도로 심한 남성우월주의자인 팽철영에게 그 짓을 할 때 여인이 남자 위에 올라탄다는 것은 대단한 수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내막을 알 리 없었던 기녀는 길천에게 배운 방중술대로 체위를 바꾸다가 그만 팽철영 위에 올라타고 만 것이다. 몸을 덮쳐오는 희열에 잠시 이성의 끈을 놓고 있었던 팽철영은 어느 순간 기녀의 출렁이는 가슴을 올려다보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몸이 식어버렸고, 대신 그 자리엔 불같은 분노만 가득 차올랐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팽철영은 다짜고짜 기녀를 들어 문을 향해 던져버렸고 놀란 눈으로 용서를 비는 기녀를 향해 윽박지르는 중이었다.

“소녀의 잘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사오나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아악!”

쫘악

“너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른다?”

기녀는 애처롭게 떨며 용서를 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팽철영의 따귀였다. 기녀의 뺨이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팽철영은 일반인 그것도 여인을 상대로 무공을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아 순수한 완력만으로 따귀를 쳤으나 위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고 깔아뭉갰다는 생각에 더 과하게 힘을 사용한 것도 작용을 하였다. 그런데 팽철영의 눈에 기녀가 아직도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오냐오냐 봐주었더니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드는구나. 네 년의 상태를 보아하니 루주라는 작자는 보지 않아도 뻔해. 오늘 단단히 가르침을 줄 것이니 알아서 새기거라.”

“아악! 악!”

퍽, 퍼억

인정사정없이 가녀린 여인의 몸을 구타하는 팽철영의 눈빛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점점 커져가는 복도의 소란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이 하나 둘 구경을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쳐 날뛰는 팽철영의 모습에 잔뜩 주눅이 들어 말릴 생각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일방적인 구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구타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 발만 둥둥 구르는 사람들 틈으로 드디어 거나하게 취한 길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어떤 개호로새끼가 달짝지근한 휴가를 방해하는 거냐? 마지막 밤이라 조용히 넘어가려 했는데 말이야, 딸꾹.”

아직도 손에 남아있는 선화의 보드라운 가슴의 감촉에 입맛을 다시며 술에 취한 길천이 툴툴거렸다. 팽철영은 자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욕을 내뱉는 주정뱅이 사내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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