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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154)
  • 31화

    지금 이성보의 눈빛은 마치 평소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눈앞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아이보다 더 간절해 보였다.

    “혹시 부채의 행방에 대한 정보와 교환한다는 기술이...?”

    “네, 그것입니다.”

    “하지만 문외불출(門外不出)이란 말처럼 한 문파의 무공은 함부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를 합니다. 그런 사실을 알만한 분이 어찌 사사로이 다른 문파의 기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입니까?”

    “아닙니다. 공자님의 무공을 훔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파렴치한으로 저를 보지 말아주십시오. 그냥 무공이나 색공거시기와 관련이 없는 방중술만 가르쳐주시면 됩니다. 선대 흑막의 막주님께 전수해주셨던 그 기술만 가르쳐 주시면 충분합니다.”

    “선대 흑막주에게 가르쳐준 기술이요?”

    “그렇습니다. 300년 전, 흑막주셨던 흑조(黑鳥) 기가선 어른께 가르쳐주셨던 그 기술이면 충분히 만족하고 정보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색공이나 무공과는 전혀 별개의 기술이니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부탁하는 이성보를 바라보며 비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휴우, 막주께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소상히 말씀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성보는 비담이 보고 있음에도 버젓이 책장으로 다가가 비밀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금고 안에 보관된 낡은 목함에서 빛바랜 누런 책자를 꺼내더니 비담에게 건넸다.

    “무슨 책입니까?”

    “대대로 흑막의 막주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기가선 어른의 비망록입니다. 기막주께서 당시의 상황을 일기 형식을 빌려 기록해 놓은 것으로, 안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도색성 길천 어르신을 만난 일화부터 방중술을 익힌 과정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흑막을 맡게 될 막주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도 함께 적혀있고요.”

    비담은 빛이 바랜 누런 책자에 300년 전 도색성 길천의 일화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웠다.

    “그럼 이 책자에 그 방중술도 적혀있지 않겠습니까?”

    비담의 물음에 이성보가 잔뜩 성을 내며 씩씩거렸다.

    “뒷장을 넘겨보십시오.”

    비담은 이성보가 시키는 대로 책의 뒷장을 넘겨 살펴보았다. 책에는 누군가 찢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엥? 후인에게 전한다. 그리고 찢어져있네요?”

    “그렇습니다. 아마도 기가선 어른께서는 그때 익혔던 방중술을 후인에게 남기셨던 것으로 추측되어집니다. 한데 어떤 개망나니 같은 전대 막주가 흑심을 품고 그 부분을 찢어간 것입니다.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정말 어처구니없고 통탄할 일입니다.”

    비분강개하여 외치는 이성보를 보며 비담은 할 말을 잃었다. 방중술을 마치 사문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여기니 적당히 호응을 해주기도 애매했던 것이다.

    “막주께서는 그게 무척 안타까우신 모양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 좋은 걸 중간에서 꿀꺽한다는 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하긴 중간에서 꿀꺽한 놈이 나쁜 놈이지요. 그나저나 이 책을 좀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읽으십시오. 도색성 길천 어르신은 기가선 막주님께 크나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니 당연히 그 분의 전인이신 공자님도 볼 자격이 충분합니다. 안의 내용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도색성 어르신의 겉모습, 화류선이란 부채로 무공을 시전 했을 때의 모습, 막주님과의 인연 등등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독 한 부분만 찢어진 것을 제외하면 말이지요.”

    한이 맺혔는지 으드득 이를 가는 이성보였다.

    “그럼 좀 살펴보겠습니다.”

    비담은 혹여 낡은 책이 상할까봐 조심히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성보의 말처럼 책속에는 기막주와 길천의 일화가 가득 적혀 있었다. 비담이 책을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길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자 재미도 있고 신선했다.

    ‘오우, 형님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늘 허풍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인 것도 있었구나.’

    ‘하하하, 이러니 기가선 막주가 형님을 은인으로 모셨지. 이런 일화가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양반이야.’

    비담은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어 나갔고, 읽으면 읽을수록 길천과 더욱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찢어진 부분의 앞장에 기막주가 후대의 막주들에게 남긴 유지가 눈에 들어왔다.

    후대의 막주들께 전하노라.

    나는 불치의 병으로 인해 후사를 볼 수 없는 몸이었다.

    막역하게 지내던 친우들이 혼사를 치르고, 자손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심한 좌절감을 느끼며 고통과 절망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광명과 기연이 찾아왔다.

    바로 도색성 길천 어르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분은 내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셨다.

    바로 말라있던 뿌리를 다시 되살려 주셨고,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포기했던 희망과 꿈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때의 환희와 기쁨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구나.

    그리고 이 기술들은 놀랍게도 자손을 보는 기쁨에서 한 발 나아가 여인들과 나에게 지극한 쾌락도 선사해 주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왔던 기연과 기쁨을 후대의 막주들에게도 전하노니부디 한낱 욕정이 아닌 지극한 쾌락과 환희를 즐기며 살아가길 바란다.

      7대 흑막주 기가선 남김 

    흑막의 기가선 막주가 남긴 유지를 읽자 비담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뒤를 이을 막주들에 대한 지극한 마음도 느낄 수가 있었다. 어째서 이성보가 찢어진 부분에 그토록 울분을 토했던 것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비담이었다.

    “기막주님께서 후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우선 존경을 표하고 싶군요. 그런데 이 막주님?”

    “말씀하십시오.”

    “책을 읽다보니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제는 저도 단순한 방중술이 아님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찢어진 부분에 적혀있던 방중술을 직접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왜 찾아보지 않았겠습니까? 저를 포함한 전대의 막주들은 백방으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찾아보았지요. 하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작은 단서하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혹시 화류선이란 부채의 소재를 파악하고 계셨던 이유가?”

    “그렇습니다. 기막주님의 비망록 중에서 방중술 부분이 사라진 이후로 후대의 막주들은 화류선의 행방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그분의 전인과 닿을 유일한 끈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런 내막이 있어 화류선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셨던 것이군요. 막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흑막은 저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들었으니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비록 길천 어르신의 방중술을 익혔다고는 하나 당시의 방중술을 그대로 전해드리는 것이 아무래도 최상의 방법이겠군요.

    잠시 방안에 귀기가 강하게 휘몰아칠 것입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기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성보는 드디어 사라졌던 방중술을 복원할 수 있다는 기대에 가늘게 몸을 떨며 기다렸다. 그리고 한순간 방안에 기이한 기운이 흐르며 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귀기가 휘몰아쳤다. 눈을 반개한 비담이 자신의 상단전에 앉아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던 길천에게 의념을 전달하였다.

    ‘형님, 모두 들으셨죠?’

    ‘흐음, 그 새끼 기록정신 하나는 투철하구나. 뭐 대단한 거 가르쳐줬다고 보물로 삼아 자자손손 전하는 거야. 쪽 팔리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가렵고 아픈 부분 한 두 개는 가지고 있습니다. 형님께서 기막주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아픈 부분을 치료해 주었으니 당연히 당사자는 고마웠겠지요. 그리니 형님과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록해서 후대에 남겨준 게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그 녀석만큼 열성적으로 나를 따라다녔던 녀석도 드물었지. 그래도 절실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니 고맙기는 하구나.’

    ‘그러게요. 형님이 매일 제게 들려주시던 무림행보가 모두 가짜인 줄 알았는데 책을 보니 몇 가지는 정말 사실이더군요. 히히.’

    ‘당연하지. 비싼 귀기 쳐 먹고 내가 왜 헛소리를 하겠냐? 이제라도 알았으니 형님을 우러러보고 잘 모셔, 임마.’ 

    ‘실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그때 기막주에게 전한 방중술이 대체 뭐였습니까? 그걸 가르쳐줘야 부채의 행방을 가르쳐 준다니 어쩔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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