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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30/154)

30화

객잔으로 돌아온 비담은 얼얼한 볼을 만지며 문득 떠나온 서희가 생각이 났다. 자신의 볼에 알싸한 추억과 사랑이란 감정을 선물한 여인. 그렇게 흑막에서 사람이 찾아올 때까지 비담은 서희와의 일들을 회상하였다.

거지영감의 말은 확실했다. 정말로 반 시진(1시간) 후에 흑막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자신이 묵고 있는 숙소를 어찌 알았는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담의 방으로 들어온 사내는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도박장의 선화에게서 모두 들었습니다. 흑막에 연통을 넣으신 분이 공자님이십니까?”

“그렇소. 내가 흑막에 부탁할 일이 있어 그리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화류선’이라는 부채의 행방에 대해 알고 싶소. 가능하겠소?”

“물론입니다. 저희 500년 전통의 흑막은 단 한 번도 고객을 실망시켜 드린 적이 없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정보료가 꽤 비싸니 그것은 공자님께서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시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오?”

“한 시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럼.”

사내는 짧게 시간만 명시한 후 바로 방을 빠져 나갔다. 비담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사내의 모습을 보며 흑막이란 단체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결과물을 확실히 가져온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약속했던 한 시진이 지나자 예의 그 사내가 다시 비담의 방을 방문했다.

“공자님께서 원하시는 정보를 찾았습니다. 단, 직접 흑막의 본단으로 정중히 모셔오라는 막주님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부채의 행방을 찾았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정확히 지금 누구의 손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막주님께서 그 정보를 원하시는 공자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야만 정보를 내어드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가봐야지요. 지금 당장 출발해도 됩니까?”

“저를 따라 오십시오.”

비담은 서둘러 사내를 따라나섰다. 개방의 정보력으로도 행방이 묘연했던 부채의 소재를 드디어 흑막을 통해 알게 되자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길천에게 듣기로는 그 부채만이 화류선법의 진정한 오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내는 정중히 모셔오라는 막주의 명대로 비담을 깍듯하게 챙기며 흑막의 본단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하였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의외로 취선루였다.

“아, 아니 이곳은...?”

“여기가 바로 흑막의 본단이 있는 곳입니다. 취선루주가 바로 흑막의 막주님이십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시지요.”

비담은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급히 사내의 뒤를 따라 취선루로 들어갔다. 사내는 도박장이 아닌 루의 후원 쪽으로 비담을 안내하였다. 그리고는 어느 방 앞에 멈추더니 보고를 하였다.

“막주님. 분부하신대로 공자님을 모셔왔습니다.”

“공자님을 안으로 뫼시어라.”

방안에서는 걸걸한 사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막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내는 비담에게 들어가라는 시늉을 하였다. 비담은 온통 비밀투성이인 흑막의 막주를 직접 대면하고 부채의 행방도 드디어 알 수 있겠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하였다. 비담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담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널따란 사내의 등이었다. 창문 앞에 서서 묵묵히 도박장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저 남자가 아마도 취선루의 루주이자 흑막의 막주인 그 사람일 것이다.

“소생 비담이라 합니다. 이렇게 흑막의 막주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담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네자 등을 보이고 있던 의문의 사내가 천천히 돌아서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하하, 반갑습니다. 저는 흑막이라는 조그마한 단체를 운영하는 흑혈수(黑血手) 이성보라고 합니다. 이쪽에 앉으시지요.”

너털웃음과 함께 비담에게 자리를 권하는 흑막의 막주 이성보는 40대 초반에 기골이 장대한 호한이었다. 비담은 그런 이성보의 첫인상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앉겠습니다. 듣자하니 제가 직접 와야만 정보를 주실 수 있다고 하던데 무슨 연유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화류선’이란 부채의 행방을 찾는 분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그리 한 것입니다. 혹시 결례가 되었다면 용서를 하십시오.”

“결례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근데 막주께서는 ‘화류선’이란 부채의 내력에 대해 알고 있으신 것 같은데...제 직감이 맞습니까?”

“하하하, 그렇습니다. 저는 그 부채의 내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님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 부채를 찾고 있는 것인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다짜고짜 이유를 말하라고 하시니 조금 당황스럽군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냥 정보에 해당하는 금액만 치르면 정보를 넘겨주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보통의 정보라면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이 부채의 행방에 책정된 정보료는 돈이 아니기에 연유를 물은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면 대체...”

“기술입니다. 밤을 화려하게 지셀 수 있는 천고의 기술. 이 정보의 가치는 오로지 그 기술로만 대신할 수 있습니다.”

“제게 그 기술이 없다면?”

“정보 역시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힘으로 빼앗겠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500년 전통의 흑막을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흑막은 어둠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흑막이 무림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결코 그 정보는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 정보의 암어를 해독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 자결할 테니까요. 대답이 되었습니까?”

“정보를 지키는 것이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하다는 말씀입니까?”

“정보를 사고파는 상인에게 정보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휴우, 할 수 없군요. 부채의 행방에 대해 꼭 알아야하니 적당히 타협을 하는 수밖에요. 연유가 궁금하다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그 부채를 사용하셨던 분의 전인입니다. 그분의 무공을 익혔기에 그분이 사용하셨던 그 부채가 필요한 것입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비담의 대답을 들은 이성보가 쾌재를 부르며 무언가에 대한 기대와 갈망으로 눈을 반짝였다.

“여, 역시. 제 예상대로 그 분의 전인이셨군요. 그렇다면 단순히 무공만 익히신 게...”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 것입니까?”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고 민망하지만 밤에 침상 위에서 화려하게 꽃피운다는 색공 거시기...”

“휴우, 익혔습니다.”

“오우!! 역시.”

연신 감탄사를 뱉는 거대한 체구의 장한을 보며 비담은 갑자기 회의가 밀려왔다. 좋았던 첫인상은 모두 허당이었다. 어둠의 정보 상인이네 500년 전통이네 하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던 것이 불과 몇 초 전이었다. 그리고 정보가 목숨보다 더 중하다는 말을 듣지만 않았어도 지금처럼 심한 배신감까지는 느끼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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