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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154)

27화

구월각에 도착한 구인철은 왈가닥 여동생을 5년 만에 재회한다고 생각하자 저절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집안에선 그 누구도 여동생을 이기지 못했는데 한마디로 집안무적이었다. 그런 여동생이 또 무슨 사고를 쳐 감금되었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하하, 성격은 여전한 모양이구나. 내가 폐관에 들었을 때 15살 꼬맹이였으니 지금은 어엿한 요조숙녀가 되어 있겠구나. 얼마나 예쁘게 자랐을지 무척 궁금한걸.’

목소리를 가다듬은 인철이 우렁차게 외쳤다.

“흠흠, 서희 안에 있느냐?”

“오, 오라버니? 진짜 오라버니가 돌아오신 거예요? 꺄악!!”

구월각을 뛰쳐나온 서희가 무섭게 돌진하여 덥석 인철의 품에 안겼다.

“하하하, 말만한 처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이 무슨 추태냐?”

“꺄악!!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완전히 오신 거 맞죠? 그렇죠?”

“하하, 알았으니 그만 하거라. 이제 어디 가지 않을 것이니 제발 이것 좀 풀고 말하려무나.”

“싫어요. 안 풀어 줄 거예요. 제가 5년 동안 얼마나 오라버니가 그리웠는지 아세요?”

“나도 우리 서희가 무척 보고 싶었단다.”

“참말이요?”

“당연히 참말이지. 이제 더 이상 어디 안 갈 것이니 제발 놓아주려무나.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야.”

“호호호, 알았어요. 참말이라 하시니까 그만 풀어드릴게요. 근데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하하, 급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방금 돌아왔단다. 아버님께 인사드리고 바로 오는 길이란다.”

“우와!! 근데 오라버니는 못 본 사이에 더욱 멋지고 늠름해지셨어요. 이거 처녀들이 시집오겠다고 줄을 서겠는 걸요?”

“녀석, 입심 또한 변하지 않았구나.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디 보자. 우리 서희는 얼마나 예쁘게 자랐을꼬?”

“치, 저야 당연히 천하제일미로 자랐죠.”

인철은 서희가 포옹을 풀어주자 그제야 자세히 서희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음성.

‘흐흠. 도대체 5년 사이에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미모가 나라의 운명을 기울여 버린다는 ‘경국지색’이란 말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구나. 왜 아버지께서 저 아이가 단독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막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왜 말씀이 없으세요? 제 농이 너무 지나쳐서 화나신 거예요, 오라버니?”

“어? 아, 아니다. 화는 무슨. 네가 너무 예쁘고 훌륭하게 자라서 감탄하느라 그만 할 말을 잃은 것뿐이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마저 폐관에 들어 너 혼자 어찌 지낼지 걱정이 많았는데 이리도 훌륭하게 자라주어 너무 고맙고 대견스럽구나.”

“오라버니께 칭찬을 듣는 날도 다 있네요.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저 궁금한 게 얼마나 많다고요.”

“그래, 들어가자.”

오빠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서희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언제나 든든한 자신의 버팀목이자 지원군인 오라버니가 돌아오고, 또 그동안의 이야기를 할 생각에 서희는 죽을 정도로 신이 났다. 인철은 그런 동생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모두 받아주었다.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화제가 자연스럽게 서희의 현재 상황으로 이어졌다.

“하하, 그런데 서희야?”

“왜요?”

“아버지께 들으니 네가 꼭 누굴 찾아야 한다며 무사들을 달라 청했다지? 도대체 누굴 찾으려 했던 것인지 살짝 오라비에게라도 말해줄 수 없겠느냐?”

서희는 인철의 질문에 얼굴이 굳어지며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완고하고 고지식한 아버지께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밝힐 수 없었지만 늘 자기편이었던 오라버니라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월각에 감금 아닌 감금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오라버니밖에 없었다. 결심이 굳었는지 서희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대신 오라버니만 알고 계셔야 해요.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전 끝장이란 말이에요. 무조건 비밀을 지켜주신다 약속해주시면 말씀해드릴게요.”

“으음, 약속까지 할 만큼 심각한 일이냐?”

“그럼요. 저에겐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에요.”

“알았다. 무조건 비밀을 지켜준다 약속을 하마.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힘을 보탤 것이니 이제 속 시원히 말해보아라. 누군데 그렇게 찾으려고 애를 썼던 거냐?”

“한 남자를 찾고 있어요. 제 마음을 훔쳐간 한 남자를요.”

“무어라? 네 마음을 훔쳐? 그게 무슨 말인지 소상히 이야기해 보거라. 어서.”

인철의 서슬 퍼런 재촉에 서희는 할 수 없이 부흥상회에서 비담과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풀어놓기 시작했다. 단, 뜨거웠던 그날 밤의 이야기는 쏙 빼놓고 말이다. 서희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인철은 한 번도 본적 없는 비담이 괘씸하게 여겨졌다.

‘얼마나 잘난 녀석이기에 서희의 마음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그냥 훌쩍 떠났을까? 그리고 내 동생이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매정하게 돌아서냔 말이다. 이런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이번에 여행을 떠나면 그녀석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놔야 되겠어. 감히 하나뿐인 내동생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 고얀 녀석 같으니라고.’

“안 그래도 이번에 여행을 떠날 참이었다. 이미 아버님의 허락도 받았고. 오라비가 힘닿는 데까지 그 녀석을 찾아볼 것이니 인상착의나 특징이 있으면 말해보아라. 그리고 신상명세도 알고 있는 데로 다 말해주고.”

서희는 인철이 도와주겠다고 나서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책상 앞으로 뛰어갔다.

“역시 오라버니는 제 마음을 알아주시리라 믿고 있었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공자님의 인상착의를 그려드릴게요.”

쪼르르 달려가 소매를 걷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서희의 모습을 인철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다 무엇을 보았는지 두 눈이 경악으로 치켜떠졌다.

‘원 녀석도. 저리 좋을까. 가만!! 어렸을 때 찍은 손목의 수궁사가 사라졌잖아? 마음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몸까지 빼앗겼구나. 이런 우라질 새끼를 보았나. 감히 서희와 함께 밤을 보내고도 나 몰라라 도망갔다는 말이냐.’

그림이 완성되자 서희가 해맑게 웃으며 인철에게 내밀었다.

“완성되었어요, 오라버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모습일 테니 꼭 찾아서 제 앞에 데려와 주셔야 해요. 알았죠?”

복받치는 감정에 인철이 부들부들 손을 떨며 서희가 내민 그림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서희는 인철의 마음도 모른 채 마냥 들떠 쫑알쫑알 떠들었다.

“그리고 그 분의 신상명세는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한 가지 그 분의 본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름은 알고 있어요.”

“그 자의 이름이 무엇이냐?”

“비담이라고 들었습니다.”

“비담이라...”

인철이 씹어뱉듯 비담의 이름을 되뇌었다. 동생의 앞이라 분노를 삭이고 있을 뿐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찾아내 요절을 내버리고 싶었다.

‘기다려라, 비담. 내 반드시 너를 찾아내 반쯤 죽여 놓은 상태에서 끌고 와주마. 그리고 동생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난날의 과오를 사죄하게 만들고, 얼마나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던 짓인지 뼛속까지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동생 때문에 차마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원통할 뿐이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오라버니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아니다. 오라비를 믿느냐?”

“당연하죠. 오라버니께서 반드시 공자님을 제 앞에 데려와 주실 거라 믿어요.”

“그래. 반드시 그 녀석을 데리고 오마. 녀석의 털끝하나 상하지 않고 네 앞에 대령해줄 것이니 오라비를 믿고 기다리거라.”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헤헤.”

서희를 두고 뒤돌아 나오는 인철의 안광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오냐. 네 소원대로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으마. 털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르겠지만.’

인철이 나간 것을 확인한 서희는 서랍에서 부채를 꺼내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나를 버리고 떠나신 게 아니야. 부채를 우리의 징표로 두고 떠나셨어. 뭔가 사정이 있으셔서 떠나셨겠지만 분명 돌아오실 거야. 그리고 오라버니가 나서준 이상 더 빨리 그분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비담 공자님.’

한편 그 시각.

낙양성으로 막 들어서던 비담은 온몸에 오싹 한기가 스미는 것을 느꼈다.

“뭐, 뭐지? 몸이 허해져서 그런가?”

비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기에 고기라도 먹어 몸보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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