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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154)

26화

한 달 후.

감숙성 기련산에 있는 흑천맹(黑天盟)의 정문으로 일단의 무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어둡고 칙칙한 흑의로 전신을 감싼 무사의 수는 도합 21명. 하나같이 잘 벼려진 도를 연상케 할 만큼 날카로운 기세를 흘렸는데 무리의 선두에는 수장으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미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고집스러운 눈빛, 굳게 다문 입매와 딱 벌어진 어깨가 남자의 성격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암시해 주었다.

그리고 흑천맹 내에서도 신분이 꽤 높았는지 남자와 마주치는 무사들이 하나같이 깍듯이 검례를 취했다.

맹주전에 도착하자 남성은 자신을 따라온 무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보고는 내가 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만 대로 복귀하거라.”

“예, 대주님.”

스무 명의 목소리가 마치 한 사람이 낸 듯 똑같이 울려 퍼졌다. 대원들이 돌아서자 사내는 거칠 것 없이 맹주전으로 들어가 맹주의 집무실 앞에 섰다.

“흑천대주 구인철이 맹주님 뵙기를 청하옵니다.”

“들어오너라.”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열심히 서류를 들여다보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흑천대주를 얼싸 안았다.

“하하하, 드디어 네가 돌아왔구나. 도대체 이게 몇 년 만이냐?”

“소자 구인철 아버님께 문후 여쭈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하하, 나야 서류더미와 씨름하는 것 외에 별다른 일이야 있었겠느냐. 그래 그동안 잘 지낸 게야?”

“아버님의 염려 덕분인지 무탈하게 잘 지냈고, 뜻한 바도 이루고 돌아왔습니다.”

“저, 정말이냐? 그럼 네가 천마 조부님의 무공을 완성했다는...”

“정확히 5년이 걸렸군요. 맞습니다. 10대조 할아버님이신 구자혁 조부님의 ‘천마신공’을 대성하고 막 폐관을 풀고 나오는 길입니다.”

“이, 이럴 수가. 정말 장하구나. 정말 장해.”

아들의 성취에 고무된 흑천맹주가 거듭 탄성을 발하며 껴안았다. 드디어 가문과 맹의 염원이 아들의 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일종의 도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마신교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이루어진 성과였기에 더욱 값진 열매였다.

사실 기련산은 산세가 험하고, 가파른 협곡이 많아 예로부터 ‘악마의 산’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발길이 전무한 산이었다. 그런 곳에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고 천마신교를 중심으로 마도방파를 흡수하여 마도천하를 꿈꾸며 30년 전 탄생한 집단이 바로 흑천맹이었다.

힘의 논리, 즉 강자존의 법칙이 가장 강하게 적용되는 집단을 이끌자면 우두머리는 그만큼 힘이 있어야했다. 그래서 형식상 천마신교의 전대 교주였던 구을목이 흑천맹주의 직을 겸하게 되었다.

흑천맹은 그렇게 마도천하를 꿈꾸며 거창하게 출발하였다. 이에 큰 위기를 느낀 정파무림계에서 구파일방이 중심이 된 정도맹(正道盟)을 만들었고, 점차 세를 불리고 있던 오대세가 역시 황보세가를 중심으로 독자적 무력집단인 오정회(五正會)를 결성하면서 흑천맹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25년의 세월은 강산의 모습을 바뀌게 만들었고, 초창기의 결속 역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형식적인 맹주의 느슨한 감시를 틈타 결국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흑천맹 산하의 사도문파들이 자신들의 세를 규합하여 떨어져 나가면서 사도련(邪徒聯)을 창설한 것이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년 전, 드디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사도련의 탈퇴로 약화되고 정신이 없었던 흑천맹의 본단을 정도맹과 오정회가 연합을 하여 기습한 것이다.

당시 천마신교의 교주였던 구을목이 최선을 다해 버텼으나 결국 운명을 달리하며 이른바 1차 정사대전은 정파무림계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정파무림계 역시 승리라는 상처뿐인 영광만 얻었을 뿐 실질적인 열매는 사도련이 모두 챙겨갔다.

마도의 새로운 하늘은 자신들이라며 지쳐있는 정파무림연합의 뒤를 쳤고, 덕분에 흑천맹도 그 명맥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흑천맹은 결국 눈물과 통한을 삼키며 마도무림의 주도권을 사도련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5년 전에 벌어진 1차 정사대전의 여파로 흑천맹의 세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맹주까지 운명을 달리하며 주도권까지 넘겨주자 결국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한 위기를 수습하고 흑천맹을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한 것이 천마신교의 신임 교주였던 구관천이었다.

구관천은 과감히 교주의 직을 광명좌사인 양통에게 넘겨주었고, 와해될 위기의 흑천맹을 되살리는데 5년의 세월을 매진하였다. 그리고 정파무림계가 안겨준 치욕과 사도련에서 받은 굴욕을 되갚아주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구인철로 하여금 비밀리에 폐관하여 천마 구자혁의 무공을 익히도록 안배하였다.

거듭된 위기로 무너진 맹을 되살리기 위한 일종의 도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5년 동안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이 드디어 오늘 천마의 무공을 대성하여 돌아왔으니 그의 도박은 대성공을 한 것이다. 그래서 구관천이 느끼는 지금의 기쁨과 반가움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인양 구인철도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려 하였다. 구인철은 자신의 이런 속내를 내보일 수 없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말썽꾸러기 여동생의 안부를 서둘러 물었다.

“그런데 아버님. 서희는 잘 지내고 있는지요?”

아들의 물음에 구관천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말도 마라. 내가 그 녀석 때문에 요즘 골머리가 아프구나.”

“혹시 서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글쎄 두 달 전에 사도련의 자금줄과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이 되는 부흥상회에 첩자가 한 명 필요했단다. 그런데 서희가 어디서 듣고 왔는지 자신이 하겠다며 내게 부탁을 하더구나. 그래서 위험한 일도 아니고 기특한 마음에 덜컥 승낙을 하였지. 한 달 동안은 임무를 잘 수행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못하겠다며 맹으로 돌아와서는 누굴 찾아야 한다며 무사들을 내어놓으라는 거야. 내가 누구냐고 그렇게 물어도 묵묵부답 대답을 해주지 않더구나.

나도 답답한 마음에 이유를 말하기 전까지는 내어줄 수 없노라고 엄포를 놓았고, 급기야 그 녀석이 혼자 가겠다며 애비 속을 뒤집지 뭐냐. 그래서 할 수 없이 처소에 가둬두고 맹 밖으로의 외출을 금지시켜 놓았단다.”

“그 녀석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외출금지는 너무한 처사가 아니신지...”

“너는 서희를 5년 전에 보고 그때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으니 잘 모를 것이다. 아마 지금의 서희를 본다면 왜 아비가 그리 조처했는지 납득할 것이다.

그 녀석 지금쯤이면 구월각의 담을 넘으려 씩씩하게 시도하고 있을 게다. 도대체 무엇에 홀리면 그렇게 되는지 통 알 수가 없구나. 아무튼 탈출을 감행하고 있을 것이니 가서 회포도 풀고, 오누이의 정도 나누어라.”

“하하, 그리 하겠습니다. 아버님.”

대답을 하고 막 방을 나서던 구인철이 갑자기 생각난 듯 몸을 빙글 돌렸다.

“참, 서희를 만나러 가기 전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제가 폐관을 하며 놓쳤던 5년의 기간을 채우기 위해 흑천대와 함께 잠시 여행을 다녀왔으면 합니다. 무림의 정세도 살피고 가볍게 바람도 쐴 겸 유람차 다녀올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허락해 주십시오.”

“음, 정 네가 원한다면 그리 하거라. 단, 너를 비롯한 흑천대는 흑천맹의 기둥이라는 것을 항시 유념하고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위험한 일엔 관여하지 않겠다고 아비와 약조할 수 있겠느냐?”

“하하, 물론입니다.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 것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리고 아버님의 말씀대로 위험한 일엔 관여치 않겠습니다.”

“알았다. 그럼 서희를 만나는 대로 바로 떠나거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완고하신 아버지가 선뜻 승낙을 해주자 구인철은 약간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을 믿고 있다는 반증이었기에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아마도 5년 폐관의 상을 주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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