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한참을 그렇게 서희와의 산책에 빠져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던 비담이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하늘가로 붉은 노을이 번져가고 있었다.
“허어, 아가씨와 함께 있으니 ‘시간은 금’이라는 옛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군요. 붉은 노을빛에 물든 아가씨의 얼굴이 너무나 곱습니다.”
비담은 황홀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소를 짓고 있는 서희의 입술을 충동적으로 훔치고 말았다. 보통 남녀 간에 입맞춤을 하면 서로의 눈이 감기기 마련인데 서희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 그저 웃기만 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비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여 부서질세라 서희의 아름다운 얼굴을 조심히 붙잡고 뜨거운 입술을 포개었다.
잠깐의 입맞춤이 끝나고 조금 민망했는지 서둘러 감정을 추스른 비담이 서희를 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면 꽁꽁 숨긴 마음 속 깊은 곳의 속살까지 투명하게 내보일 수 있는 밤이라는 마법이 펼쳐질 것이기에 아직 시간은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비담은 웃고 있는 서희의 얼굴을 감상하는 재미에 푹 빠져 저녁을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아니 솔직히 저녁을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리고 어째서 도전을 했던 사내들이 발기부전이라는 치명상에 걸렸는지 납득이 되었다.
티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미소와 서로 겉돌 것 같은 농염한 분위기가 이상하게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룬 서희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을 잊는 것은 물론 다른 여인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서희가 지닌 마력은 아이의 순수한 동심과 요부의 끈적끈적한 유혹의 손길이 한데 섞여 공존한다는 것이었다. 비담은 ‘물과 기름이 섞여 한 번도 본적 없는 미묘한 빛깔을 낼 수도 있는구나.’라는 싱거운 생각을 하며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데 점점 밤이 깊어지면서 서희의 빛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순수한 모습의 동심은 옅어지고, 요부의 농염한 색채가 짙게 쌓이면서 방안의 공기를 끈적끈적 휘감고 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서희의 눈동자가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더니 하루 종일 웃음만 짓고 있었던 입술이 벌어지며 뜬금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미염경혼공(美染驚魂功)
현혹(眩惑)의 장
섭혼령(攝魂令) 발동
비담은 서희의 주문과도 같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한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보았고, 순간 동공이 풀리며 그대로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비담의 넋이 나간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서희가 갑자기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쫘~악
비담의 고개가 한쪽으로 급격히 돌아갔다. 그리고 비담의 뺨이 금방 붉게 부어올랐다.
“쳇, 어디서 남의 입술을 훔치고 지랄이야. 내가 네깟 놈에게 주려고 20년 동안 고이 간직했던 입술이 아니란 말이다.”
기분이 무척 상했는지 서희의 곱던 얼굴이 흉악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래도 예뻤다. 서희는 소매로 자신의 더렵혀진 입술을 쓰윽 문지르고 경멸의 눈으로 비담을 바라보았다.
“조금 잠잠하나 싶더니 아직도 돈에 환장한 똥파리가 남아 있었구나. 내 입술을 탐한 죄를 물어 당장 모가지를 날려버리고 싶으나 내 정체가 드러날까 봐 참는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거기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어서 올라타.”
서희는 실어증이 다분히 연극이었음을 증명하듯 청산유수처럼 말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침상 아래에 숨겨져 있던 목각인형을 꺼내 침대위에 올려놓더니 비담에게 명령했다. 비담은 이지를 상실한 채 혼을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되어 서희의 말에 복종하고 그대로 따랐다.
그렇게 목각인형을 끌어안은 비담은 실제 정사를 나누기라도 하는 양 빨고 비비고 생난리를 치고 있었다.
사내들이 그동안 서희의 닫힌 문을 열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신의 혼을 조종하는 고도의 최면술인 섭혼령의 실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각인형을 끌어안고 밤새 뒤척이다 실패했다는 결과만 조석태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서희가 문을 닫고 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문이 열려 있음에도 그 문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섭혼령을 발동하느라 많은 심력을 소모했는지 서희가 의자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모르긴 몰라도 목각인형을 끌어안은 사내는 앞서의 사내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다. 밤새 노력했으나 실패했다는 보고를 하고, 섭혼술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물건이 서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탐하려는 음심에 대한 선물로 발기부전의 최면을 걸어놓았으니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최면을.
목각인형을 끌어안고 신나게 뒹굴던 비담은 본능에 따라 수밀의 장, 적시(赤視)를 시전 하였다. 여인의 성감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붉게 물들던 비담의 눈동자가 더욱 붉게 변하더니 순간 서희가 걸어놓은 섭혼령이 깨어져 나가며 정신을 차렸다.
적시(赤視)의 또 다른 이름은 적시(摘示).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을 가진 기술. 그 어떤 환영이나 최면도 적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비담은 자신의 아래에 깔려 있는 목각인형을 보며 한순간 사고가 정지해버렸다.
“이게 뭔 개지랄이여? 이제는 하다하다 별의별 짓을 다하는구나. 인형을 끌어안고 그 짓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이리도 참담한 지경에 이르도록 나 몰라라 하신 건가.
니미, 그나저나 형님이 다 보고 있었을 텐데 앞으로 쪽팔려서 형님 얼굴을 어떻게 본담. 두고두고 놀릴 텐데. 에효.”
비담은 허탈한 마음에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간 원흉인 서희를 찾았다. 다행히 서희는 같은 방 의자에 앉아 곤히 자고 있었는데 자는 모습이 선녀같이 아름답고 순진무구해 보였다. 서희를 보자 가슴 속에 가득 차올랐던 분노가 봄눈 녹듯 사르르 녹아버렸다.
“후후후, 목석이란 말이 영 틀린 말도 아니었구나. 그런데 진짜 나무인형일 줄이야. 이러니 백날 구멍을 찾아봐야 열릴 턱이 있나. 그나저나 볼이 왜 이렇게 부었담?”
자신의 벌겋게 부어오른 볼을 문지르며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던 비담이 밖의 기척을 살핀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강신귀공을 운용하였다. 물론 짧은 시간 운용할 생각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든 서희의 수혈을 짚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담의 강신귀공은 이제 입신지경에 이르러 예전처럼 가사상태에 빠지지 않아도 자유로이 원영신인 길천과 생각만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경지였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아직 귀기를 다스릴 수 없어 밖으로 새어나온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강신귀공의 근원적 뿌리가 귀기였기에 그 부분은 그냥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상단전에 앉아 있는 길천을 향해 비담이 자신의 의념을 전달했다.
‘형님? 다 보셨죠?’
잔뜩 풀이 죽은 비담의 의념이 길천에게 전달되었다. 돌아온 것은 골을 뒤흔들 정도의 폭소였다.
‘푸하하하, 뭘 말이냐? 나무인형 붙잡고 낑낑댄 거? 아주 실감나던데. 내가 흡정색공을 창안한 보람을 느껴요. 어떻게 나무에다가 적시를 시전하냐, 적시를. 푸하하하!!!’
‘휴우, 면목 없습니다. 별 거지같은 기술에 당해가지고 꼴이 말이 아닙니다. 천하의 색성이라 자부하는 제가 나무인형의 성감대를 찾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아니야, 그래도 잘 찾아보면 나무에도 성감대가 있을지 몰라. 나이테 부근이나 옹이 쪽을 자세히 살펴보면...’
‘형님, 그렇게 놀리시지 않아도 지금 충분히 비참해서 죽고 싶거든요. 제발 그만 합시다.’
‘흠흠, 내가 살면서 오늘 같이 재미있고 진귀한 경험은 처음 해봐서 흥분을 했어. 미안허이, 자네의 심정도 모르고. 그나저나 형님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겠는가?’
‘뭘 말입니까?’
‘적시(赤視)말이야. 내가 왜 수밀의 장에다 그걸 배치했는지 짐작이 안가나?’
‘그야 성감대를 찾는 것이 교합의 시작이니까...’
‘쯧쯧,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하기야 어떻게 최면에서 풀렸는지 내막을 모르니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내가 설명을 해줌세. 사실 적시라는 기술이 성감대를 찾는 역할도 하지만 적시의 숨겨진 진짜 기능은 섭혼술이나 최면술을 부수는 것이라네. 내가 전에도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만든 색공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강호를 주유하다보면 별의별 거지같은 것들을 다 만나게 되지. 음모나 함정이 언제 뒤통수를 때릴지 모르는 음험하고 살벌한 곳이 바로 강호라는 바닥이야. 그러니 이런 기술 한 두 개는 있어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지. 자네는 본능대로 적시를 시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 일정 시간이 흘러 피시술자가 안전하다 여겨지면 그때 자연적으로 발동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이 기술의 진정한 무서움이지. 뒤통수를 치는 악당의 뒤통수를 다시 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기술. 어때? 환상적이지 않은가?’
‘화, 환상적이네요, 형님. 그런데 정말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어떻게 안전하다 스스로 판단해서 발동이 되는지 소제는 전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