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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21/154)

21화

대륙 상권의 5분의 1을 쥐고 흔드는 부흥상회(富興商會).

막대한 부를 자랑하듯 건물 역시 으리으리하게 컸다. 비담은 태어나 이렇게 큰 규모의 장원은 처음 보았기에 그만 현판을 바라보며 입을 떠억 벌리고 말았다. 단순히 돈이 많을 거라고 짐작은 했으나 이건 뭐 한 쪽 담장의 길이만 해도 족히 100장(약 300m)은 되어 보였다. 부흥상회의 규모에 정신을 못 차리고 쳐다보던 비담에게 한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뉘시오?”

“예?”

“아 누군데 여기서 넋을 놓고 있냔 말이오?”

“그러는 댁은 뉘시오?”

“나는 부흥상회에서 일하는 상인이오만. 아까부터 쭈욱 지켜보았는데 여기서 뭐하는 게요?”

“아! 여기서 일하는 분이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비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비담이 갑자기 정중히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네자 상인 역시 무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정쩡하게 포권을 취하고 말았다.

“예, 저도 반갑습니다.”

“하하, 한 가지 청이 있어 상회를 방문하였습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소문을 듣자하니 이곳에 말을 하지 못하는 꽃이 한 송이 있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 꽃을 피우는 자에게 막대한 상금도 준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비담의 이야기를 들은 상인이 비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불쌍한 눈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 보아하니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인생 망칠일 있소? 어디서 풍문을 듣고 한 몫 단단히 잡고 싶은 마음에 찾아온 모양인데 내 당신이 동생 같아 하는 말이니 고깝게 듣지 말고 새겨들으시오. 원래 먹음직스러운 떡이 크게 체하는 법이라오. 뭐 굳이 도전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으나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니 애 저녁에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시오. 인생을 그리 망치고 싶으면 차라리 도박을 하란 말이오. 이런 데에 기웃거리지 말고.”

“하하하, 충고의 말씀 감사히 받겠습니다. 뭐 모든 책임은 제가 질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조대인께 저를 안내해 주십시오.”

“허허, 그리 알아듣게 설명을 했건만. 좋소, 나중일은 알아서 감당하시오. 젊은 나이에 물건이 안서도 나는 책임 못 지오.”

“아무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저으며 결국 상인이 비담을 안내하였다. 상부의 지침 상 첩과 관련된 일은 무조건 회주인 조대인께 직통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정문을 지나 회주가 있다는 집무실로 안내를 받으며 비담의 눈은 더욱 커졌다.

“뭐, 뭡니까? 장원 안에 숲이랑 인공호수까지 있습니까?”

“후후, 많이 놀랐을 거요. 이만한 장원을 태어나 처음 구경했을 테니. 요즘 들어 그 세를 더욱 확장하고 있으니 조만간 장원의 규모가 더욱 커질 것이오. 어쩌면 대륙 제일의 상회로 불리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아니 꼭 그렇게 될 것이오.”

상인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런 큰 상회에 상인으로서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장원의 내부를 구경하며 한참을 걸었어도 아직 집무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비담이 슬쩍 물었다.

“아, 아직도 멀었습니까? 한참을 걸어 온 것 같은데...”

“다 왔으니 그리 조바심내지 마시오. 모두들 왜 그런지 모르겠소. 눈앞의 돈에만 환장하여 멀리 내다볼 줄을 모르니. 쯧쯧.”

비담이 들으라는 듯 마지막으로 툴툴거리는 상인이었다.

“자, 여기가 어르신의 집무실이오. 안에 기별을 넣으면 어르신께서 금방 나오실 것이니 여기 앉아 차라도 마시며 기다리시오.”

으리으리한 내부의 정경에 비담은 기함을 하였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진귀한 도자기며 그림으로 아예 도배가 된 집무실이었다. 그리고 기둥 사이사이로 얇은 금박을 입혀 햇볕에 반사되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아니 고급스러움을 넘어 사치의 극을 보여주는 듯 했다.

비담의 반응을 익히 짐작한 듯 상인이 차를 준비해 달라는 주문과 함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비담은 도대체 돈이 얼마가 있어야 이렇게 살 수 있는지를 상상하며 할 말을 잃었다. 돈에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조대인이란 상인에겐 정말 통용되는 말일 것 같았다.

그렇게 비담이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비쩍 마른 중년인이 헐레벌떡 집무실로 들어왔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진 청포장삼을 입은 중년인은 들어오자마자 비담을 찾았다.

“호, 혹시 내 첩과 관련된 일로 방문하셨다는 분이...?”

“예, 접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담이라고 합니다. 부흥상회의 조석태 어른이신지?”

“그렇습니다. 제가 조석태입니다. 어디까지 알고 오신 겁니까?”

“거리의 풍문이 비교적 소상하여 알만큼은 다 알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어떤 불상사가 생겨도 제가 알아서 감당하겠습니다.”

“휴우,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찾아오는 사람이 뜸해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이리 귀인이 방문해주시니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게 되었군요. 뭐 소상히 들으셨다니 더 이상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오.”

마음이 급했던 조석태는 비담을 바로 자신의 첩이 있는 후원으로 안내하였다. 후원 역시 인공연못에 대리석 정원, 각종 희귀한 꽃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뽀송뽀송한 전각 앞에 당도한 조석태가 문 앞에 서있는 시녀에게 첩의 근황을 물었다.

“아가씨는 어찌 하고 있느냐?”

“별다른 차도는 없사옵니다. 여전히 하루 종일 그저 웃으시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허허, 용하다는 의원에게 다 보여도 병명조차 알 수가 없으니 이리 답답한 노릇이 어디 있단 말이냐. 알았으니 아가씨를 모시는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계속 신경을 쓰거라. 귀인, 이쪽으로 드시지요.”

무슨 중한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조석태와 시녀의 표정이 돌덩이라도 얹은 듯 무거워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상에 앉아 웃음을 짓고 있는 미녀가 보였다. 비담이 보기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였는데, 스스로 자체발광이라도 하는지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한 떨기 붉은 장미꽃처럼 고결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의 분위기가 줄기줄기 발산되고 있었는데 몇 개의 단어로 표현하기엔 전체적인 농도나 색이 너무나 요염하고 짙었다.

그린 듯 초승달 모양으로 아름답게 휘어진 눈썹하며 그 아래 자리 잡은 맑고 그윽한 눈빛, 오똑한 콧날에 앵두 같은 입술까지. 뽀얀 피부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미인도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생생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살아있는 진짜 초절정 미녀였다. 거기에 방글방글 미소까지 짓고 있으니, 아마 열두 마차 분량의 사내들이 와도 그들의 애간장은 순식간에 녹아 내릴 것이다.

그리고 몸매 또한 마치 혼을 불사르는 장인의 손길이라도 닿은 듯 숨이 멎을 정도로 완벽하고 환상적이었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확실하게 나온 정직하고 착한 몸매로 흠을 잡을래야 잡을 곳이 전혀 없는 무결점 그 자체였다. 소문은 으레 과장되게 마련인데 정말 사람들의 말처럼 서시나 양귀비가 와도 따귀 석대는 기본으로 얻어맞고 돌아갈 미모였다.

조석태는 잠시 무단으로 자리를 비운 자신의 영혼을 다시 불러들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담에게도 조석태의 안타까운 심정이 그대로 전달될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한숨이었다. 같은 남자였기에 조석태의 절절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이름은 서희(瑞喜)라고 합니다. 이곳에 온지 벌써 한 달이 지났건만 항상 저렇게 웃고만 있답니다. 부디 귀인의 노력으로 닫혀 있는 서희의 마음을 열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닫힌 마음이 아니라 몸이겠지.’

“알겠습니다. 대인의 시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됩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볼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아무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밀린 업무가 많아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조석태는 자신의 영혼이 또 무단이탈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부탁의 말만 남기고 서둘러 집무실로 돌아가 버렸다.

비담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웃음만 짓고 있는 서희 옆으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그리곤 마주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하하, 어여쁜 아가씨? 이름이 서희라고 했던 가요? 뭐가 그리 좋아 하루 종일 웃는지요? 제게도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헤헤, 헤.”

“하하하, 정말 아가씨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을 모두 잊을 수 있겠네요. 답답하게 이리 방안에만 있지 말고, 우리 연못가라도 산책합시다. 허락을 하신다면 방긋 웃어보세요.”

“헤, 헤헤.”

“승낙을 하셨습니다. 자, 저와 함께 나가시지요.”

비담은 해맑게 웃는 서희를 데리고 후원에 조성된 연못을 거닐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답 없이 계속 웃음만 짓는 서희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도 해주며 일방통행의 말동무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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