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54)
  • 17화

    물론 부하들은 총채주의 무위와 괴력을 철썩 같이 믿었지만 혼자의 몸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다 불상사를 당할 수도 있었기에 정말 꽁지에 불붙은 송아지마냥 뛰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들의 노고와 충정도 몰라주고 대뜸 의심부터 하는 임성필이 못내 서운하고 야속한 부하들이었다.

    “헉헉. 아, 아닙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어찌 그런 더러운 마음을 먹겠습니까? 믿어주십시오, 억울합니다.”

    “아니야, 분명 냄새가 나. 진작 도착해 놓고 어디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그러다 저 놈이 정곡을 찌르니까 그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이것들이 누굴 바보로 아나. 바른대로 말할 때까지 맞고 시작하자.”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비담의 말에 혹해 반쯤 돌아버린 임성필이 달려오느라 체력이 바닥난 부하들을 족치기 시작했다. 임성필은 인정사정없이 걸리는 족족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였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비담이 보기에도 얻어터지는 부하들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쯧쯧, ‘왕대가리라 조금 낫네.’ 라고 했던 방금 전의 말은 취소해야겠어. 역시 녹림이란 단체는 멍청한 순서로 대장을 뽑는 게 맞았어. 아니 어떻게 부하들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내가 한 말만 믿을 수 있는 거지?”

    비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임성필의 고개가 팩 돌려졌다.

    “방금 뭐라 했느냐? 그럼 이 모든 게 너의 계략이란 말이냐? 아뿔싸! 그렇게 조심했건만 결국 저 녀석의 농간에 당하고 말았구나. 정말 무서운 놈이군.”

    “무서운 놈? 제발 그런 걸로 칭찬하지 말아줘. 그리고 계략이라는 단어로 거창하게 포장하면 너의 찬란한 무식함이 조금 가려지냐? 가장 기초적인 이간질에 걸려들다니. 휴우, 이건 뭐 미끼도 없는 바늘을 덥석 무는 물고기보다 못해.”

    여기저기 멍 자국이 선명한 부하들이 어이없는 눈으로 임성필을 바라보았다. 평소 무식한 것은 알았지만 저리 단순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수십 년을 동고동락한 부하들을 믿지 못하고, 애송이 녀석이 지껄인 한 마디에 홀딱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부하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변하자 임성필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사건을 덮어버렸다.

    “흠흠, 너희들도 저 새끼랑 말을 섞으면 내 꼴이 된다. 너희들이 맞은 것도 전적으로 저 새끼 책임이니까 어서 녹림의 매운맛을 보여줘라.”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을 비담에게 돌려 자신은 한 발 물러서고, 부하들의 전투력을 높이려는 임성필의 나름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허나 입심에서 밀릴 비담이 아니었다.

    “좋아, 인정. 나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겼다니 정중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요, 아저씨들. 그런데 왕두목, 한 가지 괘씸하지 않아?”

    “뭐가 괘씸하다는 것이냐?”

    말을 섞으면 좋은 꼴을 못 본다고 방금 자신의 입으로 실컷 떠들어 놓고, 바로 비담의 바늘을 덥석 무는 임성필이었다. 이건 뭐 물고기보다 멍청하고,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게 확실했다.

    “아저씨 부하들 말이야.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몰라도 왕두목을 조금 한심스럽게 보는 눈빛인데? 아, 사나이 대장부가 세상을 살다 보면 함정이나 계략에 빠져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 부하들을 구하겠다는 지극한 마음과 내 구역은 내가 확실히 지키겠다는 생각이 앞서다보면 자질구레한 함정에 걸려 부하들을 의심하고 족칠 수도 있는 건데 전혀 용납을 못하고 이해도 안 해주면 그게 어디 충실하고 믿음직스러운 부하라고 할 수 있겠어? ‘왕두목의 허물이 곧 내 허물이다.’ 라고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불경스럽게 저런 눈으로 흘겨보기나 하고 말이야. 쯧쯧, 부하들 교육을 잘 시켜야겠어요. 왕두목의 체통이 말이 아니잖아요.”

    구구절절 자신을 변호하는 비담의 말에 임성필의 마음이 격랑을 만난 듯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인 ‘체통’이라는 단어에서 임성필의 사고를 지탱하는 나사들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러네. 감히 이것들이 두목의 실수를 덮어주지는 못할망정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게 여겨? 잘 대해주니까 기어오를 때가 된 모양인데 확실하게 밟아주마. 거기 안서!”

    “두, 두목. 제발 그런 거에 넘어가시면...으악!”

    부하들을 상대로 시원하게 몸을 풀던 임성필이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더니 두려운 눈으로 비담을 쳐다보았다.

    “서, 설마?”

    “응. 또 낚인 거야.” 

    “이런 개호로새끼가 누굴 가지고 노나! 죽여 버리겠다.”

    임성필의 도끼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일도양단의 기세로 쪼개져 들어왔다. 비담은 자신의 머리를 겨냥한 도끼를 슬쩍 피하더니 부채로 임성필의 머리를 후려쳤다. 허나 녹림왕이란 별호는 그저 딱지치기해서 얻을 수 있는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임성필은 내리치는 도끼의 방향을 틀어 바로 비담이 허리 쪽을 쓸어갔다. 임성필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비담은 부채를 거두어 들어오는 도끼의 날을 쳐 흘려버렸다.

    자신의 힘을 역이용한 비담의 한 수에 임성필은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다. 임성필이 중심을 잃고 등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 비담의 부채가 등을 내리쳤다. 부드럽게 내려치는 부채의 움직임이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나 실상 실린 힘은 바위를 쪼개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났다.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내공이 실린 부채가 자신의 등을 향해 다가오자 임성필은 더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하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정말 잘 구르네. 아니다, 수염이 덕지덕지 났으니 송충이인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녹림왕 임성필의 눈빛이 돌변하였다. 상대는 입으로만 나불대는 가벼운 녀석이 아니라 실력까지 겸비한 진짜 고수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흐음. 천하의 녹림왕이 애송이의 한 수에 바닥을 구를 줄이야. 내 부하들이 당할 만 했구나. 고수에게는 그에 걸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이 바닥의 법도지. 각오하거라.”

    임성필은 비담을 가볍게 여겼던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철산부법(鐵散斧法)의 10개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제1초식인 쌍부첨(雙斧尖)을 펼치자 도끼가 두 개로 갈라지며 날카롭게 비담의 머리와 다리로 날아들었다. 기세 역시 돌변하여 멍청하게 나불대던 녹림왕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제야 흥겹게 어우러질 맛이 났는지 비담 역시 ‘화류선법(花流扇法)’의 초식으로 상대를 하였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도끼의 궤적을 따라 비담의 부채도 두 개로 갈라지며 동시에 흘려버렸다. 자신의 초식이 속절없이 막히자 임성필은 다음 초식을 연계하여 펼쳤고, 둘의 공방은 순식간에 10초식인 ‘낙부경천(落斧驚天)’까지 이어졌다. 비담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임성필의 모든 초식을 막거나 흘려버렸다. 임성필은 자신의 초식이 모두 비담의 부채에 가로막히고 파훼되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비담은 수비만 할 뿐 공격다운 공격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임성필은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숨 가프게 이어진 공방에 잠시 자신의 철부를 내려놓은 임성필이 항의하듯 물었다.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그리 우습게 보이나?”

    “하하, 우습게 보이는 건 사실인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싸우는 게 흥겨워서 잠시 즐겼던 것뿐이야. 근데 왜 멈춘 거야? 혹시 밑천이 바닥났나?”

    “으음, 잘도 나불대는 그 주둥이를 손봐주지 못하면 더 이상 녹림왕이 아니다. 아직 비장의 마지막 초식이 남았으니 잘난 네놈의 실력으로 한 번 막아 보거라.”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냥 덤벼. 안 그래도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라 나도 끝내야겠어.”

    차분하게 눈빛을 가라앉힌 임성필이 최후의 기술을 선보이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가슴까지 들어 올린 임성필의 철부가 흔들리며 수많은 잔상을 만들어 내었고, 그 수가 무려 10개까지 늘어났다.

    10개의 도끼는 어떤 것이 허상이고 진짜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했기에 임성필은 겁 대가리를 상실한 애송이가 이번엔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이라 자신하였다. 팔방의 방위를 점하며 날아드는 도끼에 두 자루의 도끼를 교묘히 숨긴 철산부법 최후의 비기 ‘십부통혼(十斧通魂)’이 펼쳐졌다.

    비담 역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열 개의 도끼에 맞서 화류선법의 제3초식인 ‘수화폭류(垂花暴流)’를 펼쳤다.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러진 부채는 어느새 사나운 폭포가 되어 꽃을 삼켰고, 날아드는 10개의 도끼마저도 함께 삼켜버렸다. 허망하게 자신의 손에서 날아가는 도끼를 쳐다보던 임성필에게 비담은 아직 남아 있는 부채의 힘을 그대로 쏟아 버렸다.

    흡사 바위가 부딪혀 깨지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실 끊어진 연처럼 임성필의 거대한 육신이 훨훨 날아가 나무와 충돌했다. 잠시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발버둥 치던 임성필은 이내 정신을 놓고 그대로 픽 쓰러져 버렸다. 입을 헤 벌리고 지켜보던 녹림팔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비담에게 덤볐으나 다시 한 번 펼쳐진 ‘수화폭류’에 휘말려 임성필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다.

    녹림의 고위간부들을 단 두 방에 제압한 비담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젠장. 무림에 출도하여 제대로 몸 좀 풀어보나 했더니 저리 허망하게 날아가나? 속을 박박 긁어놓아 전투력이 상승할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네.”

    쓰러진 녹림 영웅(?)들의 혈도를 누르고, 나무에 묶는 것으로 대충 뒷정리를 마친 비담이 마을로 내려가 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기절해 있는 모두의 뺨을 사정없이 때려 깨웠다. 공터에는 이제 스무 명으로 늘어난 녹림도들이 똑같은 자세로 신음을 흘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