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54)

16화

소식을 들은 임성필이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오던 그 시각.

비담은 산채를 둘러보며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동안 와호채의 산적들이 목숨수당도 반납하고 피땀을 흘려가며 갈취한 재물들을 비담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회수했다. 어느 정도 창고가 말끔히 비워지자 비담은 수거한 재물을 들고 여인을 찾아갔다.

“소저,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여인이 내어준 자리에 앉은 비담이 보따리를 내밀며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와호채에 있던 돈과 재물 중 부피가 작고 값이 나가는 것들입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는데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곧 있으면 녹림왕인지 뭔지가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입니다. 혹여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소저께서 인질로 잡히면 일을 매끄럽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잠시 마을로 내려가 몸을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의 일이 마무리되는 데로 소저를 데리러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부디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몸조심 하십시오. 그리고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당도하려면 서둘러 출발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구해준 은인만 남겨둔 채 마을로 내려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짐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돌렸다. 정중히 인사를 한 여인이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 마을로 향했고, 비담은 그런 여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렇게 산채에서 할 일이 모두 마무리되자 비담은 자신을 찾아올 거친 손님을 마중하기 위해 후천이 묶여 있는 공터로 나갔다.

나무에 기대어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던 비담은 산을 울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노~옴!! 당장 나타나지 못할까?”

“니미, 시끄러워 죽겠네. 요즘 산적은 목소리크기로 뽑나?”

비담은 자신의 수면을 방해한 소음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곧 소음의 주범인 임성필이 그곳에 도착하였다. 태연하게 귀를 후비며 인상을 구기고 있는 비담에게 녹림왕 임성필이 다짜고짜 물었다.

“너냐?”

“뭐가?”

“우리 애들을 저 모양으로 만든 게 너냐고 물었다.”

“응, 나야.”

“죽고 싶으냐?”

“아니.”

“그런데 왜 그런 거냐?”

“뭐가?”

“죽을 생각도 없는 놈이 무슨 이유로 산의 영웅들을 건드렸냐고 물었다.”

“누가?”

“으흐흠, 진정하자.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한테 흥분할 수는 없지.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죽을 생각도 없으면서 왜 우리 아이들을 건드렸냐고 물었다.”

“아, 우리 애들이라고 해야 알아먹을 것 아니야. 산의 영웅들이라고 하니까 헷갈렸잖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뭘?”

임성필의 이마로 굵은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다섯째 부인의 간곡한 충고만 아니었다면 이미 열두 번도 더 폭발했을 임성필이었다.

“참자, 참아. 왜 우리 아이들을 저 모양으로 만든 것이냐?”

“아! 저거? 진작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될 것을 어깨에 힘만 잔뜩 주고 주둥이만 나불대니까 못 알아먹었잖아. 저거 내가 그런 거 아닌데?”

“뭐시라? 분명 방금 전에는 네가 그랬다고 하지 않았느냐?”

“묶은 거만 내가 묶었다고. 저렇게 만든 거는 내가 안 그랬어.”

“그럼 누가 그랬느냐?”

“어떤 여자가 몽둥이를 휘둘러서 저렇게 된 거야.”

“그 년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마을에 있지. 내가 내려가서 잠시 숨어 있으라고 했어.”

“왜 그렇게 시킨 거지?”

“당연히 몽둥이를 휘두르라고 옆에서 부추긴 게 나니까.”

“음, 그러니까 너는 내 부하들을 묶기만 했고, 나쁜 년이 몽둥이를 휘둘러서 부하들이 저렇게 된 것이로군. 너는 단순히 옆에서 부추기기만 했고. 아, 뭐가 이리 복잡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씨발, 두목으로서의 체통, 다 필요 없어.

야, 그리고 너 왜 아까부터 반말이야? 내가 먹다가 흘린 밥알 수만 합쳐도 네가 지금껏 쳐 먹은 밥보다 양이 많은데 자꾸 말 짧게 할래? 말이 짧으면 그만큼 수명도 짧아진다는 무림의 주옥같은 명언도 모르냐?”

“응, 처음 듣는데. 그리고 어차피 아저씨도 반말하고 있잖아. 솔직히 나이 가지고 따지면 아저씨가 명함도 못 내밀 양반이 여기 한 분 있으니까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고. 그나저나 부하들 구하려고 불철주야 달려온 거야?”

비담은 자신의 상단전을 가리키며 베실베실 웃었다. 말싸움에서 기선을 제압하지 못하고 계속 손해를 보자 임성필은 자신의 전매특허인 육두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썅, 호로새끼를 봤나? 어르신이 오냐오냐 봐줬더니 겁 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배 때지를 갈라 창자를 꺼내 줄넘기를 해주랴? 아님 눈깔을 뽑아 구슬치기를 해줄까? 좋게 말할 때 어서 불어라.”

“하하, 아침 반찬으로 마나님께서 걸레를 볶아 오셨나봐. 아주 야무지게 잡수셨어. 그건 그렇고 자꾸 아까부터 왜 그랬냐고 묻기만 하는데 그럼 나도 하나만 묻자. 도대체 왜 진무문이란 문파를 없애고 그곳의 여인 하나를 잡아간 거냐?”

“너부터 말하면 나도 이유를 말해주마.”

“아니야,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어. 사실은 그거 말고 다른 게 무척 궁금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녹림인지 뭔지 하는 단체 말이야. 혹시 거기서는 무식함으로 서열을 정하나? 왜 위로 올라갈수록 더 멍청한 놈이 튀어나오는지 도통 이유를 모르겠네. 어쩌자고 왕두목이란 작자가 사람 하나 잡자고 무식하게 혼자 뛰어올 수 있는 건데? 어떤 놈이 기다리는지도 모르잖아? 엄청 무식할수록 엄청 용감하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뭐 상식이란 걸 뛰어넘으니까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설명 좀 부탁해.”

“흐흐흐, 가소로운 놈. 내가 먼저 왔다는 생각은 못했나 보지?”

“그치? 누가 더 오는 거지? 혼자 온 게 아니지? 어쩐지 너무 무식해보였는데 다행이다. 호, 혹시 그럼 나에게 말을 걸었던 이유가...?”

“흠하하하!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그래, 부하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이제 이 녹림왕이 얼마나 똑똑하고 무서운 사람인지 알았느냐?”

“그래도 왕대가리라 조금 낫긴 하네. 그럼 부하들은 언제 오는 거야? 대장은 벌써 도착했는데 아랫것들이 너무 빠진 거 아니야? 혹시 아저씨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고 어디 숨어서 지켜보는 게 아닐까? 왜 있잖아, 대장이 죽으면 두 번째 대가리가 위로 올라갈 거 아니야. 그치?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 내 말이 틀림없이 맞을 거야. 이건 음모라고. 아저씨는 당한 거야.”

비담이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자 임성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들어갔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다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 이것들이 감히 녹림왕 임성필을 어떻게 보고...나타나면 가만두지 않겠다.”

비담의 이간질에 홀딱 넘어간 임성필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때마침 녹림팔웅을 비롯한 총채의 부하들이 헐레벌떡 도착했다.

임성필은 늦게 도착한 부하들을 향해 불같이 화를 내며 날뛰었다.

“어디서 노닥거리다가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정말 내가 죽으면 한 자리 차지할 심산이냐?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 말을.”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는지 현장에 도착한 녹림팔웅은 가쁜 숨부터 몰아쉬었다. 평소 총채주의 성정이 불같고 무대뽀인 줄은 알았지만 저리 막나갈 줄은 몰랐다. 부하들의 내공과 경공을 감안해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달릴 줄 알았건만 무조건 치고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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