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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154)

15화

“하하, 좋아. 이제 대화가 좀 통하겠군. 자, 왼쪽의 너?”

비담의 지목을 받은 산적이 부동자세를 취하며 크게 대답하였다.

“네.”

“너부터 번호 시작!”

“하나.”

“둘.”

.

.

.

“스물다섯. 끝.”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듭니다. 저쪽에 나무 보이십니까?”

사력을 다해 큰 목소리로 숫자를 외친 산적들이 억울한 표정으로 비담이 지목한 나무를 응시했다.

“보입니다.”

“선착순 10명.”

선착순의 말뜻을 이해 못한 산적들이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을 때. 그중 눈치가 제일 빠른 녀석이 나무를 향해 잽싸게 튀어나갔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산적들이 뭐가 흔들릴 정도로 정신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헉헉, 헉헉.”

비담은 스산한 살기를 피우며 도착한 순서대로 줄을 세웠다. 그리고 가차 없이 11등부터 알차게 조지기 시작했다. 싸움이 끝난 공터에서 또 다시 구슬픈 비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 흐리멍텅한 정신력과 눈치로 험한 세상을 어찌 살려고 그럽니까? 저쪽에 나무가 보입니까?”

산적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암울한 눈을 들어 비담이 지목한 반대편의 나무를 쳐다보았다.

“흐흐, 선착순 7명.”

“아아아악!!!”

이제 산적들에게 지위나 산적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비담이 말한 숫자만 중요할 뿐이었다. 악에 받친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가는 산적들로 인해 공터는 때 아닌 몸살을 앓았다.

달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산적들의 뇌리를 스치는 순간 비담은 선착순을 그만 두었다. 대신 구령과 함께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켰다.

“흐음, 달리느라 다리가 아플 테니 ‘앉았다, 일어났다’를 해서 근육을 풀어줘야 합니다.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을 1회로 하겠습니다. 참고로 마지막 숫자를 말하는 놈은 내 손에 죽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막론하고 마지막 숫자가 나오면 연대책임을 물어 앞서 한 양의 2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총 100회를 실시합니다. 몇 회?”

“100회입니다.”

“대답소리가 작습니다. 몇 회?”

“100회입니다!”

“107회 실시.”

“하나, 둘, 셋...............백 다섯, 백 여섯.”

“백 일곱! 흐업!!”

‘백 일곱’이라는 외침과 함께 공터를 가득 메우는 적막.

마지막 숫자를 외친 산적이 서둘러 입을 막았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나머지 24명의 눈에선 무시무시한 번개가 발사되며 숫자를 말한 산적을 태워버릴 기세였다.

“저런 안타깝군요. 그리 경고를 했는데도 마지막 숫자를 말하다니. 약속대로 맞고 시작합시다.”

비담은 숫자를 말한 산적을 한 쪽으로 손짓하여 불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비담을 따라가는 산적을 동료들은 살벌한 눈빛으로 배웅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살인적인 구타. 급한 볼일을 시원하게 해결한 표정으로 돌아온 비담이 나긋나긋 말했다.

“자, 직장동료의 실수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약속대로 214회를 실시합니다. 몇 회?”

“214회!!!!!!!!!”

“목소리가 마음에 듭니다. 211회 실시.” 

그 뒤로 무려 한 시진(2시간)동안 산적들은 숫자와 함께 행해지는 모든 가혹행위를 견뎌야만 했다. 탈진하여 쓰러지면 바로 날아오는 구타로 인해 마음대로 요령을 피울 수도 없었다. 기절한 채 축 늘어져 있는 채주와 10명의 동료들이 미치도록 부러운 산적들이었다.

정신무장을 완벽하게 끝낸 산적들을 지켜보며 비담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일장연설을 하였다.

“음, 여러분의 눈빛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됩니다. 오늘과 같은 각오와 끈기로 버티면 굳이 산적질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이 되어 한마디 덧붙이면 열심히 살지 않고 계속 동종업계에 종사하다 걸리는 날엔 저랑 한 달 동안 지내며 지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산적질을 계속하고 싶은 산적은 각오하고 하십시오. 참, 그리고 여기 두 번째 대가리가 누구?”

“접니다.”

부채주가 번쩍 손을 들었다.

“너만 남고 모두 해산!”

“해산!”

자유를 되찾은 산적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부채주는 도망가는 전 직장동료들을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저? 모두 갔으니 그만 나오시지요.”

비담의 부름에 한 쪽 수풀이 들썩거리더니 여인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모두 갔나요?”

“하하하, 아마 다시는 선량한 사람의 주머니를 털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 떠났으니 안심하십시오."

“휴우, 다행이네요.”

여인이 수풀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한 비담이 멍하게 서있는 부채주에게 명령했다.

“너는 나와 이 여인을 와호채로 안내하고, 녹림왕에게 최대한 빨리 오늘의 일을 보고하도록. 알았나?”

“옙.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비담과 여인은 부채주의 안내를 받으며 와호채로 향했다.

녹림의 총채가 있는 복호산.

와호채의 부채주는 비담의 엄포에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밤새 달리고 또 달려 복호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녹림왕 철부(鐵斧) 임성필에게 와호채를 덮친 재앙에 대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보고하였다.

“뭐라? 어떤 후레 잡놈이 감히 산중영웅들의 수염을 건드렸다?”

“그렇습니다, 총채주님. 저희들이 끝까지 거칠게 저항하였으나 결국 당하고 말았습니다.”

“으흠, 후천은...?”

“그, 그게 그놈한테 잡혀 묶여 있습니다.”

“이, 이런 고얀. 밖에 아무도 없느냐?”

“부르셨습니까?”

“당장 녹림팔웅(綠林八雄)을 부르거라. 와호채에 있다는 건방진 녀석에게 녹림의 힘을 보여줄 것이다.”

수염이 곤두설 정도로 화가 단단히 난 임성필이 한쪽에 세워놓은 자신의 애병 철부(鐵斧)를 어깨에 메고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총채주의 전갈을 받고 뛰어온 8명의 산적들과 함께 와호채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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