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으음.”
“이보시오? 정신이 드시오?”
“누, 누구신지? 아악!!”
방금 전의 악몽이 되살아났는지 여인이 급히 옷을 추스르며 비담을 잔뜩 경계하였다. 비담은 착잡한 눈으로 여인의 행동을 지켜보며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비담이 뒤로 물러서며 손을 들자 여인은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무에 묶여 축 늘어진 11명의 산적을 발견하고는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비담을 바라보았다. 상황에 대해 대답을 해줄 사람이 비담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인은 설명을 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마침 근처를 지나는 길에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왔더니 글쎄 저 녀석들이 소저를 겁탈하려고 하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잡아다가 묶어 놓았습니다.”
“그럼 저를 구해주신 분이...?”
“하하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니 너무...엥?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는지?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인지...?”
“흑흑, 엉엉엉.”
갑자기 통곡을 하는 여인으로 인해 비담은 영문을 몰라 난감해지고 말았다. 기껏 목숨을 구해주고 음적들의 손에 몸이 더렵혀지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주었건만 어찌 저리도 서럽게 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서럽게 우는지라 달랠 수도 없고, 그저 스스로 울음을 그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무려 일다경(15분)의 시간동안 펑펑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던 여인이 조금씩 울음을 삼키기 시작했다.
“소저? 조금 진정이 되셨습니까? 대관절 무슨 이유로 그리 슬피 우는지 설명을 해주셔야 저도 납득을 하지 않겠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은인에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제 생명을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비담은 갑자기 일어나 절을 하려는 여인을 말렸다.
“그렇다고 제가 절을 받자고 한 이야기는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시고,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리 슬피 우신 겁니까? 저에게 설명하기 곤란하시면 하지 않아도 되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드릴 것이니 한번 시원하게 말씀해보십시오.”
“사실은 저희 언니가 녹림총채에 잡혀가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진무문(眞武門)이라는 조그마한 도장을 하고 계셨는데 얼마 전 녹림왕이라는 자가 도장에 쳐들어와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언니를 납치해 갔습니다. 다행히 저는 외지에 나가 있어 화를 면했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그만...흑흑.”
집으로 돌아와 보았던 그날의 참상이 떠올랐는지 여인은 참았던 눈물을 다시 쏟고 말았다. 비담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죄송합니다. 은인께 계속 추태를 보이는군요.”
“저는 괜찮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렸는지...”
“언니를 제외한 식구들이 모두 당했다는...”
슬픔을 꾹 눌러 참은 여인이 끊겼던 말을 다시 잇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변에 수소문한 결과 다행히 언니는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모가 출중하여 녹림왕이 첩으로 삼기 위해 죽이지 않고 데려갔을 거라는 소문까지 들으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우리 가문을 그리 쑥대밭으로 만들었는지는 둘째 치고 우선은 잡혀간 언니의 안위가 걱정되어 무작정 달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녹림의 총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지라 숲을 헤매다가 산적들을 만난 것입니다. 얌전히 굴면 목숨을 살려준다는 말에 고분고분 저들의 말을 따르면 총채까지 가서 언니를 구할 수도 있겠다는 짧은 생각에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귀에는 분명 소저의 비명소리가 들렸는데요?”
“그것은 저도 모르게 그랬던 것입니다. 언니를 구하겠다는 마음은 강했지만 아직 처녀의 몸인지라 남자들의 음탕한 시선과 옷을 찢고 겁탈하려는 행동에 본능적으로 저항을 했던 것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럼 저를 보고 눈물을 쏟았던 까닭은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목숨을 구했다는 생각에 순간 기쁘기도 하였지만 영영 이대로 언니를 잃거나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그만 왈칵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의 행동으로 인해 많이 놀라셨을 걸 생각하니 정말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제가 백 번 놀라고 천 번 당황해도 상관없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그나저나 상심이 무척 크실 터인데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어찌 감당하려고 그리 무모한 선택을 하신 겁니까? 주위에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까?”
“휴우, 유명하지도 않은 중소문파가 하루사이에 잿더미가 된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지요. 그나마 아버지랑 친분이 있던 어른이 도와주시겠다고 나서주셨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로 보아 분명 무슨 일을 당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흐음...소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제 마음이 더욱 찢어지는군요. 알겠습니다. 녹림왕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슨 이유로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 순 없지만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저를 믿고 이번 일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무, 물론 저야 은인께서 도와주신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겠지만 은인께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이미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은혜를 갚을 길이 막막한데 그런 도움까지 주시면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녹림왕의 무공이 무척 강하다고 들었는데 저의 간절함만으로 어찌 은인을 사지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흐윽흐윽.”
“흐음, 소저께서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허나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셨고, 더불어 녹림왕은 너무 과대평가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고 모두 맡겨주십시오.”
“어, 어찌 하시려고?”
“호랑이를 잡을 능력이 차고도 넘치는 사냥꾼에게 호랑이를 가장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면 뭐라 답하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후후, 바로 호랑이새끼를 잡아다 족치면 됩니다. 자식이 당하면 그 어떤 짐승이라도 눈깔이 뒤집어져 덤비게 되어 있습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하하, 간단합니다. 녹림왕이 산에 사는 한 마리 간사한 호랑이라면 그의 부하들이 바로 자식인 셈이지요. 우리에게는 훌륭한 호랑이새끼가 11마리나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은인의 말씀은 저기 있는 산적들부터 혼을 내자는 말씀이신지요?”
“그렇습니다. 저것들을 조지면 녹림왕도 별수 없이 눈깔이 뒤집혀 제 발로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준비를 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한바탕 근사한 공연을 펼치려면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있어야 제 맛이죠. 그런 의미에서 간단한 준비를 할 것이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비담이 산적들이 묶여 있는 나무로 다가가 그들의 옷을 찢어 눈을 가림과 동시에 강하게 뺨을 쳐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잠시 후, 모든 작업이 끝났는지 비담이 똑같은 모습으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 11명을 감상하며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산적들이 휘둘렀던 도끼 중 여인이 휘두르기에 적당한 무게와 길이를 가진 도끼를 선별하여 머리 부분은 제거하고 자루부분만 가지고 돌아왔다.
“한번 휘둘러보십시오. 무게나 감촉이 괜찮습니까?”
여인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비담이 시키는 대로 몽둥이를 받아 휘둘러보았다.
부우웅, 붕붕.
그래도 나름 무림문파의 여식이라 제법 힘이 실린 몽둥이질이었다. 여인이 휘두르는 모양을 지켜보던 비담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용도를 설명해 주었다.
“하하, 그만하면 됐습니다. 제가 공연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징소리가 제격이라고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예,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저기 서 있는 산적들이 보입니까?”
“네, 보여요.”
“저자들의 다리사이에는 방울이 두 개 달려 있습니다. 물론 소저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다리사이를 정확하게 겨냥해 젖 먹던 힘까지 짜서 몽둥이를 힘껏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시면 됩니다. 그러면 아마도 심금을 울리는 장엄한 징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제 말을 이해 하셨습니까?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도 그건 어디 까지나 악기가 부실한 것이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하, 하지만 어찌?”
“허허, 무얼 망설이십니까? 소저를 겁탈하려던 음적들입니다. 저런 놈들은 평생 남자 구실 못하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국가나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 죄책감 느끼지 말고 시원하게 올려치세요. 참고로 산에 사는 간사한 호랑이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울리면 더욱 좋다는 것만 명심하고 어서 공연을 시작합시다.”
거듭 재촉하는 비담 때문에 여인은 어쩔 수 없이 산적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눈을 질끈 감고 첫 번째 산적의 낭심을 향해 있는 힘껏 몽둥이를 올려쳤다.
퍼억
“으아아악!!!”
호두알 깨지는 소리와 함께 온 산을 울리고도 남을 정도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을 가린 천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나머지 10명의 산적은 그저 두려움에 벌벌 떠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