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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154)
  • 12화

    제 3 장 녹림왕 철부(鐵斧) 임성필

    길천과 상의를 마친 비담은 장안(長安)을 다음 목적지로 정했다. 봉분도 만들지 못한 사부의 무덤이 마음에 걸려 가서 인사라도 드리고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큰 도시로 가면 흑막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수월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장안을 선택한 것이다.

    난주에서 보낸 한 달 동안 내공을 반 정도 채웠기에 여행을 떠나는 두려움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경공도 펼치지 않고 유유자적 느긋하게 어느 산속을 지나는 순간.

    “꺄~악!!! 살려주세요.”

    절박한 여인의 비명이 온 산을 울렸다.

    “뭐, 뭐지?”

    “제발 누구 없어요? 아악!”

    절규하듯 울려 퍼지는 여인의 비명소리에 이어 바로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숲속은 다시 잠잠해졌다.

    “어? 저쪽에서 들린 것 같은데...”

    예삿일이 아니라 판단한 비담이 재빨리 신법을 발휘하여 비명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비명소리가 울렸던 현장이 비교적 가까운 곳이어서 신법을 전개한 비담은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 벌어지려는 장면에 비담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바닥에 젊은 여인 하나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혼절해 있었는데 상의는 모두 풀어헤쳐져 가슴이 드러나 있고, 하의도 위로 말려 올라가 뽀얀 허벅지며 음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쓰러져 있는 여인의 몸 위로 털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 하나가 자신의 양물을 막 집어넣으려 시도하고 있었다. 옆에서 사내가 하는 양을 킬킬거리며 지켜보는 무리들도 있었다.

    “동작 그만!”

    갑자기 터져 나온 소리에 막 자신의 양물을 집어넣으려던 털복숭이 장한의 동작이 반사적으로 멈추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뭐냐? 어떤 새끼가 감히 와호채주(臥虎寨主)인 괴력도 후천 어르신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아 괴력도고 나발이고 그딴 거엔 관심 없고, 거기 털복숭이 아저씨? 두리번거리지 말고 여자 위에 올라탄 당신 말이야. 거 웬만하면 좋게 말할 때 어서 내려오지. 보잘 것 없는 당신 무기도 얼른 바지 속으로 회수하고.”

    “저, 저놈이 실성을 했나? 아님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먹고 온 거냐? 감히 어디서 하늘같은 채주님께...”

    “모두 공격하라. 채주님을 욕한 새끼를 곱게 죽이지 마라.”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더니 비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제법 몸이 가벼운 것이 삼류도적은 아닌 듯싶었다. 각종 무기들이 햇볕에 반사되어 날카롭게 빛났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비담은 그저 실실 웃고만 있었다.

    “후후, 하여튼 두목이란 작자가 생각이 없으니 아랫것들도 저 모양이지. 목 위가 허전할까봐 머리를 이고 다니는 게 아니잖아? 그럼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살아야지. 오냐, 강호출도 기념으로 화끈하게 밟아주마.”

    허리에서 부채를 꺼낸 비담이 곧 화류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부채의 움직임에 분분히 몸을 날린 도적들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비담은 도적들의 머리를 겨냥하여 한 번에 한 놈씩 정확하게 가격하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일반인과 달리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정도 수준이면 식후 간식거리도 되지 않는 허약한 놈들이라 초식도 사용하지 않았다.

    퍽, 퍽, 퍼억. 퍽.

    쿵, 쿵. 쿠웅. 쿵.

    도적들은 그저 눈앞에 뭐가 번쩍하는 것만 보았을 뿐 어떻게 자신이 당했는지 알지도 못할 정도로 비담의 부채는 신출귀몰 빨랐다. 그래서 그저 멍하게 서 있다가 한 대 맞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가볍게 산책을 하듯 날파리들을 쫓아 버린 비담이 부채를 펼쳐 살랑살랑 흔들며 천천히 후천에게 다가갔다.

    서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괴력도 후천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믿음직스러운 자신의 부하 10명이 어찌 숨 한번 들이쉬는 짧은 순간에 모두 쓰러져 바닥을 기고 있단 말인가. 후천 자신도 부채를 흔들며 다가오는 사내의 움직임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한 번의 신위로 완전히 우위를 점한 비담이 예의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후천을 불렀다.

    “어이? 거기 털복숭이 양반? 내려오라고 한 게 언제인데 아직도 그러고 있나?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은 거야?”

    “다, 당신은 누구요? 왜 갑자기 나타나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 것이오?”

    잔뜩 쪼그라든 양물이 괴력도 후천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쥐어짜듯 비담에게 항의하는 후천이었다.

    “어? 여기가 털복숭이 영업장이야? 몰라서 미안해. 사과했으니까 됐지? 그건 그렇고 나는 셋까지 밖에 셀 줄 몰라. 성격도 무지 더럽고. 무슨 말인지는 알아서 접수하길 바랄게. 그럼 시작한다. 하나...둘...”

    “이런 썅! 똥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선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야.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 몰라도 천하의 괴력도가 이대로 당할 것 같으냐?”

    급하게 바지를 치켜 올린 후천이 엄청난 대도를 휘두르며 비담에게 달려들었다. 괴력도라는 별호에 걸맞게 공기를 가르는 도의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다. 하지만 엄청난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던 대도는 귀찮은 벌레를 쫓듯 가볍게 휘두른 비담의 부채에 간단히 가로막혔다. 후천은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쥐어짜서 도를 앞으로 밀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전혀 꿈쩍하지 않았다.

    “이, 이, 이, 익!!”

    안간힘을 쓰는 괴력도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무기력해 보였지만 비담은 여자를 건드리는 음적은 결코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다. 최소 다시는 그 짓을 못하도록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이런 속내와는 달리 겉으로는 웃으며 계속 괴력도의 성질을 박박 긁는 비담이었다.

    “하하하, 아저씨 지금 얼굴로 싸워? 하기야 지금 아저씨 얼굴만 놓고 보면 천하제일 고수인데. 못 생긴 걸로 말이야. 그리고 자기 입으로 굳이 자신을 똥개라 밝히는 저의가 뭐야? 제발 아저씨가 여기 대가리니까 생각 좀 하고 사는 게 어떨까요? 그러니 붙어먹는 부하들도 저 모양 저 꼴이지 않습니까. 푸하하하.”

    후천이 얼마나 용을 썼는지 덥수룩하게 덮은 털 사이로 하나둘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으나 이와는 반대로 상대하는 비담은 여유가 넘쳐흐르다 못해 박장대소까지 터트리고 있었다.

    “나, 남자는 오로지 칼로만 대화를 나눈다. 어디서 그따위 망발을...으악!!”

    부채와 도가 맞물린 상태에서 갑자기 자유로운 비담의 발이 후천의 낭심을 향해 파고들었다. 후천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보법을 밟아 뒤로 신속하게 물러난 후천은 비겁한 것이 아닌 그냥 본능이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남자들만 아는 본능.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다가 마누라의 얼굴이라도 본 것처럼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후천이 비담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고도 네놈이 사내라 할 수 있느냐? 싸움을 할 때도 상대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거늘 같은 남자로서 거기를 찬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너도 거길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그 고통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다른 데 전부 놔두고 굳이 거기를 차는 이유가 뭔데?”

    “아, 거참 되게 시끄럽네. 자꾸 떠들면 잘난 그 주둥이부터 차는 수가 있어. 막말로 그럼 백주대낮에 덜렁덜렁 꺼내놓고 함부로 쓰는 당신은 뭔데? 그렇게 중요한 거면 잘 모셔야지 아무렇게 막 굴리나? 괘씸하게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는 물건한테 따끔한 교훈 좀 주겠다는데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좋다. 아주 상종 못할 새끼구나. 그냥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자. 으아악!!”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고 이판사판 덤비는 후천을 향해 비담의 부채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짧고 간결한 소리와 함께 괴력도 후천의 신형이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잠시 후, 후천의 손에 들린 커다란 도에 균열이 가며 그대로 반 토막이 나버렸고, 서서히 그의 몸이 모로 쓰러졌다. 한 바퀴를 선회하고 다시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부채를 잡은 비담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부채를 접어 허리에 꽂고 쓰러져 있는 후천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흐음, 이리 허약해서 어찌 산채를 운영한단 말인가. 힘을 조절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많이 강했던 모양이네. 그나마 목숨은 끊어지지 않아 다행이야. 앞으로는 각별히 조심해야겠어.”

    비담은 후천을 비롯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10명의 산적들을 그들의 상의를 벗겨 근처 나무에 단단히 묶어놓고 정신을 잃은 여인에게 다가갔다.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말해주듯 여기저기 옷도 찢어지고 온 몸에 상처도 남아 있었다. 가장 우려했던 머리의 상처는 다행히 피가 멎어 있었고, 걱정했던 것보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여인의 가슴과 하의를 다시 원상 복귀시킨 비담이 혼절해 있는 여인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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