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알았어요, 형님. 그럼 뭐부터 시작할까요?”
능수능란하게 길천을 구워삶은 비담이 손을 싹싹 비비며 길천의 옆으로 달려갔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이제 썩은 동아줄이건 훌륭한 줄이건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둘의 기묘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비담이 단순히 색공으로 치부했던 흡정색공의 진정한 가치는 의외로 금방 드러났다. 색공의 진가를 확인한 비담은 무시했던 마음을 싹 내다 버리고 그날부터 성심을 다해 색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름 비담이 아부신공을 극성으로 펼치며 입안의 혀처럼 굴었기에 길천도 처음의 섭섭했던 마음을 모두 버리고 성심을 다해 지도를 해주었다. 그렇게 둘의 사이가 차츰 돈독해지자 길천은 크게 인심을 써서 부채를 무기로 하는 자신의 독문무공도 전수를 해주었다.
화류선(花流扇)이라 불리는 자신의 애병이 없어 무공을 가르치는 데 조금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그래도 어설픈 부채를 하나 구해와 부채의 투로와 신법, 보법까지 아낌없이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비담은 색공과 선법, 방중술과 경신법까지 종이가 물을 흡수하듯 길천의 모든 무공과 지식을 아낌없이 빨아 들였다.
세월은 열어 놓은 창문의 틈 사이를 지나가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벌써 안가에 들어와 지낸 지도 10년이 흘러 어느새 비담은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우람하진 않지만 찰지게 쫘악쫘악 갈라진 근육하며 섬세한 표정과 동작까지 여자들의 방심을 마구 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비담의 상단전에서 흐뭇하게 성장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길천의 감회 역시 새로웠다. 마치 걷지도 못하고 보채는 핏덩이를 받아 사내구실 제대로 하는 훤칠한 성인으로 만든 기분이었다.
“우와, 너의 성취가 장난이 아닌데. 강신귀공도 절정에 달해 이제 마음대로 나의 힘을 부릴 수도 있고, 내가 전수한 색공과 무공도 대성을 하였으니 이제 무림에 출도 하는 일만 남았구나. 나도 이곳에 앉아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할 수 있다니 마치 꿈만 같구나. 썅!! 어떤 새끼들인지 정말 긴장 바싹 하고 너를 기다려야 되겠어. 이곳에 있는 나도 너를 보면 다리가 후덜덜 떨리는 데 막상 너를 직접 보는 녀석들은 오죽하겠냐. 아마 왕년의 천마랑 검제 그 새끼들이 모두 덤벼도 너한테는 그냥 발릴 거다. 내 확실히 장담한다. 그나저나 언제 떠날 거냐? 이거 손발이 근질거려서 더는 못 기다리겠어.”
“하하하. 이 모든 성취가 다 형님의 조력 덕분이지요. 저야 형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것밖에 더 있나요? 당연히 떠날 채비가 끝나면 떠나야지요. 지긋지긋한 산 속에서 저와 함께 지내느라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사부와 사문을 괴롭혔던 정파의 구린 영감들을 비롯해 냄새나는 사파의 마두부터 잡 문파에 속한 기타 등등이 저랑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꿈속에서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하고 저주할 정도로 복수를 해야지요.”
“와우! 상상만 해도 짜릿하고 신나 미칠 지경이야. 그래, 내가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거야. 무미건조한 산속 생활이 아니라 찬란하게 빛나는 바깥세상의 팔딱팔딱 뛰는 삶이라고. 가서 여자도 실컷 품고 그동안 너를 괴롭혔던 놈들의 대가리에 교훈도 단단히 새겨주고 현란하게 돌아다니자.”
“그런데 형님?”
“응? 왜 그러나 아우님?”
“어디부터 가야하나요?”
순간 궁전을 가득 채우는 적막. 둘은 말똥말똥 서로를 바라보며 꿀을 단지채로 먹고 말았다.
“그, 그야 이 몸뚱이가 네 거니까 당연히 네가 정해야 되지 않겠냐?”
“그렇죠? 제가 정하는 게 맞겠죠?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목적지를 정하려니 생각이 안 나네요. 형님은 어디부터 갔으면 좋겠어요?”
“나? 가만...그래!!! 좋은 곳이 생각났다.”
“거기가 어딘데요?”
“우선 화류선부터 찾아야지. 그걸 찾아야 제대로 화류선법을 펼칠 것 아니냐.”
“이야!! 역시 형님이십니다. 좋아요. 그럼 화류선부터 찾으러 가죠. 근데 화류선이 지금 어디 있나요?”
“당연히...모르지. 300년 전에 사용했던 무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무슨 수로 알겠냐?”
“예? 그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화류선을 찾으러 가자고요?”
“야 인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얼굴이 못생긴 여자는 뒤에서 하면 그만이야. 다 생각하면 방법이 있는 거 아니겠냐. 우선은 흑막(黑幕)을 찾아간다. 정보를 다루는 데는 도가 튼 곳이니까 그곳으로 가서 화류선의 행방을 알아보는 거다. 물론 300년 전의 흑막이 지금도 남아있다면 말이지.”
“휴우, 그래도 아주 돌파구가 없는 것은 아니네요. 그럼 그 흑막은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나요?”
“당연히...모르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간판 걸고 문지기 두고 떳떳하게 ‘여깁니다, 어서 오십쇼, 손님.’ 하며 장사를 하겠냐? 그냥 하산하는 대로 아무나 먼저 걸리는 놈을 잡아 족치는 수밖에.”
“그래요, 그냥 막무가내로 움직이고 보는 것도 은근 매력 있잖아요. 그냥 출발합시다.”
“좋은 자세야. 아주 바람직해. 나는 너의 그런 저돌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어. 그럼 여자가 목욕재계하고 침상에 누워 손짓하는데 더 이상 무얼 망설이겠냐. 출~발!!!”
그렇게 둘은 10년 동안 정들었던 안가를 뒤로 하고 간단한 짐만을 꾸린 채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천산에 자리를 틀고 앉은 천마신교의 본거지는 일부러 멀리 돌아서 피해갔다. 떼로 덤비는 데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까. 아직은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비열하다 손가락질을 해도 충분히 감수하기로 합의를 본 둘은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신나게 무림을 향한 첫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