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54)
  • 3화

    “알았습니다. 고위의 영체인 당신에게 함부로 말한 것 용서하시오. 하지만 제발 높은 영력에 걸맞게 체통을 지켜주시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피차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이 고역인건 마찬가지니까 조금씩 양보합시다. 그런 의미에서 그만 의자에서 내려오는 게 어떻소? 거기 앉기에는 당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여, 여부가 있겠나? 안 그래도 자리가 딱딱한 것이 영 맞지가 않아 불편하더라고. 그나저나 무슨 이유로 천마를 부르려고 했는지 물어봐도 괜찮겠나?”

    “나는 귀문이란 문파의 제자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귀문은 강신귀공이라는 특별한 공부를 통해 상단전을 연마하여 귀기를 다스려 힘으로 사용하였지요. 허나 시대가 바뀌고 가치관이 변하였다고 정파나 사파, 허접쓰레기의 잡 문파들까지 나서서 난리를 치며 무림공적으로 몰아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않습니까. 귀신 연구하는 게 무슨 잘못입니까?”

    “물론 아니지. 멍청한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그 모양이지. 나는 충분히 자네의 심정을 이해하네. 계속 말해보게.”

    “고맙습니다. 그래도 귀신이라 말이 통하는 군요. 아무튼 그래서 사부랑 저는 준비를 했습니다. 강한 힘을 가진 원영신을 바탕으로 녀석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문파로 인정을 받자고요. 그래서 10년의 세월동안 모진 고난을 참아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사부는 돌아가시고 천마의 원영신 대신 당신이 앉아 있고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화가 안 나게 생겼습니까?”

    “아, 그래서 자네가 그리 노발대발 지랄을 했구먼. 하지만 사부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탁월한 선택을 하였어. 그런 목적으로 원영신을 초대한 거라면 나만한 적임자도 없지. 칼 들고 설칠 줄만 아는 천마 그 후레 잡놈보다는 내가 월등히 유능하고 우아하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네. 어떤가? 인과율을 거스를 수도 없고 이미 계약을 한 마당에 무엇을 더 망설이는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네의 소원을 풀어주도록 내가 성심성의껏 도우겠네. 나와 함께 하겠는가?”

    “휴우, 할 수 없지요.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어떻게 합니까?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지요.”

    “뭐, 뭐시라? 썩은 동아줄? 자네 표현을 해도 꼭 그 따위로 밖에 못 하나? 젊은 사람이 상상력과 어휘 선택에 하자가 많군. 걱정하지 말게. 썩은 동아줄인지 훌륭한 줄인지는 금방 판가름이 날 테고. 그리고 시간이 생기는 데로 자네의 말본새부터 교정을 해주도록 하겠네. 다시 의자에 앉아도 되겠는가?”

    “가서 앉으세요. 남는 자리 어쩌겠습니까? 그나저나 아까부터 거슬리게 자꾸 천마, 천마 그러는데 무슨 인연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많이 알면 다친다. 그냥 넘어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그냥 천마가 활동하던 시기에 나 역시 녀석과 쌍벽을 이루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검제, 천마, 도색성 요렇게 세 명을 당시의 사람들이 천외삼성이라며 경외시하고 우러러보았지. 알겠나? 나 보기보다 대단한 놈이었어.”

    “에이, 어디서 약을 팔려고...내가 알고 있기로 검제는 고금제일검으로 불리었던 화산의 비천검 설표를 말하는 것이고, 천마는 고금제일마로 불리었던 천마신교의 구자혁이 아닙니까? 그렇게 둘을 합쳐 하늘을 바치는 두 기둥, 즉 천주이성이라 불렸다는 것은 들어보았지만 왜 슬쩍 거기다 당신을 끼워서 파는 거요? 아무리 300년 전의 이야기라고 해도 여기 와서 그리 사기를 치면 못 쓰죠.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런 망할. 공동운명체라고 오냐오냐 해주니까 아주 기어오르는구나. 씨발, 나만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소멸되어도 괜찮다. 그러니 내 자존심은 건드리지 마라. 아주 다 엎어 버리고 그냥 팍 같이 뒈지는 수가 있어.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내가 나타나면 명함도 못 내밀고 박박 발밑을 기던 것들이 검제랑 천마였어. 이거 왜 이래? 아우 답답해 미치겠구먼. 확 까발려서 보여줄 수도 없고.”

    길길이 날뛰는 길천을 보며 비담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 정도로 억울해 하는 것을 보면 영 맹물이 아니라 뭔가 한 수를 숨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던 것이다. 비담의 영체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도색성 길천에게 공손한 태도로 살갑게 물었다.

    “저, 정말이세요? 정말 검제랑 천마가 동시에 덤벼도 이길 자신이 있으세요?”

    “당연하지. 어디 그런 허접한 놈들이랑 나를 비교해.”

    “근데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어째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예요? 저 역시도 검제나 천마는 알아도 어르신의 존성대명은 오늘 처음 들어본 걸요?”

    “그, 그야 당연히...”

    말끝을 흐리고 자꾸 시선을 피하는 길천의 모습에 잔뜩 의구심을 품은 비담이 집요하게 물었다.

    “어째서 말씀을 못 하세요? 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냐고요?”

    “그, 그건 내가 색성이었기 때문이지. 주로 여자들과 동침을 통해 발산되는 색기(色氣)를 내공으로 바꾸는 흡정색공(吸精色功)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괄시하고, 멸시하고, 경시하고, 천시하고, 무시하고, 등한시하고, 업신여겼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내공만큼은 천하무적이었고, 내가 휘두르는 화류선(花流扇) 한 방이면 검제랑 천마도 한 수 양보하고 물러나곤 했지. 내가 구구절절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아서 그렇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인정해 주었어. 이거 왜 이래?”

    “색기요? 그런 것도 있나요. 내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살다 살다 이제 별의별 소리를 다 듣는구나. 그냥 거짓말 좀 했노라 왜 말을 못하냐고. 시원하게 말을 하면 될 것을 잠깐이라도 기대했던 내가 미친놈이지. 에이, 퉷.”

    “이런 망할 놈의 새끼가 색기를 무시해? 내 분명 말했지,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미묘한 단어 선택에는 주의하라고. 색기가 어때서 그래? 천지만물에는 모두 풍부한 기가 내재되어 있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남녀가 서로의 양기와 음기를 교합하며 발생하는 순수한 기운이 바로 색기다, 이 새끼야. 주둥아리 놀리려면 뭘 알고나 나불거려. 너 천마랑 검제가 왜 나를 못 건드린 줄 알아? 귓구멍 단단히 파고 경청하여라.

    우선은 나한테 힘이 있었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 한 거다. 그리고 나를 무림공적으로 몰아 처단할 만한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세를 규합하지도 못한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디서 허접 색마들하고 고귀한 도색성을 싸구려 도매급으로 동급 취급이야? 네 사부가 그리 가르쳤냐? 이거 왜 이래, 이래 보여도 나 깨끗한 놈이야. 아무 여자나 막 동침하고 건드리는 동네 날건달 새끼들 하고는 차원이 달랐어. 나 생각보다 고귀하고 우아하며 고상한 놈이었다고. 썅!!”

    씩씩거리며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길천을 보며 비담의 한숨은 더욱 깊어져 갔다. 예로부터 빈 수레가 요란하고, 얕은 시냇물이 졸졸 시끄럽게 흐른다 하였다. 입으로 한참 떠드는 모습에 그나마 남아있던 마지막 믿음과 기대마저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젠장, 이놈의 팔자. 천마의 무공을 익혀 천하를 주름 잡을 줄 알았더니 개뿔 여자 등이나 쳐 먹고 살게 생겼으니. 흡정색공? 개나 쳐 먹으라 그래. 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냐고!!!’

    그날 이후 비담은 더럽게 꼬여 버린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고 한탄하며 하루하루를 그저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도 없이 연명하였다. 귀신을 연구한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무림공적이 되어버린 자신의 문파였다. 그런데 길천의 힘을 빌려 색공을 익히고 뭇 여인들을 농락한다면 더한 대접을 받고 쫓겨 다녔으면 다녔지 지금보다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비담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고 절망이었다.

    요즘은 자꾸 나타나 자신을 꼬드기는 길천의 모습도 보기가 싫어 상단전마저 폐쇄해 버렸다. 이제 사부의 염원과 문파의 미래는 저만치 계곡을 떠내려가는 나무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한 세상 멋지게 살고 무림을 휘저으며 영웅으로 대접 받으며 보란 듯이 살고 싶었는데. 자꾸 하늘만 보면 눈물이 흐르는 비담이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한 달의 시간이 흐르자 비담의 마음에도 균열이 생기며 변화가 찾아왔다. 차라리 이렇게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고꾸라질 바에야 무림에 일진광풍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침이라도 한 번 뱉어보고 싶다는 작은 열의가 생겼던 것이다. 여인들과의 교접을 통해 생기는 색기를 내공으로 만든다는 설정 자체가 허무맹랑하게 보이기도 하였지만 길천의 말대로 내공이 쌓이기만 하면 기침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문파와 사부를 핍박했던 무림 문파들의 여자들을 대상으로 내공을 쌓으면 그것도 나름 복수가 되겠다는 생각도 영향을 끼쳤다. 다시 마음을 되돌린 비담이 폐쇄했던 상단전을 개방하여 길천과 마주 앉았다. 길천은 일방적으로 궁전을 폐쇄한 비담의 처사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며 싫은 내색을 팍팍 풍기며 앉아 있었다.

    “치, 보란 듯이 궁전의 문을 닫고 나갈 때는 언제고 다시 찾아온 이유가 뭐냐? 엄연히 이 몸과 궁전의 주인은 너지만 같이 사는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내가 한 달 동안 얼마나 심심했는지 아냐?

    너는 그래도 바깥세상이라도 보면서 외로움을 달래기나 하지. 난 뭐냐? 나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도대체 이 깜깜한 곳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하냐고? 뚫린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봐. 꿀 먹은 벙어리마냥 거기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단단히 토라졌는지 길천의 음성이 파도를 그리며 위아래로 넘나들었다. 비담은 자신이 부탁하러 온 처지에 또 다시 싸움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고분고분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미안해요. 나도 나름 인간인데 고민 정도는 해야 뭔가 있어 보여서 그랬던 거예요. 그리고 누구에게나 비밀 한 두 개는 있잖아요. 그래서 잠시 궁전을 폐쇄했던 거니 마음 넓은 형님이 이해해 주세요. 참, 형님이라 불렀다고 또 삐치실 건 아니죠?

    내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마땅한 호칭이 없더라고요. 나이로 보면 어르신이라 해야 하는데 생긴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르기가 어색하고, 그렇다고 돌아가신 스승님을 생각해서 사부라 부르기도 그렇고, 연배가 있는데 친구로 지낼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한 게 형님이라는 호칭이니까 알아서 접수하세요. 전 더 이상 호칭가지고 고민하기 싫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이렇게 찾아온 용건은 그 색공 있잖아요? 형님이 말한 색기를 이용해 내공을 모은다는 그 요상한 거요. 그거 좀 가르쳐 달라고 찾아왔어요.”

    “언제는 싫다며? 그리고 뭐? 요상한 거? 그게 지금 부탁하러 온 사람의 태도냐?”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요. 남자가 쪼잔 하게 여러 이유 달면서 거절하지 말고. 하기야 별 볼 일 없는 무공이 무슨 절세무공이라도 되는 양 심하게 허풍을 치셨으니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인데 차라리 잘 됐네요. 더 이상 사는 게 재미도 없고 그냥 계곡에 빠져 죽는 게 낫겠어요. 이대로 사람들 눈 피해 다니면서 맥없이 살기도 싫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천 년 만 년 살겠어요? 그렇죠?

    그나저나 괜히 죄송하네요. 잘 살고 있는 형님을 사부가 왜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저랑 같이 저승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긴 여행이나 떠나시죠.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너 이 새끼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왜 한 달 만에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 거야. 나랑 도대체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러는 거냐고. 알았다. 가르쳐 줄 테니까 당장 꼼짝 말고 그 자리에 멈춰. 나 역시 이대로 허망하게 소멸되기는 싫으니까 너랑 한 배를 타마. 대신 앞으로 한번만 더 간보면 그때는 정말 너 죽고 나 죽는다. 그리고 무공에 대해 토를 달면 그때는 국물도 없을 거니까 알아서 처신 잘해.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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