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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154)

2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으나 미동조차 없는 것이 매우 심각해 보였다. 그리고 주변에 세워진 묘비들과 어우러지며 더욱 을씨년스러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태양이 하늘의 정점에 올라 힘을 과시할 무렵.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소년이 움찔하며 깨어났다. 하지만 큰 충격의 여파가 남았는지 쉬이 몸을 가누지는 못하고 미약한 신음만 뱉었다.

“으.....음!!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자, 잠깐 사부님은...?”

그제서야 온전히 정신을 차린 소년이 벌떡 일어나 사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의 옆에 죽은 듯 누워있는 사부를 발견하고 소년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대법을 시행하느라 기력이 쇠해져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사부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순간 소년의 절규가 공동묘지를 찢어발기며 퍼져나갔다.

“안 돼!!! 사부님, 이대로 돌아가시면 안 돼요! 어서 정신을 차리세요. 흑흑.”

소년의 비통한 절규는 결국 눈물로 바뀌어 흘러 내렸다.

한동안 슬픔에 젖어 있던 소년이 일어나 사부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대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어 자신은 원영신과 무난하게 계약을 끝냈다. 아직 자신의 상단전 궁전에 앉아 있는 원영신이 천마인지의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으나 계약을 마쳤다는 사실은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대법이 무사히 끝났다는 말인데 어째서 사부는 저리도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부모처럼 자신을 보살펴 주고 이끌어 주었던 사부의 죽음 때문에 잊고 있었던 사실들이 계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의문을 풀기에는 장소나 시기가 적당하지 않았다. 사부의 장례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의혹들은 가슴 속에 묻어 두기로 하였다.

그렇게 의혹들을 접어 두고 사부의 시신을 묻기 위해 땅을 파는 동안 소년은 한 쪽 가슴이 무척 시렸다. 마음 같아서는 사부의 장례를 잘 치르고 싶었으나 무림공적으로 쫓겨 다니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간소하게 무덤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훗날 자신이 힘을 얻게 되면 해결될 것이기에 봉분도 없는 무덤이 완성이 되자 씁쓸한 마음을 접고 급히 묘지를 벗어났다. 행여나 사람들의 눈에 띄어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반드시 사부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수련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는 순간 사부님의 염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더불어 사문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걷어내고 당당히 무림의 문파로 인정을 받겠습니다. 부디 그곳에서 편히 지내십시오.’

소년은 사부의 무덤을 향해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 번 확고하게 다진 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대파산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수년 전부터 사문의 재산을 탈탈 털어 마련한 안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이 완료되면 그곳에서 지내기로 이미 사부와 약조가 된 상태였다. 대파산맥에 있는 이름 모를 설산의 안가에서 앞으로 세상의 눈을 피해 천마와 함께 수련을 할 계획이었다.

소년은 낮에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묘지나 낡은 사당에서 잠을 청하고, 주로 밤에 이동하였다. 소년이 있는 장안에서 대파산맥까지는 적게 잡아도 3개월은 족히 걸어야 하는 거리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신귀공을 펼치기에는 여의치가 않았다. 아직 귀기를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원영신과 계약을 맺은 것도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사용했다가는 시작도 하기 전에 발각이 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숨기고 천천히 안가를 향해 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석 달 후.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대파산맥의 초입에 당도한 비담이 밝게 웃었다. 두툼하게 옷을 입은 비담의 모습이 제법 쌀쌀한 주변의 날씨를 짐작케 해주었다. 대륙은 지금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엄청난 높이와 위용을 자랑하는 산맥은 줄줄이 머리에 눈을 얹고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 도도한 자태를 자랑하는 산을 향해 비담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발을 들여 놓았다.

밤마다 찾아오는 엄청난 추위를 견디고 산에서 야영을 하며 다시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봉우리의 눈이 녹아 만든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걷던 비담이 드디어 교묘하게 수풀에 가려진 집 한 채를 발견하였다.

수년 전에 마련한 귀문의 안가가 바로 이곳이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찾아오느라 내심 많은 걱정을 하였지만 다행히 하늘의 보살핌인지 무사히 도착한 비담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안가에 도착한 비담은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엉망이 되어 있는 집을 수리하며 수련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비담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인지 집에 어느 정도 훈기가 돌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비담은 깔끔하게 정리된 주변의 환경을 만족스럽게 돌아보며 이제 자신의 상단전에 잠들어 있는 원영신을 깨우기로 마음먹었다.

고금제일마로 불리었던 천마 구자혁의 원영신.

비담은 무림의 전설이었던 사나이를 드디어 만난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왔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가부좌를 튼 비담이 상단전을 열고 입성하였다.

상단전을 연다는 것은 몸은 가사상태에 빠지고 자유롭게 영혼만 빠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체만 생성되어 자신의 육체에 마련된 상단전의 궁전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가사상태에 빠진 몸에 충격이 가해지면 영체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대법을 시행하는 동안 사부가 주변의 상황에 극도로 민감했던 이유도 이러한 내막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혼 대 영혼으로 처음 마주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비담의 영체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행동하였다. 궁전에 들어선 영체는 상석의 의자에 앉아 있는 고위의 원영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였다.

“비담이 삼가 천마의 혼을 뵙습니다. 저와 계약을 맺고 머물러 주신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신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원영신이 부르르 몸을 떨며 깨어났다. 비담이 안가로 향하는 동안 상단전을 폐쇄하였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지금 막 정신을 차린 것이다.

화려한 장삼을 몸에 걸친 원영신의 눈에 존경의 염을 가득 담아 자신을 쳐다보는 영체가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영체를 확인한 원영신은 기분이 몹시 상했는지 거칠게 반응하였다.

“니미, 남자잖아. 네가 나를 이곳으로 부른 장본인이냐?”

첫 대면부터 쌍욕을 내뱉는 원영신을 보며 비담의 영체는 당황하고 말았다.

“남자요? 당연히 저의 육신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문제가 많지. 천하의 도색성(桃色聖) 길천이 냄새나는 남자의 육신에 깃들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느냐? 씨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다시 한 번 묻겠다. 양물달린 네 녀석이 나를 이곳으로 초대한 장본인이 맞느냐? 네놈의 육신을 고자로 만들어 길바닥에 버리기 전에 바른대로 고하거라. 너냐?”

“자, 잠깐만. 도색성 길천? 대관절 당신은 누구요? 분명 사부님께서는 천마 구자혁의 원영신을 초대한 것으로 아는데 어째서 당신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이요?”

“음, 천마 구자혁?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의 이름은 왜 들먹이는 거야? 너 진짜 고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경험해보고 싶은 거야? 그리고 나를 초대한 사부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 새끼 면상이라도 한 번 구경해야 속이 풀리겠구나. 나만의 왕국에서 잘 살고 있는 나를 굳이 이곳으로 끌고 온 이유가 무엇인지 꼭 들어야겠으니 당장 데리고 오너라.”

“사부님께서는 대법이 끝남과 동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알만한 분이 왜 그러십니까? 도대체 돌아가신 분을 굳이 만나겠다는 저의가 뭡니까? 그곳에 앉아 모든 상황을 지켜보신 게 아닙니까?”

“뭐? 뒤졌다고? 가만...그럼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던 힘의 정체가 결국 녀석이 죽으면서 뿜어내었던 강한 영력이란 말인데...그럼 앞뒤가 맞는구나. 이런 썅. 나중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나저나 나를 이리로 끌고 온 이유가 무엇이냐?”

“그걸 왜 저한테 물어 보십니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왜 여기 끌려와 거기 앉아 있는 것인지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허어, 사부나 그 새끼의 제자나 귀하신 몸을 초대해 놓고 나 몰라라 하는구나. 썅, 그럼 나와의 계약은 왜 이루어진 거냐? 난 분명 승낙한 기억이 없는데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저는 사부님의 분부에 따라 초대된 원영신과 계약을 맺었을 뿐입니다. 그게 천마 구자혁님이 아닌 당신이라 많이 당황스럽고 기분이 더럽네요. 니미, 한 번 맺은 계약은 파기도 불가능한데 어쩌자고 당신 같은 개차반이 걸려들었는지. 에효, 운도 지지리 없지. 내 실력이 미천하여 원영신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사부님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이리 뒤통수를 얻어맞을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뭐? 개차반? 네가 단단히 돌았구나. 감히 상위의 영력을 지닌 원영신에게 그런 망발을 늘어놓다니 더 이상 살기가 싫은 모양이구나.”

“그만 지랄하세요. 저도 알만큼 다 알거든요. 이미 계약이 체결된 이상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도 곱게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굴 바보로 아나? 왜? 여기서 우리 그냥 같이 끝장을 볼까요? 안 그래도 천마의 원영신과 계약을 못해 열 받아 죽겠는데 아주 같이 죽자고 발광을 하시네요.” 

비담의 영체가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스산한 살기를 피워냈다. 극도로 치미는 억울함과 허탈함이 발산되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길천은 급격하게 피어오르는 살기를 접하자 뜨끔했는지 살살 비담의 영체를 달래기 시작했다.

“어? 왜 그래? 그만 진정하고 우리 대화로 해결하자고. 그런 극단적인 방법은 몸에 아니 영체에 해로워요. 자자, 그만 화를 가라앉히고 우리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보자고. 내가 욱하는 지랄 맞은 성격이라 참기 힘들었을 거야. 그 심정 내가 충분히 이해하니까 그만 살기를 거두라고.”

도색성 길천이 저자세로 나오자 비담은 살기를 거두었다. 사부도 죽고 10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마당에 모두 엎어 버려야 속이 시원하게 풀리겠지만 그래도 사문이나 사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 끝내 참기로 결정한 것이다. 자신마저 잘못되면 정말 모든 게 끝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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