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제 1 장 운명의 장난
귀기가 짙게 흐르는 공동묘지.
부엉이 한 마리가 나무 위에 앉아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눈을 빛내며 두리번거리던 부엉이가 마침내 묘비 사이를 잽싸게 지나가는 쥐를 발견하고 큰 날개를 활짝 펼쳤다.
‘푸드득’
쥐는 나름대로 사력을 다해 피했으나 결국 날카로운 부엉이의 발톱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부엉이가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려는 순간 갑자기 묘지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모처럼 푸짐한 식사를 기대했던 부엉이는 화들짝 놀라 애써 잡은 쥐도 놓아둔 채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한밤의 공동묘지를 찾은 불청객은 중년의 남성과 어린 소년이었다. 으슥한 밤이고 짙게 깔린 어둠으로 인해 일반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시간에 공동묘지를 찾은 것을 보면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였다. 주위를 살핀 두 사람은 공동묘지의 가운데로 가더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밤안개가 자욱하게 퍼지며 둘의 모습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귀기와 안개로 인해 더욱 음산해진 묘지의 한가운데에서 중년의 사내가 소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담아,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오늘을 위해 십년의 세월을 잘 견디어 준 네가 너무나 자랑스럽구나. 사문을 업신여겼던 원수들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뼈를 깎는 고통도 감수하였으니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귀문(鬼門)을 건드린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그들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중년의 남성은 눈에서 불을 뿜으며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한이 짙게 배인 음성에는 오랜 세월의 고통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담’이라 불린 소년은 그저 묵묵히 남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금부터 대법을 시행하도록 하겠다. 10년 적공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한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럼 강신귀공(降神鬼功)을 펼치도록 하거라.”
“예, 스승님.”
소년은 짧은 대답과 함께 상단전을 개방했다. 소년이 상단전을 개방함과 동시에 묘지를 돌고 있던 귀기가 한순간 회오리를 치며 소년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소년의 사부가 결계를 쳐놓아서 일정 거리를 두고 그냥 맴돌기만 할 뿐 소년에게 다가 오지는 않았다.
소년은 지난 10년의 세월동안 오로지 상단전만을 연마하였다. 귀문의 특성은 내공을 단전에 쌓아 운용하는 일반 문파들과는 달리 상단전을 통해 귀기를 다스리고 상단전에 하나의 궁전이 완성되면 접신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원영신을 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지금 매우 중요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의 대법이 성공하면 지난 10년간의 노력이 보상을 받고 한순간에 절대고수의 원영신을 받아들여 힘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대법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것은 물론 심할 경우 상단전에 침입한 잡신들의 귀기가 뇌로 파고들어 흔히 일반 무림의 내가 고수들이 말하는 주화입마와 같은 지경에 빠지게 되어 한마디로 미쳐버리거나 재수가 없으면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소년의 사부는 귀기가 충만하면서도 사람의 인적이 거의 없는 묘지를 찾아 한밤중에 온 것이다.
사부는 오늘 고금제일마로 불리었던 천마(天魔) 구자혁의 원영신을 부를 계획이었다. 물론 원영신을 부른다고 해서 바로 소년이 마련한 상단전의 궁전에 자리를 잡는 것은 아니었다. 천운에 의해 천마 구자혁이 소년을 선택하고 계약을 맺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부는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다. 귀문의 전설로 불리는 신귀자의 비급에 따라 오늘의 일을 안배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귀자는 귀문의 5대 조사로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풍운아였다. 강신귀공의 문제점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가장 완성도가 높게 발전시킨 인물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귀자의 죽음과 함께 비급도 사라져 버려서 그 뒤로 귀문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급기야 사파로 치부되어 무림공적으로 몰려 도망을 다녀야만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강신귀공의 문제점을 나름 보완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며 중원을 떠돌아다니던 사부는 기연을 만나 실전되었던 신귀자의 비급을 발견하게 되었다. 꺼져가는 불씨가 되살아나듯 다시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른 사부는 그날부터 고아였던 비담을 거두어 신귀자가 남긴 비급에 따라 수련을 시켰다.
그렇게 자신과 사문을 이 지경으로 만든 모든 무림인들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보낸 세월이 10년. 다행히 5살 고아였던 비담은 가진 바 능력이 출중하였고, 무엇보다 영력이 강해 상단전을 수련하는 귀문과는 궁합이 딱 맞았다. 결국 좋은 토양에서 훌륭한 재목이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게 된 셈이었다.
무럭무럭 자라 15살이 된 비담은 드디어 원영신을 받을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섰고, 사부는 가장 강력한 원영신을 초대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일반적인 귀신들로는 결코 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없었기에 모험을 한 것이다. 하지만 희박한 가능성이 아닌 신귀자의 비급과 비담의 능력, 그리고 자신의 영력 등을 종합해 보면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외부적인 방해나 변수만 없다면 오늘 밤, 드디어 그토록 고대했던 천마의 원영신을 초대하여 그것을 받아들인 제자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 확신하였다.
잠시 그동안 겪었던 고초와 회한에 젖었던 사부가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는 소년을 향해 웃어 주었다. 마음의 동요가 바로 몸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소년의 마음을 풀어 가급적 원활하게 대법이 마무리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담아, 무척 떨리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오늘만 지나면 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가 될 것이다. 그동안 귀문의 무공을 자기들 마음대로 사파라 규정짓고 핍박했던 무리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대법이 끝나도 나는 천마를 모셔오기 위해 사용한 영력이 채워질 때까지 아마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천마가 이루었던 모든 것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아마 10년의 세월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가 지닌 원영신의 귀기가 가장 크게 극대화 될 수 있도록 너의 그릇을 다듬고 키워야 하느니라. 내가 할 당부는 여기까지다.”
“예, 사부님.”
소년은 그동안 사부를 통해 사문의 비밀과 처지, 앞으로 자신이 어찌 행동하고 준비해서 두텁게 쌓인 원한을 풀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소년은 대법의 성공여부부터 앞으로의 삶까지 모든 것이 두려웠지만 다시 한 번 이를 악물며 다짐을 하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소년의 눈이 조용히 감기는 것을 확인한 사부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결계가 처진 이곳과 원영신이 머무는 곳과의 통로를 만들어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이제 주사위는 하늘 높이 던져졌고, 누구도 대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소년이 대법을 시작한 그 시각.
공동묘지에서 10장정도 떨어진 수풀에 일남일녀가 도착하여 밀어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사부와 소년이 그렇게 주의를 기울였건만 이미 대법이 시작된 후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사부는 대법의 와중에도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통로를 만드는 중요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아무런 방해 없이 조용히 밀어만 속삭이다 돌아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부의 간절한 염원을 배신하고 급기야 두 남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환락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하아, 하아. 조금만 더. 그래, 바로 거기.”
“너무 좋아. 헉헉!!”
도대체 우라질 녀석이 여자의 어디를 건드린 것인지 급격하게 커지는 신음소리로 인해 사부는 정신을 한 곳에 모으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신기하게도 소리나 장면을 무시하면 할수록 더욱 또렷이 들리고 세세하게 그려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행히 제자인 담은 상단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 주변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지만 자신의 비중도 크게 작용하는 대법이라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만에 하나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찾아 그 짓을 하는 연놈들로 인해 대법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하지만 독특한 취향의 연놈들로 인해 결국 사부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사부의 능력이나 지닌바 품성이 도를 통한 고승도 아니고 계속해서 고조되는 음향효과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색정에 눈이 먼 남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통로를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하였으나 그만 천마 구자혁의 원영신을 찾지 못하고 놓친 것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천마의 원영신과는 거리가 먼 색귀들이 모여든 것이다. 아마도 사부의 원념이 외부의 영향을 받아 강하게 작용하면서 생긴 불상사인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천마의 원영신은 둘째 치고 어설픈 색귀들의 망령이 애써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제자의 몸에 들어오게 생겼다.
마음이 다급해진 사부는 욕할 시간도 아껴가며 어설픈 색귀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사부는 온 신경과 정신을 한 곳에 모았다. 여기서 자칫 실수를 하면 제자의 인생과 사문의 운명은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부의 절절한 가슴속의 외침과는 상관없이 남녀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하악, 조금만 더.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아. 조금만, 조금만 더.”
“헉헉, 헉헉.”
“아악~!!!”
“크악!!!”
결국 환희의 순간이 남녀를 덮쳤고, 긴 신음소리와 함께 잠잠해졌다. 사부 역시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으나 교묘하게 여자의 신음소리와 겹치며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고요하게 내려앉아 잠잠해지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남녀는 뒤풀이를 하며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만 남기고 묘지를 떠났다. 자신들의 교합으로 인해 엄청난 불상사가 생겼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묘지에 아침이 밝아 왔다. 조금씩 햇빛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갈수록 묘지를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도 밀려 사라지고, 귀기도 옅어져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햇볕이 드디어 묘지의 가운데로 이동하여 쓰러져 있는 소년과 사부를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