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287회.
- 4회 초, 무사 1루 상황에서 대주자로 주현아 선수가 나가 있습니다.
- 주현아 선수가 지역 리그에서 총 6개의 도루를 성공했는데, 성공률이 100% 였습니다.일단 시도했다 하면 모두 성공한거죠.
- 김수정 선수 대신 주현아 선수가 대주자로 나섰다는 건 도루를 시도해 보겠다는 거겠죠?
- 그렇죠. 분명 도루를 시도할 겁니다.
도루를 시도하려는 주자와 도루를저지해야 하는 투수와 포수. 둘의 눈치 싸움이 상당히 치열했다.
"세잎!"
"세잎~!"
레인보우는 계속해서 견제구를 던졌지만, 현아의 리드 폭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아직, 아직이다...'
현아는 다시 리드 폭을 늘려나가며 도루 할 타이밍을 엿보았다.
원래부터 도루 센스가 있던 현아였지만, 특성이 진화하면서 한층 민감해 졌다. 이젠 투수의 투구 폼을 보고서 언제 스타트를 끊어야 할지 감이 올 정도였다.
- 피치 아웃을 해봅니다만 주자, 뛰지 않습니다.
- 이럴 때 장아연 타자는 빠른 공에 포커스를 맞춰야 됩니다. 아무래도 주자를 신경 쓰다 보면 느린 변화구 보단 빠른 공을 던지게 되거든요.
- 반대로 허를 찔러 느린변화구를 던질 수도 있겠죠. 마치 1회 때처럼 말이죠.
- 하하,그거야 그렇죠.
해설과 캐스터가 아님 말고 식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레인보우와 현아 간의 눈치 싸움은 계속 되었다. 던질 때마다 뛰는 소리를 내며 신경을 흐트러 놓으니 제구가 엉망진창이 되버렸다.
"레인보우! 주자는 내가 잡을테니깐, 넌 타자에게만 신경 써!"
레오파드의 포수, 한승연의 말에 레인보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론 코웃음을 쳤다. 안 그래도 어깨도 약한게 무슨 발 빠른 주자를 잡는단 말인가. 전혀 신뢰가 가질 않았다.
여기서 도루를 허용해 버리면 무사 2루. 아무리 발키리 타선이 자신에게 고전하고 있다지만, 외야 플라이나 내야 땅볼 정도는 칠 수 있었다. 그러면 선취점을 내주게 되고, 자칫 잘못하다간 분위기까지 넘길 수도 있었다.
경기 초반이야 그리 치명적이지 않지만, 지금은 4회였다. 경기 후반 점수를 내준다는 건 경기를 내준다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썩을 빠따년들..! 2,3점 씩 뽑아주면 얼마나 좋아?!'
레인보우는 속으로 짜증을 내며1루에 견제구를 던졌다.
"세잎~"
- 2볼 노 스트라이크 상황. 이젠 스트라이크를 집어 넣어야 됩니다.
한승연의 포심 사인에 레인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땅볼을 유도해 더블 플레이를 시도하기엔 싱커가 나았지만, 포수가 잡기엔 포심이 더 나았다. 한승연의 수비 실력은 평균 정도는 됐지만, 병살타를 유도하기엔 타자나 주자 모두 발이 빨랐다.
- 아앗, 주자 뛰었습니다!
레인보우가 공을 던지는 순간 현아가 스타트를 끊었다.
주자가 뛰는 소리, 2루수가 외치는 목소리, 스트라이크를 넣어야 된다는 생각. 흔들리는 멘탈.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해 레인보우의 실투를 유발했다.
현아가 도루를 시도하길래 아연은 크게 헛스윙이나 할 생각이었다. 대놓고 포수를 방해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풀스윙을 하면 영점 몇 초라도 도루 저지를 하는게 늦어질 터였다.
그런데.
'이건 못 참지..!'
레인보우가 던지는 구종 중 그나마 치기 쉬운 포심, 그것도 가운데로 몰리는 실투였다. 이런 공을 놓친다는 건 전국 리그 타자를 하면 안됐다.
따악~!
- 쳤습니다! 내야를 빠져 나가는 안타!! 1루 주자 2루 지나서 홈까지이~ 들어옵니다!! 1타점 적시타!! 장아연!!
- 한가운데로 몰리는 실투를 놓치지 않네요.
아연의 적시타에 레오파드 경기장이 고요해 졌다. 몇 몇 발키리 팬들만이 목소리를 높여 환호성을 지를 뿐이었다.
"아이, 씨... 이거 설마 지진 않겠지..? 오늘 경기 지면 나가린데..."
"아니, 갓 승격해 온 발키리한테 에이스 대 에이스로 맞붙어서 지면 진짜오구 접어야 된다."
작년까지 레오파드의 2선발로 좋은 활약을 해줬던 투수가 미국 메이저로 이적하면서 레오파드는 부랴부랴 2군에 있던 투수들을 1군으로 올렸다. 스프링 캠프에서 나왔던 2명의 투수들이 바로 그녀들 이었다.
2군에서 활약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실력은 그리 높지 못했다. 실제로 저번주 대구 경기에서 패하기도 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레인보우가 나온 경기에선 이겨야 했다.
"아연아, 나이스 배팅!"
수정이 주먹을 내밀며 그녀를 칭찬하자 아연이 그녀의 주먹을 주먹으로 툭 쳤다.
"이야, 완전 실투였는데 단타 밖에 되질 않네요. 암만 실투라도 A+은 A+이네요."
"그래도 충분히 잘 했어. 까딱 잘못해서 외야 플라이 돼봐. 완전 작전이 꼬이는 거야."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아연이 너도 알지? 성공할 수 있겠다 싶으면도루 해."
"네, 코치님."
아연의 주력 능력치는 의외로 S급 이다. 원래는 A급 이었는데, 그녀의 '건강할수록 능력치 대폭 상승'이란 특성 덕분에 S급으로 상승한 것이다. 덕분에 작년 지역 리그 도루왕을 차지했던 지아보다 주력 능력치가 높았다.
주력 능력치가 S급 이긴 하지만 아연은 도루 할 생각이 딱히 없었다. 까딱 잘못 도루 해 부상을 입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손해였다. 그녀의 특성이 초기화 되어 버리니 S급이던 종합 능력치가 A급으로 확 감소할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도루 시도를 안 하는게 나았다.
딱!
- 밀어친 타구! 1루수가 타구를 잡아 직접 베이스를 밟습니다. 1아웃!
- 주자의 걸음이 빨라 더블 플레이를 시도하기엔 조금 어려웠습니다. 1루수의 판단이 좋았네요.
- 자, 이제 1사 2루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땅볼 하나면 발키리 입장에선 승기를 완전히 굳힐 수 있습니다.
- 반대로 레오파드 입장에선 어떻게든 실점을 막아해 해요. 주자의 주력이 빠르니 레오파드는 내야 뜬공이나 삼진을 유도해야 합니다.
레오파드 내야수들이 실점을 막기 위해 전진 배치를 하였다. 그러나 현아 때처럼 극단적으로 앞으로 이동하진 않았다. 현아야 빠른 타구를 만들기 힘들지만,지은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와 가까워질수록 타구에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정도껏 할 수 밖에.
레오파드는 유인구 위주로 피칭을 하였다. 그러나 지은은 침착하게 볼들을 골라냈고,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온 공을 컨택했다.
딱!
- 밀어친 타구! 1루수 재빨리 잡아서 홈에~!!
지은이 타구를 밀어 쳤다. 내야수들 중에 1루수의 수비력이 가장 떨어져 일부러 밀어 쳤다. 어깨가 좋은 2루수 보단 1루수가 송구를 해야 그나마 반응도 늦고, 송구도 더 느릴 것이었다.
딱 소리가 나자마자 아연은 온 힘을 다해 홈으로 뛰었다. 포수의 모습을 보아하니 1루수가 홈에 승부를 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손이 더 빠르다..!'
지금 아연의 머릿속엔 부상에 대한 걱정 따윈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포수의 미트보다 자신의 손이 먼저 홈플레이트를 터치할까 뿐이었다.
촤아악~
경기를 보고 있는 몇 만명의 시선이 홈, 그리고 심판의 입으로 쏠렸다. 심판이 확신을 가진 목소리로 크게 외치며 두팔을 옆으로 벌렸다.
"세잎! 세이이잎~!!"
""우우우우!!""
""와아아아!!""
또 한번 실점을 했다는 것에 대한 비난, 그리고 한 점 더 달아나는데 성공했다는 환호성이 대비되며 레오파드 경기장에 울려퍼졌다.
- 세잎! 세잎 입니다! 1점 더 추가하는 벨벳 발키리! 점수 2대 0 입니다!
4회에 2점을 획득하는데 성공한 발키리.
이후 5회 말에 1점 내주긴 했지만, 더 이상의 실점은 하지 않으면서 레오파드와의 원정 1차전 경기를 승리하였다.
발키리는 3연승을 달려 한껏 분위기가 업 됐으며, 반대로 레오파드는 필히 이겨야 되는 경기에서 졌다는 충격에 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거 이러다가 2차전에서도 지는 거 아냐..?"
"에이, 설마... ..."
발키리의 2선발이 약하다고 소문이 나있지만, 레오파드의 2,3선발도 약하긴 마찬가지 였다. 레오파드 선수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2차전엔 승리하자고 다짐했다.
*
*
*
전국 리그의 경기 요일은수요일과 토요일 이다. 수요일 날 경기를했으니, 이제 토요일 날 광주에서 다시 경기가 있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원정 팀의 경기장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인천이었다. 모두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올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전국 리그는 말 그대로 전국 리그. 전국을 이동해야 했다. 메이저 리그처럼 비행기 타고 이동할 정도는 아니지만, 당일치기로 이동할 정도도 아니었다.
특히 광주나 창원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경기장은 왔다 갔다 하기에 매우 번거로웠다. 경기 끝나고 바로 출발한다고 해도 어차피 금요일 날 다시 경기 하러 광주로 와야 했다. 그러니 일행은 그냥 토요일까지 광주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이거 참. 에인헤랴르 선수들이 경기를 잘치를지 걱정이네요."
1층 카페에서 코치들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열릴 예정인 광호 오구단과의 2차전은선수들끼리 경기를 치러야 했다.
"뭐, 구단 직원들이 돕는다고 했고, 딱히 작전 세울 것도 없는데, 알아서 잘 하겠지~ 우리야 거기서 그냥 코치 버프 주는 것밖에 더 하나."
에일리의 걱정에 비엔나가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비엔나가 생각하기에 2부 리그 경기는 감독이나 코치가 딱히 필요하지는 않았다. 1부 리그 정도 되야 감독이나 코치가 필요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얘들 훈련도 문제죠. 아직 초보들인데 코치들이 옆에서 케어를 해줘야죠."
"그건 그렇긴 해... 그래도 이런 원정 경기가 얼마나 된다고. 기껏 해봐야 창원, 광주, 대구 인데. 앞으로 5번 밖에 안 남았어."
"..그리고 내가 재은이에게 듣자 하니 내년엔 에인헤랴르 감독이나 코치를 뽑을 계획이래. 그러니 그렇게 걱정하지 마."
멍하니 옆에서 듣기만 하던 델루나가 한마디 했다. 그녀는 아침 먹으러 나왔다가 이렇게 붙들려 수다를 떠는게 지루하고 졸리기만 했다.
"아, 그래요, 감독님? 그럼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앞으로는 어떻게 할지 걱정이었는데, 감독님의 말을 듣고서 에일리는 마음이 놓였다. 비록 올해는 계속 이렇게 해야 하지만, 비엔나 코치님 말대로 이번 같은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우리 에일리 씨는 너무 열정적이야~"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나저나 오늘 일정이 뭐래요..? 어디 훈련하러 안 가요?"
수정의 말에 비엔나가 고개를 갸웃 했다. 이렇게 원정을 와서 놀기만 하진 않을 테니 분명 훈련을 할 터였다. 그런데 아직까지 구단주에게서 아무 말이 없었다.
"음... 나도 들은 건 없는데..? 감독님, 뭐 들은 거 없어요?"
"나도 몰라... 하암~"
따르릉~
델루나가 하품을 하며 고개를 저을 때, 그녀의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으음..? 동국이잖아? 여보세요?"
- 어, 누나. 지금 어디야?
"나..? 나 지금 1층 카페에 있는데?"
- 그래? 누나가 어쩐 일이래?
"... 오늘 일정이 어떻게 돼..?"
동국의 의아하단 반응에 델루나는 슬쩍 짜증이 낼 뻔 했다. 안 그래도 카페에서 떠들고 있는게 지루하고 짜증 났는데 말이다.
- 오늘? 오늘은 호텔에서 특훈 하면서 지낼꺼야.
하루 종일 호텔에 처박혀서 섹스만 한다는 말에 델루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봤을 때, 동국은 발정난 색마 같았다.
"...그럼 내일은 뭐할건데?"
- 내일은 다같이 광주 나들이나 갈까 하는데, 어때?
동국의 대답이 황당해 델루나는 훈련에 대해 물어보았다. 보통은 어디 훈련장을 대여해 훈련하지 않나..?
"... 훈련은 안 하니?"
- 오늘 하잖아.
"..."
델루나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