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262회.
3회 초, 1사 2루 상황. 마운드엔 인천 st 드레이크의 새로운 에이스, 문승연이 있었고, 타석에는 발키리의 5번 타자, 주현아가 있었다. 문승연의 등급은 A+, 현아의 공격력은 E 급 이다. 둘 사이의 간격은 4.5 단계나 되었다. 그렇기에 현아가 문승연의 공을 쳐서 안타를 만드는 건 둘째치고, 일단 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거기에 드레이크의 수비 시프트는 현아를 더욱 압박하였다. 2루수가 2루와 홈 사이에 위치하고 좌익수가 2루 베이스 바로 뒤에 있었다. 1루수 역시 1루 보다 훨씬 앞에 위치하고 있었고, 우익수도 기존의 위치보다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펑~!
142km의 빠른 공. 그리고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몸을 움찔하는 수비수들. 타구가 자신에게로 오면 바로 잡기 위해 몸을 긴장시킨 것이다.
번트 자세를 하고 있던 현아는 초구는 그냥 지켜보았다. 혹시나 투수의 제구가 흔들리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문승연의 공은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드레이크의 수비 시프트가 정말 살벌하군요.]
[2루수와 투수, 1루수 사이 공간이 정말 비좁습니다. 주현아 선수가 타점을 올리려면 일단 안타 유무와 관계 없이 저 사이를 뚫어야 해요.]
해설의 말과는 다르게 현아는 저 비좁은 틈새를 뚫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포수와 투수 사이, 그 공간에 공을 떨굴 생각이었다.
'최대한 타구의 숨을 죽여야 해..!'
포수와 투수 사이에 번트를 대려면 타구가 앞으로 튀어 나가면 안 됐다. 타구의 숨을 죽여 굴러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툭..!
현아의 번트에 공이 바로 앞에 떨어졌다. 2루 주자인 지은이 열심히 홈으로 뛰었고, 내야수들 역시 공을 향해 앞으로 뛰었다.
아니, 뛰려 했다. 하지만 공은 투수를 향해 갔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서로 겹칠 수가 있었다. 좁은 공간에 내야수들이 서로 겹쳤다간 공을 못 던질 수도 있었다. 이 타구는 투수가 처리해야 했다.
현아의 타구를 본 문승연이 곧바로 공을 향해 뛰어갔다. 꽤나 절묘한 번트 타구였기에 서둘러야 했다.
'빨리 토스를 해야..!'
그대로 글러브로 공을 잡은 그녀는 글러브를 튕겨 바로 포수에게 토스했다. 그러나 급한 마음에 서둘러 토스를 하다 보니 공이 영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가까스로 포수가 공을 글러브 끝으로 잡았을 때, 지은이 홈을 향해 슬라이딩을 하고 있었다.
'막을 수 있다..!'
지은의 걸음이 느렸는지, 지금에서야 다리를 뻗으며 슬라이딩을 하고 있었다. 포수인 이재영은 아웃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글러브를 지은의 다리를 향해 뻗었다.
슬라이딩을 하는 지은 역시, 자칫 잘못하다간 아웃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뛰긴 했지만, 가슴이 커서 그런지 속도가 빠르지 못 했다.
'이대론 안된다..!'
순간적으로 포수의 글러브가 눈썰미 좋은 지은의 눈에 띄었다. 아슬아슬 하게 공을 잡고 있는 포수의 글러브. 그리고 그 글러브가 자신의 발을 태그 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상황을 판단한 지은은 구부렸던 왼쪽 다리에 힘을 줘 그대로 미끄러지지 않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보통 포수의 글러브를 피하기 위해 몸을 비트는데 반해, 지은은 오히려 몸을 글러브에 부딪히게 했다. 그리고 그 판단이 결국 옳았다.
[스퀴즈 번트 댔어요!! 투수 잡아서 토스!! 홈, 홈에서!!! 태그!! 아!!! 공을 떨구고 말았습니다!! 세잎, 세잎 이에요!!]
[아, 이재영 포수가 공을 제대로 포구하지 못했나요? 타이밍 상으로는 아웃 이었거든요!]
"아자!!!"
지은의 몸에 부딪히면서 이재영의 글러브에서 공이 빠지고 만 것이다. 지은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타자의 타격 자세를 '관찰'하던 눈썰미가 이번에 활약을 한 것이다.
이재영과 문승연은 허탈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공을 바라보았다.
"하, 씨... 그걸..! 하..."
아웃 시킬 수 있었던 타이밍에 이재영이 공을 놓치는 바람에 실점을 하자 문승연은 이재영에게 뭐라 따지려다 참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재영은 자신보다 선배였다. 그녀는 결국 씩씩대며 몸을 돌려 마운드로 향했다.
"아니, 저 년은 지가 토스를 제대로 못 해놓고는..!"
문승연이 짜증을 내며 뒤돌아 가자 이재영은 어이가 없어하며 중얼거렸다. 신지은이 그렇게 빠르지 않은 선수란 걸 알고서 침착하게 공을 토스했어도 충분히 아웃 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서두르다 잘못을 해놓고는 남 탓을 하고 있었다.
"하..! 진짜, 뭐라 하고 싶은데, 선발 투수라서 참는다, 진짜..!"
이재영은 나중을 기약하며 다시 포수 마스크를 썼다.
현아의 번트 안타로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황. 문승연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 한 상황에서 공을 던졌다. 그리고 문승연이 공을 던지기 바로 직전, 현아가 도루를 시도했다.
현아의 스피드나 도루 센스는 발키리 선수들 중에서 가장 좋았다. 이재영과 문승연 역시 현아의 스피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자를 견제해야 할 둘이 흥분을 하고 있던 상황 인지라 그만 주자를 생각하지 못 한 것이다. 1루수가 이재영에게 사인을 보냈지만, 속으로 문승연 욕을 하느라 보질 못했다.
현아는 문승연의 얼굴이 흥분으로 인해 벌게져 있다는 사실을 캐치하고 리드 폭을 슬금슬금 늘렸다. 그리고 초구부터 도루를 시도한 것이다.
"도루!!"
현아가 도루를 시도하자 2루수가 바로 포구 할 준비를 하며 현아의 도루 사실을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은 공을 던지고 있던 문승연의 귀에도 들어갔다.
'아, 시발..! 발 빠른 주자였지..?'
안 그래도 문승연의 멘탈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현아의 도루 시도에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제구까지 흔들리고 말았다.
문승연의 빠른 공이 바깥쪽 낮게 꽂혔다. 거의 원바운드 되는 공을 이재영이 몸 날려 잡아냈다. 그 사이 현아는 여유 있게 2루 베이스를 밟았지만, 드레이크 입장에서는 폭투가 되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만약 공이 뒤로 빠졌더라면 발 빠른 현아가 홈까지 노릴 수도 있었다.
[주현아 선수의 도루 성공으로 다시 상황은 1사 2루가 되었습니다.]
[발키리 입장에서는 여기서 한 점 더 달아나야 합니다. 1점 차로는 언제든 동점, 역전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드레이크는 여기서 막아야 합니다.]
1볼 상황에서 다시 볼을 던지는 문승연. 이재영이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손짓을 하지만, 문승연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현아의 번트 안타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쓰리 볼까지 가는 군요. 다음 타자가 리사 선수라는 점을 감안 했을 때, 볼넷을 최악의 선택입니다.]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해요.]
승부를 봐야 하긴 하지만, 무턱대고 가운데로 직구를 던질 순 없었다. 결국 문승연이 던진 체인지업이 살짝 아래로 빠지면서 아연은 볼넷으로 1루로 걸어나갔다.
[결국 볼넷 입니다.]
[그렇네요. 이제 타석에는 발키리의 2번 타자, 리사 선수가 들어서겠습니다.]
1사 만루의 절호의 찬스. 발키리는 여기서 득점을, 이왕이면 대량 득점을 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드레이크에 2명의 S급 홈런 타자들이 있는 이상, 언제든 드레이크가 추격을 할 수 있었다.
'지금 투수는 제구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지. 그럼 초구는 어떻게 던질까? 완전 빠지는 공, 아니면 한 가운데 공이다. 우선 마음 편히 가운데 공을 노리고 시작하자.'
리사는 다른 코스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가운데 몰린 공만 기다리기로 하였다.
한편 마운드에서는 이재영이 문승연을 진정 시키고 있었다.
"승연아, 지나간 건 일단 잊고 마음을 차분하게 하자. 너, 제구가 장기잖아."
"후우... 네, 선배."
문승연이 불퉁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이재영이 그녀의 머리를 양 손으로 잡고서 눈을 맞췄다.
"니 공을 믿고 던져! 지금 상황은 운이 없었을 뿐이야! 알았지!"
"네..."
"그래, 좋아! 믿는다!"
이재영은 문승연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이재영의 뒷모습을 보는 문승연의 눈빛은 좋지 않았다.
'애초에 선배가 공을 제대로만 잡았어도 이런 일은 없는데..!'
포수 자리로 되돌아 가는 이재영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진짜 개복치 같은 투수 새끼..! 그러게 수비 연습 때 열심히 했어야지! 공도 개떡 같이 주고서는 날 원망하는 눈빛이라니..! 선배나 돼서 후배 눈치나 봐야 된다니..!'
다시 포수 자리에 쭈그려 앉은 이재영은 문승연에게 체인지업 사인을 보냈다. 보나 마나 타자는 한 가운데 직구를 노릴 테니 우리는 그 점을 역이용해 체인지업을 던져야 했다.
문승연은 이재영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녀의 생각도 체인지업 이었기에 군말 않고 체인지업을 던졌다.
'헛스윙 해라..!'
제발 리사가 헛스윙을 하길 바라며 체인지업을 던진 문승연. 그녀는 던지는 순간 공이 손에서 빠지는 걸 느꼈다.
'아..!'
손에서 빠진 체인지업은 그대로 우측으로 휘어지며 리사의 발 쪽으로 향했다. 가운데만 보고 있던 리사는 공이 바닥으로 향하자, 재빨리 몸을 피했다. 이재영은 문승연의 폭투에 기겁을 하며 공을 잡으려 했으나, 공은 글러브를 피해 뒤로 빠지고 말았다.
[초구. 아! 공이 뒤로 빠졌습니다! 주자들 모두 뛰고!! 2루 주자,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3대 0!! 발키리가 한 점 더 추가합니다!!]
[여기서 폭투가 나오고 마는 군요. 이러면 리사를 고의 사구로 거를까요? 네, 거르는군요. 리사 선수가 고의 사구로 1루로 진출합니다. 1사 만루 상황에서 투수가 바뀝니다.]
투수를 교체한다는 벤치의 사인이 나자 포수인 이재영이 마운드를 방문했다.
"선배! 그 공도 못 잡으면 어떡해요!"
문승연이 다가오는 이재영에게 짜증을 냈다. 그녀가 봤을 때, 지금 공은 충분히 잡을 수 있었던 공이었다. 문승연의 외침에 이재영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동안은 선발 투수라 화를 참았지만, 투수가 교체되니 이제 상관이 없어졌다.
"야이 싸가지 없는 년아! 니가 못 던진 걸 왜 내 탓을 해! 넌 그 공을 잡을 수나 있냐!"
"뭐라고요? 아니, 공이 포수 글러브 밑으로 지나가는게 보였는데, 그럼 당연히 잡을 수 있었잖아요!"
"이 년이 뭘 잘했다고 선배한테 큰 소리야, 큰 소리를! 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어!!"
두 명의 선수가 마운드 위에서 말싸움을 하는 모습이 중계 화면에 고스란히 잡혔다. 그녀들의 다툼은 코치와 다른 투수인 박조윤이 황급히 뛰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저 미친 년들이 이젠 지들끼리 싸우네. 경기는 포기했냐? 아주 분위기 씹창 나는구만..?"
드레이크 팬들은 지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며 어이 없어 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