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252회.
벨벳 발키리와 인천 벨 레이디스의 2차전. 이 경기는 경기 리그의 마지막 경기이자, 경기 리그의 최종 우승자를 결정할 경기이기도 했다. 여기서 발키리가 무승부 이상, 그러니깐 지지만 않으면 발키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반대로 진다면 승점은 84점으로 같지만, 상대 전적에서 밀려 2위가 되고 만다.
1회엔 양 팀 다 세 타자만 상대하였다. 앤서니는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이후 뜬공과 병살로 이닝을 마무리 했으며, 레이디스의 선발 투수인 마리아도 아연, 리사, 지은을 모두 범타로 처리하였다.
2회 초. 2사 1루 상황. 딱 소리와 함께 최정연의 타구가 지아 앞에 떨어졌다. 우익수 앞 안타인 것이다. 그리고 1루에 있던 고종연은 2루를 지나 홈까지 노렸다.
[1루 주자, 2루 지나 홈까지 달립니다!! 우익수, 그대로 홈에 송구~!!]
빠른 발로 최정연의 안타를 바로 앞에서 잡아낸 지아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홈에 송구를 하였다. 그녀의 강한 어깨에서 쏘아진 레이저 송구. 포수인 지은이 바로 잡아 물 흐르듯 슬라이딩을 하는 고종연의 손을 태그했다.
[아웃!! 아웃 입니다!! 홈에서 아웃 되고 마는 고종연!! 낙심하며 고개를 떨구고 맙니다. 반대로 홈에서 보살을 잡아낸 최지아 선수는 상당히 기뻐하는 군요.]
주자가 홈에서 아웃 되자 지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껑충껑충 뛰었다. 팬들 역시 기립 박수로 환호하였다.
홈 보살의 짜릿한 감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아는 선두 타자로 나서게 되었다.
'저번 경기에서의 부진을 만회하자..!'
저번 화요일 경기에서 현아와 지아는 3타수 무안타로 침묵했다. 좌타자 상대로 매우 강한 김가희 때문인데, 현아야 그렇다 치지만, 자신까지 부진했다는 게 그녀는 부끄러웠다. 그녀가 한 일이라곤 김가희의 투수 수를 늘린 것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레이디스의 선발 투수는 우투수인 마리아 이다. 지아의 본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상대였다. 지아는 전 경기에서는 막혀있던 혈을 이번엔 시원하게 뚫어냈다.
따악~!
[잡아 당긴 타구!! 장타 코스 입니다!!]
지아는 빠른 발로 여유 있게 2루에 안착하였고, 현아의 땅볼 타구 때 홈을 밟아 선취 득점에 성공하였다.
"화요일이랑은 다르게 오늘은 아주 날아다니는구나!"
"이게 내 본실력이지~!"
아연과 하이파이브를 한 지아는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더그아웃에 들어갔다.
2회 말의 득점 이후로 양 팀은 또 다시 세 명의 타자만을 상대해 갔다. 레이디스는 1회에 이어 3회에도 병살로 기회를 날렸고, 발키리는 지아 이후로 안타를 생산해 내질 못했다.
그리하여 아슬아슬한 0-1의 상황이 이어지던 4회 말, 아연의 안타가 터져나왔다.
[발키리의 첫 선두 타자 출룹니다. 그리고 이제 리사 선수 차례인데요. 리사 선수, 아직까지 안타가 없습니다.]
[보통 전 타석에서 안타가 없으면 걱정을 하게 되지만, 리사 선수는 오히려 기대가 됩니다. 과연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말이죠.]
해설의 말대로 발키리 선수들은 물론이고 팬들 역시 리사에 대한 묘한 기대감이 있었다. 사실 레이디스의 투수인 마리아가 B+급의 리그 에이스 중 한 명이지만, 리사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한 S급 타자이다. 충분히 좋은 결과를 뽑아낼 수 있는 타자이다.
[현재까지 리사 선수, 홈런 15개로 홈런 부분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2위가 10개이니 엄청난 차이죠. 거기에 역대 경기 리그 최다 홈런 기록인 15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록입니다. 과연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역대 최다 홈런 신기록을 깨트릴 수 있을지..?]
36경기에서 15개의 홈런. 거의 2경기 당 1개 꼴로 홈런을 친 것이다. 야구, 144경기에 모두 출전했다고 치면 간단한 계산으로는 한 시즌에 60개의 홈런을 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대단한 기록이었고, 이 기록을 작성한 타자는 당연히 전국 리그에서도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 그 기록을 세운 타자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리사가 리그 마지막 타석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제 슬슬 여기서 뭔가를 보여줘야지.'
앞선 두 타석에서 모두 펜스 앞에서 타구가 잡혔다. 이제는 펜스 앞에서 외야수들에게 잡히지 말고, 펜스 뒤에서, 환호하는 관중이 잡아야 될 때였다.
마리아의 포심이 바깥쪽 보더라인으로 날아왔다. A급 제구 답게 아주 칼날 같은 제구였다. 그러나 리사의 방망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매섭게 휘둘러 졌다.
스윗 스팟이 아닌, 살짝 방망이 끝에 맞았지만 리사는 더욱 힘을 가해 타구를 밀어냈다. 밀어친 타구가 우측 펜스를 향해 쭈욱 뻗어갔다.
'제발 넘어가라..!'
간절한 마음으로 리사는 타구를 바라보며 1를 향해 전력 질주 하였다. 설사 담장을 넘기지 못하더라도 2루타라도 만들어야 했다.
[밀어친 타구!! 우측 담장, 담장 담장~!!]
레이디스 우익수 김강연은 제발 넘어가지 말라고, 우측 외야 관중석의 관중들은 제발 담장을 넘기를 기원하는 기묘한 대치 속에서. 리사가 쏘아 올린 작은 오구공은 스리슬적, 스무스 하게 담장을 넘어 한 꼬마 팬이 들고 있던 모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담장~!! 넘어갑니다~!!! 리사 선수의 투런 포!! 시즌 16호 홈런!! 역대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 새로 경신되는 순간 입니다!!!]
[그 괴물 같은 기록을 결국 리사 선수가 깨내네요. 정말 대단하고 뜻깊은 순간입니다!]
[리사 선수의 투런 홈런으로 점수 0-3으로 바뀝니다!]
중계 화면에 모자로 홈런볼을 잡아낸 꼬마의 모습이 비춰지자 해설이 감탄하였다.
[이야~! 홈런 타구가 기가 막히게 관중 분이 들고 있던 모자 안으로 들어갔네요. 저 꼬마 팬에게는 정말 뜻 깊은 선물이네요.]
[어, 음... 그렇겠네요. 레이디스 팬인 꼬마 팬에게 리사의 홈런볼이라... 평생 잊지 못할겁니다.]
[... 레이디스 팬이었나요..?]
주위의 모든 발키리 팬들이 리사의 홈런에 기뻐하는 사이, 레이디스 팬인 꼬마는 홈런볼을 손에 들고서는 멍하니 그 공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부모는 그런 꼬마와 홈런볼을 복잡한 시선으로 보았다.
"후에엥~!!"
응원하던 팀이 중요한 경기에서 홈런을 얻어맞았다는 사실에 이 꼬마 팬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손에 쥐고 있던 홈런볼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꼬옥 품에 앉았다. 경기 리그 최다 홈런 기록을 갱신한 이 홈런볼은 이후 레이디스 선수의 유니폼과 교환되어 리사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4회 말에 터진 리사의 투런 홈런은 거의 쐐기포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레이디스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아쉽게 1위 자리를 내준다는 건 그녀들의 계획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 공격 기회다. 여기서 무조건 4점을 내야 돼. 갓 승격된 발키리에게 1위 자리를 넘길 수는 없다!"
"넷! 감독님!"
"어떻게 해서든 출루에 성공해! 몸에 맞아서 라도 출루하란 말이야."
비장한 각오로 타석에 들어서는 이조연. 그녀는 홈 플레이트에 바짝 몸을 붙이며 타격 자세를 잡았다.
'아니, 이 년이..?'
마치 몸쪽 공은 몸으로 막겠다는 심정으로 달라붙는 이조연의 모습에 지은은 물론이고 앤서니의 눈썹까지 꿈틀댔다. 언젠가 한번 몸쪽 슬라이더에 일부러 몸을 가져다 대 사(死)구로 나간 타자가 있었다. 그 이후로 앤서니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가 바로 일부러 사구 맞기였다.
'앤서니, 몸쪽 포심.'
'응, 알았어..!'
바로 이조연을 응징해 주기 위해 몸쪽 포심을 던질 준비를 하였다. 자칫 살짝 존 밖으로 벗어나기만 하면 몸에 맞는 공을 내주게 되는 상황. 하지만 앤서니는 자신의 제구를 믿고서 137km의 포심을 뿌렸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는 포심. 그 꿈틀대는 움직임에 이조연은 절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으나 눈을 똑바로 뜨고서 공을 바라보았다.
펑~!
"스트라잌~!"
볼이 존 안으로 들어 왔다는 판정. 이조연은 가만히 포수의 글러브를 바라보았다. 스트라이크인 공에 몸을 들이밀어 봤자 몸에 맞는 볼로 인정되지 않기에 이조연은 몸을 들이밀진 않았다.
틱~!
"파울~!"
"볼."
"볼."
투 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에서도 이조연은 침착하게 공들을 골라 냈다. 그리고 제 5구. 앤서니가 던진 스플리터가 살짝 밋밋하자 바로 타격을 하였다. 그리고 그 타구는 내야를 빠져나가 안타가 되었다.
"칫..!"
1루에서 보호 장비들을 푸는 이조연을 바라보며 앤서니가 혀를 찼다.
‘이미 발키리가 다 이긴거, 그냥 빨리 빨리 끝내게 해주지…’
다음 타자인 고종연에게 땅볼 타구를 유도한 앤서니. 리사가 타구를 잡아 2루에 송구, 이조연을 아웃 시켰다. 그리고 다시 아연이 1루에 송구하였으나, 고종연의 발이 약간 더 빨라 더블 플레이를 완성 시키지는 못하였다.
"아이... 아쉽네. 쉽게 갈 수 있었는데."
여기서 더블 플레이면 1번 김강연에서 끝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해 2번 최정연까지 상대해야 했다. 다들 클래스가 있는 선수들이기에 방심해서는 안됐다.
오늘 3타수 1안타를 기록한 레이디스의 1번 타자 김강연은 타석에서 앤서니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오죽하면 앤서니가 몸에 맞출 생각을 했을까.
[8구째 되는 승부 끝에 결국 김강연 선수가 볼넷을 출루하는 군요.]
[앤서니 선수, 1루로 걸어가는 김강연 선수를 째려보네요. 허허.]
매섭게 김강연을 째려보는 앤서니. 그러나 삐진 어린 아이처럼 볼을 부풀리고 노려봐서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귀여울 정도. 그 모습을 팬들은 신이 나 사진으로 찍어댔다.
"하악하악..! 앤서니 화난 모습..!"
"너무 귀엽다..! 내 배경 화면으로 사용해야지..!"
아무튼 1사 만루의 위기 상황. 타석에는 레이디스의 2번 타자인 최정연이었다. 발키리 팬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앤서니의 모습을 찍든 말든, 레이디스 팬들은 제발 여기서 동점 홈런이 나오길 간절히 빌었다.
따악~!
그리고 한창 앤서니의 사진을 히히낙낙 거리며 보던 발키리 팬들의 가슴을 철렁거리게 만들 타구음이 터져나왔다.
“으악~! 안돼~!”
최정연의 잡아 당긴 타구가 그대로 좌측 펜스를 강타한 것이다. 다행히 타구가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1,2루 주자들이 모두 홈으로 들어오기에 충분한 장타였다.
[이야, 이거 이대로 경기가 무난하게 발키리의 승리로 끝이 나나 싶었는데, 여기서 최정연 선수의 2루타가 터지는 군요.]
[오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죠. 이렇게 되면 경기 어떻게 될지 몰라요. 레이디스가 분위기 제대로 탔어요.]
단번에 스코어가 2-3으로, 1점차가 되자 발키리 벤치는 비상이 걸렸다.
"이거 어떻게 하죠? 로리를 걸러야 될까요?"
"아무래도 그러는게 낫지 않을까요? 일단 베이스를 꽉 채우고 나서 이조연에게 더블 플레이를 유도하는 수밖엔..."
"그랬다가 안타라도 허용하면..."
"어차피 우리에겐 아직 5회 말이 남아 있어요. 역전 당해도 다시 점수를 낼 수 있을겁니다."
결국 B+급 타자인 로리를 고의 사구로 내보낸 발키리는 다시 1사 만루 상황에서 이조연을 상대하게 되었다.
[여기가 아마 오늘의 최대 승부처 겠네요. 5회 초 선두 타자로 나서 안타를 쳤던 이조연이 다시 1사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이조연 선수 많이 긴장되겠네요. 레이디스 입장에서는 희생타도 아쉬운 상황이에요. 희생타 쳐봤자 2사 1루에 동점이에요. 어차피 발키리는 동점으로 경기가 끝나도 우승이 확정됩니다.]
1사 만루와 2사 1루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다음 타자가 좌타인 고종연 이기에 레이디스는 여기서 어떻게든 안타가 나오길 기원하고 있었다. 사실상 좌타인 고종연이 앤서니의 공을 안타로 만들긴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오구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긴 하지만 말이다.
보통 중요한 승부처에서 타자들은 1가지 구종을 노리고 타석에 임한다. 그래야 더 좋은 타구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조연은 방금 전 안타를 쳤던 스플리터를 노리고 있었다.
'그럼 스플리터는 전혀 던지질 말아야지.'
그리고 당연히 지은은 이조연이 스플리터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초구. 바깥쪽 슬라이더. 이조연이 반응하지 않았다.
2구. 바깥쪽 커브. 이번에도 이조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로 몰리게 된 이조연 선수! 앤서니, 빠르게 공을 던집니다!]
볼카운트가 몰리게 된 상황. 이조연이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앤서니가 빠르게 공을 던졌다.
일단 공을 지켜보기로 한 이조연의 눈 앞에 슬쩍 가라앉는 궤적의 공이 보였다. 0.01초만에 자신이 노리고 있던 스플리터라고 단정한 그녀는 빠르게 배트를 휘둘렀다.
틱~!
배트 끝에 맞은 빗 맞은 타구. 앤서니가 던진 공은 스플리터가 아닌 서클 체인지업 이었고, 그마저도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이었다. 정신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조연이 성급한 판단을 한 것이다.
창백한 표정으로 땅볼 타구를 바라본 이조연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1루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 공을 빠르게 낚아챈 리사가 홈에 있는 지은에게 공을 던졌다.
"아웃!"
홈에서 2루 주자가 아웃 되고, 지은이 다시 공을 1루로 뿌렸다. 그리고 1루에는 베이스 커버를 들어간 앤서니가 글러브를 내밀고 있었다. 지은의 강한 어깨에서 쏘아진 송구가 정확히 앤서니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그보다 1초 늦게 이조연의 발이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아웃!"
[3-2-1로 이어진 더블 플레이!!! 이조연의 더블 플레이로 최종 스코어 2-3으로 발키리가 승리를 거둡니다!!]
[벨벳 발키리가 승점 87점으로 경기 리그 우승을 차지합니다!!]
퍼버버펑~!! 펑펑~!!
밝은 폭죽이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앤서니를 비롯한 발키리 선수들이 서로 기뻐하며 얼싸안았다.
바야흐로 발키리가 경기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