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175회.
1회 초, 기세 좋게 발키리의 3타자를 범타로 처리한 우드페커스는 그 기세를 1회 말로 연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번 타자 최원주가 3구 삼진으로 아웃 되고 나서, 나머지 2, 3번 중심 타자들이 앤서니의 구위에 밀려 땅볼 아웃이 되자 분위기가 다시 가라 앉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발키리 쪽으로 분위기가 넘어가지도 않았다. 2회 초, 선발 투수 김가연은 리사를 고의 사구로 내보내고 나서, 병살을 방지하기 위해 가만히 서 있는 5번 타자를 삼진 처리 하였다.
[제 6구. 쳤습니다! 땅볼 타구! 2루수 잡아서 좌익수에게 토스, 좌익수 2루 베이스 밟고 1루에~!! 아웃입니다! 4-5-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
[주현아 선수의 발이 빨라서 아슬아슬 했는데, 수비수들의 연계가 무척 매끄러웠어요!]
그리고 이어진 1사 1루 상황에서 현아에게 풀 카운트 싸움 끝에 땅볼을 유도한 것이다. 떼굴떼굴 굴러간 공은 그대로 병살로 이어졌다.
계속해서 답답한 흐름이 이어지던 중, 3회 초에 아연의 안타와 리사의 고의 사구로 1사 만루가 되었다. 그리고 AI 타자의 루킹 삼진이 있고 나서 2아웃 만루 상황에서 1번 타자 현아가 타석에 들어섰다.
"흠... 보면 말이지... 은근히 현아 타석 때 주자가 쌓여 있어..."
동국에게 양기를 듬뿍 받아 기운이 넘쳐 보이는 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은이 중얼거렸다.
"현아의 타점이 10타점이나 되잖아요. 그만큼 타점을 올릴만한 상황이 많았다는 거죠."
지은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벨리나가 슬쩍 다가와 말했다. 더그아웃 울타리에 팔을 얹어 몸을 기댄 그녀는 힐끔 지은의 부풀어 오른 배를 바라보았다.
"왜, 부럽니?"
벨리나의 시선을 느낀 지은이 자신의 배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으로 쓰다듬었다. 지은의 표정에선 벌써부터 모성애가 흘러 나왔다.
"뭐, 약간요. 이 뱃속에 우리의 아기가 들어 있다니... 신기하네요."
우리의 아기라는 말에 지은이 동국과 자신의 아기라고 대꾸하려다가 말았다.
동국과 같이 살고 나서부터 지은의 성격도 많이 좋아졌다. 그 전에는 자신밖에 몰랐는데, 이젠 남을 생각하게 된것이다.
그러는 사이 현아의 툭 밀어친 타구가 그대로 2루수 자리까지 내려 와 있던 최원주에게 걸리면서 아웃 되고 말았다.
"어휴... 진짜 타순을 바꾸니깐 점수가 안 나오네..."
고개를 떨구고 더그아웃으로 오는 현아를 바라보며 지은이 답답해 했다. 그리고 그녀의 심정이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발키리 팬들의 마음이었다.
"아, 진짜 왜 현아를 1번에 배치한거야... 답답해 죽겠네..!"
"우리 현아도 성장해야지. 여기서 빨리 성장을 해야 내년에 지역 리그 가서 삽질 안 하지."
한 원정 팬의 투덜거림에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현아의 1번 배치에 대해 옹호했다.
"야, 너는 현아 얼굴만 보니깐 상관 없지! 난 얼굴 보단 실력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리사가 아주 완벽하지."
이닝 교체로 더그아웃으로 되돌아가는 리사의 모습을 바라보는 팬의 얼굴이 몽롱해져 있었다.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리사의 모습을 찍는 팬. 현아의 팬 역시 아쉬워 하며 더그아웃으로 뛰어 가는 현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2사 만루에서 점수를 얻지 못해서일까, 3회 말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한 앤서니가 다음 타자에게도 볼넷을 내주며 무사 만루의 위기를 맞이했다.
"앤서니, 어깨에 힘 풀고. 마음 편하게."
마운드를 방문한 동국이 볼넷을 내주어 아쉬워 하고 있는 앤서니에게 말했다.
"점수 내줘도 상관 없으니깐 맞춰 잡는다고 생각해. 알겠지?"
"이잉... 하지만 난 무실점으로 막고 싶은데~"
앤서니는 자신의 평균 자책점 0를 깨고 싶지 않아 했다. 지금까지 계속 무실점이었으니 아까울만 했다.
동국은 '그럴거면 볼넷을 내주지 말던가' 란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도로 집어 넣었다.
"삼진이 가장 좋겠지만, 얘들 다 전진 배치 했으니깐 땅볼이나 약한 뜬공이 나와도 충분히 무실점으로 막을 수 있어. 그러니 굳이 삼진에 목 매지 말고, 알았지?"
"응, 알았어~"
우드페커스의 타자는 4번 타자, 포수 한태연이었다. 그녀의 실력 등급은 E 등급 이었기에 C+인 앤서니가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발키리의 수비 배치는 상대 팀들이 현아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수비 배치와 비슷했다. 내야수들은 거의 투수와 비슷한 자리에 위치해 번트에 대비했고, 외야수들은 내야까지 내려와 있었다.
'어휴... 엄청 빡빡하게 해놨네... 이런 수비 시프트를 뚫으라고..? 진짜 발키리의 현아라는 얘가 어떤 기분일지 알겠네...'
한태연은 발키리의 수비 배치를 보고선 혀를 내둘렀다. 웬만한 땅볼 타구는 다 잡힐만한 수비 배치였다. 이렇게 되면 무조건 띄워야 되는데 외야까지 공을 보내기에는 투수의 구위가 너무 강했다.
'최소한 병살타만은 치지 말자..!'
한태연은 낮은 공은 다 버리고, 오로지 높은 직구만을 노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면 적어도 땅볼은 나오지 않을터였다.
'타자가 높은 코스를 원하니, 커브만 던지라고..?'
그리고 이런 타자의 생각은 타격 자세에 반영되었고, 이 미세한,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변화를 지은은 캐치해 냈다.
지은의 사인을 받은 앤서니는 그녀의 말대로 우선 커브를 던졌다.
"스트라잌~!"
높은 코스로 날아오다가 훅 떨어지는 커브에 한태연이 가까스로 나오려던 배트를 멈춰 세웠다. 그러나 공이 존을 통과하면서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이야, 지금 커브는 상당히 좋네요. 아주 폭포수처럼 떨어졌어요!]
[제 2구. 다시 커브를 던져 카운트를 유리하게 가져갑니다. 노 볼 2스트라이크!]
'아이씨... 이러면 나가린데... 일단 존 안에 들어오면 무조건 쳐야되나..? 아니야, 그러다 병살 된다. 계속 높은 코스만 노리자.'
[제 3구! 헛스윙~!! 삼진 아웃!! 앤서니가 무사 만루의 위기에서 삼진을 잡아냅니다!!]
[아, 하이 패스트볼에 여지없이 방망이가 끌려 나왔어요. 지금 보시면 존을 벗어나는 공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타자의 눈에 가까이로 오니깐 휘두를 수밖에 없어요. 공이 눈에 보이거든요.]
"좋았어~!!"
한태연을 삼진으로 잡자 앤서니는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그녀의 기쁨에 화답하듯 원정 응원석에서는 카메라 플래시가 마구 터져나왔다.
다음 타자인 나아지 역시 높은 코스를 노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녀는 이전 타자인 한태연과는 다르게 2스트라이크로 몰리게 되자, 낮은 직구를 건드렸고, 그대로 병살로 연결되었다.
[양 팀 모두 1차례씩 병살타가 나오며 흐름이 끊긴 가운데 4회 초가 시작되겠습니다. 선두 타자는 우익수 최지아 선숩니다.]
[이번에 발키리의 타순이 상당히 좋아요. 가장 잘 치는 2,3,4번 이거든요? 발키리는 이번 이닝에 반드시 점수를 내야 됩니다.]
[과연 최지아 선수가 답답한 이 흐름을 끊어낼 수 있을지... 아, 쳤습니다!! 좌익수 키를 넘기는 타구! 담장 맞고 떨어집니다! 타자 주자는 여유 있게 2루까지!! 최지아 선수의 2루타가 터집니다!]
[제가 방금 전에 점수를 반드시 내야 된다고 말했는데, 지금 절호의 득점 찬스가 나왔어요.]
[리플레이 화면을 보시겠습니다.]
[아, 지금 보니깐 김가연 선수의 슬라이더가 가운데로 몰렸군요. 아마 백도어 슬라이더를 던지려고 그랬나본데, 이게 원래는 존 바깥쪽에서 존 안쪽으로 살짝 걸치는 수준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그런데 너무 가운데로 들어왔어요. 그리고 이 실투를 최지아 선수가 놓치지 않고, 장타로 연결했네요.]
[발키리 더그아웃과 원정 팬들을 향해 최지아 선수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세레머니를 하는군요.]
지아가 세레머니를 하자, 원정 응원석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마구 터져나왔다.
[아, 저런 모습은 보기 좋아요. 보세요, 팬분들께서 얼마나 좋아 합니까. 확실히 이런 모습을 보면 발키리 팀이 상당히 스타성이 높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선수들이 다들 한 외모 하고, 성적도 뛰어나니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 이제 우드페커스는 이 위기를 잘 극복해야됩니다. 지금 이 위기를 무실점으로 넘기기만 하면 오늘 경기 이길 수 있습니다.]
[우드페커스가 여기서 아연 선수와 정면 승부를 하겠죠?]
캐스터의 물음에 해설 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죠. 아연과 리사 선수를 고의 사구로 내보내고 다음 두 타자를 삼진과 병살로 잡는다고 해도, 1점을 내줘야 됩니다.
지금 발키리의 선발 투수가 평균 자책점이 0인 앤서니기 때문에, 1점을 내준다는건 경기를 지는 거랑 마찬가지에요.]
[자, 초구! 낮게 잘 제구된 포심을 존 안쪽에 꽂아 넣는 김가연입니다!]
[역시 정면 승부 하네요. 김가연 선수는 최대한 공을 낮게, 낮게 던지면서 땅볼을 유도해야 됩니다. 장아연 선수는 언제든 타구를 외야로 보낼 수 있어요!]
제 2구는 원바운드 된 포크볼이었다. 포수가 투수에게 공을 던지는 걸 바라보며 아연은 우드페커스 배터리가 자신에게 땅볼을 유도한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내야수들이 전진 배치 되어 있는걸 보니 지아가 홈으로 들어오는 걸 막으면서 날 아웃시키겠다는 심산이겠지... 하지만, 과연 니들 생각대로 될까..?'
아연은 자신이 꼭 타점을 올리겠다고 다짐하며 장갑을 꽉 조였다.
[2앤 2의 상황에서 제 5구. 쳤습니다! 만... 이 공이 파울이 되는 군요.]
아연이 밀어친 타구가 아주 날카롭게 뻗어갔지만, 파울 라인 바깥쪽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연은 아쉬워 하며 다시 타석으로 돌아왔고, 가슴이 철렁한 김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를 잘 밀어쳤는데, 타자에겐 아쉽게도 파울 라인을 살짝 벗어나는군요.]
[언제나 그렇지만, 장아연 선수, 타격감이 좋아 보입니다. 김가연 투수는 좀 더 집중해서 공을 던져야 되요.]
"파울~!"
"볼."
"파울~!!"
존에 들어올 것 같은 공은 걷어내고, 벗어나는 공은 골라 내면서 풀 카운트가 되었다. 마운드에 서 있는 김가연의 표정에선 짜증이 물씬 풍겼다.
'흐음... 이쯤 되면 하나 정도 실투가 나올 법 한데...'
풀 카운트 상황에서 다음 타자가 리사였기에 투수는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했다. 그리고 그런 투수의 마음을 아연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승부가 상당히 길어지는군요. 아연 선수가 아주 끈질기게 버티고 있습니다.]
[김가연 선수, 지금 흥분한거 같은데, 침착하게 던져야 됩니다.]
[제 9구, 던집니다!]
김가연이 힘껏 던진 공. 그 공이 날아오자, 아연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