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168회.
공수 교대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리사가 지아에게 조용히 다가가 말했다.
"지아야, 너 만약 출루하게 된다면 도루 하지마."
"왜?"
리사의 말이 의아한 지아가 반문을 하자, 리사가 지아와 어깨동무를 하고선 더그아웃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만약 너가 도루를 성공해서 무사 2루가 되면 상대 팀에서 나랑 승부를 하겠니, 안 하겠니?"
"1루가 비었으니 안 하지 않을까..?"
"그렇지? 근데 나는 승부를 하고 싶단 말이야. 그러니 니가 날 좀 도와줘야 겠다."
당당하게 지아에게 도루 하지 말라고 말하는 리사의 모습에 지아가 고개를 돌려 동국에게 외쳤다.
"오빠~! 여기 리사 언니가, 읍읍..!"
황급히 지아의 입을 막아버린 리사. 그런 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동국이 둘에게 말했다.
"지아는 빨리 타석에 들어설 준비 하고, 리사 너는 빨리 나 따라와."
"잠깐만, 잠깐만 있어봐. 금방 갈게~!"
동국에게 금방 간다고 말한 리사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째려봤다.
"야, 너 그럴꺼야..! 도루 하지 말라니깐..!"
"후훗,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도루 해서 성공하는게 나한테도 좋고, 팀에게도 좋은데~"
지아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으며 여유롭게 말하자, 리사가 스윽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너 밤에 동국 몰래 게임하는거 일러바치지 않을게~"
리사의 말에 흠칫한 지아. 아무도 모르게 몰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 그걸 어떻게..!"
"호호,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럼 난 도루 안 할꺼라 믿고 갈게~"
사실 그냥 한번 찔러본 거였지만, 지아가 저렇게 반응을 하니 리사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리사의 타석에서 리사가 1루로 나가 있는 지아를 쳐다보니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드페커스의 투수인 안소연이 선택한 초구는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 이었다.
부웅~!
"스윙~!"
이 어림 없는 공에 리사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그에 공을 던진 안소연과 포수 한태연은 속으로 어리둥절 했다.
'음..?'
'이렇게 큰 스윙이라는건..?'
다시 한번 던진 비슷한 코스의 체인지업에 리사의 배트가 여지없이 나왔다. 그에 우드페커스 배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거 완전 택도 없는 영웅 스윙으로 일관하는 구만..?'
'좋아..! 이렇게 되면 그 리사를 삼진으로 잡을 수 있겠어..!'
"볼"
"파울"
"볼"
"파울"
그 이후로 안소연이 던진 유인구를 리사가 거르거나 파울로 커트해내자, 그녀는 조급해졌다. 잘만 하면 그 유명한 리사를 삼진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몸쪽 직구.'
'그냥 바깥쪽 체인지업으로 가자.'
'아니, 몸쪽 직구.'
'휴... 그래, 알았어.'
투수와 포수의 사인이 길어지는 걸 느낀 리사가 드디어 때가 왔음을 느꼈다.
'후후, 여기서 결정구를 던지겠구만..? 뭐가 오든 스트라이크 존만 통과해 주라고~'
일부러 유인구에 속아가며 투 포수를 유혹한 리사. 초반에 자신이 유인구들을 골라내면 그대로 볼넷으로 내보낼걸 알았기에, 일부러 2스트라이크를 헌납해 준 것이었다.
2스트라이크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투수는 정면 승부를 해볼만 하다고 느낄 것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지금 리사가 원하는, 치기 좋은 공이 날아왔다. 그에 리사는 공을 쪼갤 기세로 배트를 휘둘렀다.
따아악~!!
"우와아아아아아~!!!!!"
모두가 맞는 순간 넘어간다라는걸 직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타격음이었다. 심지어 특훈실에 있던 동국과 벨리나, 아연까지 들을 정도였다.
"뭐야, 홈런인가..?"
"아이씨, 그러면 그 년이 나한테 엄청 으스댈텐데..."
아연의 중얼거림에 동국이 그녀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연아, 그러면 너가 백투백 홈런을 치면 되지. 안 그래?"
"그렇네, 그럼 갔다 올게."
동국과 짧게 키스를 한 아연이 특훈실을 벗어나 더그아웃에 들어섰다. 그러자 리사가 지아와 함께 위풍당당하게 더그아웃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진정한 거포라면 팀이 원할 때 홈런을 때릴 수 있어야지~ 근데 우리 팀에는 그런 거포가 나밖에 없는거 같군."
리사가 거만한 표정으로 아연을 바라보며 말하자, 아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잘 보고 있어. 내가 백투백 홈런을 칠테니."
"으흠? 뭐, 열심히 해보라고~ 쉽진 않겠지만~"
씩씩대며 타석으로 들어서는 아연의 뒷모습을 리사는 여유 있게 바라보았다. 다음 타자가 AI 타자이니 우드페커스 감독이 미치지 않은 이상 아연과 정면 승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리사의 생각대로 우드페커스 벤치에서는 고의 사구로 아연을 내보냈다.
더그아웃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리사의 모습에 아연은 배알이 꼴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 후, AI 타자의 병살타와 현아의 땅볼로 4회 말이 끝이 나고, 5회 초, 벨리나가 우드페커스의 하위 타순을 상대로 삼자범퇴로 처리하며 길었던 경기가 끝이 났다.
지난 시즌 1위 팀, 다물 우드페커스와의 경기를 모두 승리로 가져가며, 남주시 1부 리그의 절대 강자의 등장을 알렸다.
벨리나는 5이닝 3자책으로 제 역할을 해주었고, 지아 4타수 2안타 2득점, 현아 4타수 1안타 1타점으로 활약 했다.
특히 주전 타자들인 리사와 아연이 펄펄 날아다녔는데, 리사가 4타석 2타수 2안타 2볼넷 2홈런 3타점 3득점으로 멀티 홈런 경기를 펼쳤고, 아연이 4타석 3타수 2안타 2장타 1볼넷 2타점 1득점으로 맹활약을 하였다.
경기가 끝이 나고 팀 내 수훈 선수로 리사가 뽑혔다. 카메라를 설치한 재은이 리사를 인터뷰 하였다.
"오늘 멀티 홈런으로 엄청난 활약을 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아, 네. 우선 팀의 승리에 이바지 해서 상당히 기쁩니다."
"홈런 친 상황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요?"
재은의 물음에 리사가 홈런 상황들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번 경기에서 계속 고의 사구를 상대 팀에서 줬었는데, 오늘은 첫 타석에 정면 승부를 하더군요. 그래서 한번 맘 놓고 휘둘러 봤는데 좋은 결과가 있었던 거 같구요.
그리고 두 번째 홈런은 아연이가 저에게 2타점 2루타를 치고 나서 으스대는 꼴이 보기 싫어서 홈런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섰었는데, 생각대로 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홈런을 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대답은 어찌 보면 오만하다고 느낄 수 있었지만, 리사의 당당한 표정은 진짜로 그게 당연한 사실로 보여졌다.
리사의 대답에 그녀를 어이없이 쳐다본 재은이 촬영을 중지하고서 리사에게 되물었다.
"진짜 이렇게 내보내? 우드페커스 팬들이 싫어할 거 같은데."
"언니, 나 리사야. 충청 리그에서도 날라다녔는데, 1부 리그에서 이정도 활약은 당연한거야. 투수와 10번 승부를 하면 10연타석 홈런도 때릴 수 있어."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재은이 한숨을 내쉬고선 다시 인터뷰를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팬 분들께 한마디 하신다면요."
"저희 구단이 구리로 이사를 오면서 경기장 시설들이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관중석도 넓어졌고, 주차장도 있으니, 많이들 방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오늘의 수훈 선수로 뽑힌 리사 선수와의 인터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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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연의 동생인 나연이 면접을 보기 위해 발키리 구단을 방문했다. 원래는 월요일 날 경기가 끝나고 면접을 보려 했으나, 아연이 너무 갑작스럽게 면접을 보는 게 아니냐고 해 금요일에 면접을 보기로 하였다.
"면접 준비 잘 했어?"
경기장 입구에서 나연을 마중 나온 아연이 그녀의 캐리어를 대신 끌어주며 물었다.
"어, 완전 열심히 준비했어. 아마 감독님도 날 뽑지 않고선 못 배길걸."
나연이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드러내자 아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동국은 너의 실력 같은 건 별로 관심 갖지 않은텐데...'
아연이 봤을때, 나연은 이미 합격이었다. 자신을 닮아 예쁜 얼굴과 몸매는 동국이 뽑지 않고선 못 배길 장점이었다.
"나연아, 그보다 넌 동국을 남자로서 어떻게 생각해?"
아연의 질문에 나연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 지금 질투하는거야? 걱정 마~ 나 남자에 관심 없는거 잘 알잖아. 물론 감독님이 성격도 좋고 잘생기긴 했지만, 여자도 많고, 무엇보다 형분데 뭘 남자로 생각해."
"그러니, 그럼 다행이고..."
나연이 동국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아연은 그래도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아연의 안내로 구단 사무실에 도착한 나연. 평소에는 거의 쓸 일이 없는 자그마한 사무실에는 동국과 재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동국을 보자마자 꾸벅 고개를 숙인 나연. 그에 그녀의 상의가 출렁거렸다. 그 광경을 빠르게 포착한 동국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하하, 그래. 어서 와. 여기는 몇 번 봤겠지만 지금 나를 도와 구단 일을 하고 있는 이재은 누나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어..."
재은을 뭐라 불러야 될지 고민하는 나연. 그런 나연의 모습에 재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언니라고 부르렴."
"네, 언니."
자리에 앉은 나연이 가방에서 준비해온 서류들을 주섬주섬 꺼내자 동국이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 서류들은 다 뭐니?"
"아, 이거요? 제 스펙이랑 그동안 제가 인터넷 오구 커뮤니티에 올린 분석글들이에요. 한번 봐 주시겠어요?"
나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동국이 서류를 받아 한번 훑어보았다. 학점이 얼마고, 무슨 무슨 자격증을 땄다고 나와 있었는데, 동국으로서는 이런 스펙보단 그녀의 신체 사이즈가 더 궁금했다.
'언니랑 비슷하게 D컵은 돼보이는데...'
나연의 스펙을 대충 훑어본 동국은 이번엔 그녀가 썼다는 분석 글들을 한번 읽어보았다. 선수들의 세부적인 스탯을 가지고 어느 선수는 발사각을 높이면 더 좋아 보인다, 투구 폼이 부상 위험이 있다, 등등... 상당히 자세하게 분석을 하였다.
'으흠... 이 정도면...'